일제강점기에 활약한 독립운동가 이름을 열 명 이상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이 드물다. 몇 해 전에도 화두 삼아 수업 시간에 부러 물어본 적이 있는데, 해가 갈수록 그 숫자가 적어지는 느낌이다. 하긴 기성세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을 성싶다.
역사 교사로서 반성부터 할 일이라, 말 꺼내기 민망할뿐더러 누굴 탓하자니 뒤통수가 따갑다. 최근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소재로 한 영화도 제작되고, 정부가 느닷없이 이념 갈등을 부추기면서 부쩍 현대사에 관심이 커졌지만,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것과는 별개인 셈이다.
안다 해도 이름 석 자를 간신히 읊는 게 고작이다. 사건을 인과관계에 따라 시대 순으로 배열하는 건 언감생심이고, 관련 인물을 연결 짓는 것도 어려워한다. 언제 국권이 피탈됐고 어느 해에 해방됐는지 연도를 정확히 말하는 아이가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누구든 안중근과 유관순, 김좌진, 홍범도, 윤봉길, 이승만, 김구, 이렇게 일곱 분을 댔다. 이 일곱 분이 아이들이 기억하는 독립운동가 이름의 전부이기도 하다. 나머지 세 분을 추가하기 위해 아이들은 머리를 쥐어뜯는다. 정확하게는 안중근 의사는 빠져야 한다. 국권 피탈 전에 순국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홍범도 장군은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과 국방부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어 육군사관학교에서 흉상을 철거하는 소동이 벌어지면서 아이들에게 그 이름이 각인된 측면이 크다. 때마침 영화까지 개봉되면서, 지금은 동시대 인물인 김좌진 장군보다 더 유명한 독립운동가가 됐다. 수천 역사 교사가 그 오랜 시간 해내지 못한 일을 대통령이 단숨에 해냈다.
그나마 이름과 업적을 혼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를테면, 안중근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거나, 윤봉길 의사가 약지를 잘라 독립을 향한 의지를 내보였다는 식으로 잘못 알고 있는 아이도 있다. 또, 이승만이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하고, 김구가 찬성하면서 둘이 갈라서게 됐다고 알은척하기도 한다.
아이들만 탓할 순 없다
맹목적으로 암기하거나 어설프게 공부하다 보니 생기는 해프닝이라고 눙치지만, 뒷맛이 영 개운찮다.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멸사봉공과 위국헌신의 삶을 오롯이 기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업적을 정확히 아는 것이 시작이다. 그런 후라야 그들의 숭고한 삶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새기게 된다.
그렇다고 애꿎은 아이들만 탓할 순 없다. 고백하자면, 역사 교사인 나 역시 타성과 관행에 젖어 아이들이 익히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언저리만 맴돌 뿐이다. 시험에 출제되지 않는 이름들은 진도 나가는 데 급급해 굳이 가르치지 않을뿐더러 따로 공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기실 이 글은 역사 교사의 직무 유기에 대한 반성문이다.
광복 79주년에 즈음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문해 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을 몇 분이나 알고 있는지를.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헌법 전문의 첫 구절에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토 박은, 명실공히 대한민국의 시작이자 정통성의 근간 아닌가.
김구,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박용만, 최재형, 신채호, 신규식, 문창범, 박은식, 이상룡, 이동녕, 엄항섭, 조성환, 차리석, 김동삼, 그리고 지청천. 노트북 앞에 앉아 스스로 즉문즉답해 보니 이렇게 열일곱 분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그마저 그분들의 직함 외엔 정확한 이력을 말할 깜냥도 못 된다. 문창범의 경우, 오래전 동료 교사들과 함께 연해주를 답사할 때 이동휘와 최재형에 관하여 공부하며 덤으로 알게 된 독립운동가다. 또, 이동녕과 조성환, 차리석은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역을 참배하면서 바로 아래에 함께 모셔져 있어 그때야 알게 된 경우다.
사족 같지만, 효창공원엔 이봉창과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와 그들을 이곳에 모신 김구, 그리고 앞서 언급한 세 분의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셔져 있다. 삼의사의 이름을 낯설어하는 국민은 없을 테지만, 세 분 모두 임시정부 요인으로 분류하진 않는다. 이봉창과 윤봉길은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의 단원이고, 백정기는 일제강점기 3대 의거로 평가되는 육삼정 의거를 기도한 아나키스트다.
신규식은 한쪽 눈을 잃은 채 일제를 노려본다는 뜻의 예관이라는 호 덕분에 기억하고, 박용만은 미국에서 이승만과 갈등을 벌이다 밀려난 뒤 변절자로 내몰려 다른 독립운동가에 의해 암살 당한 비극적인 삶 때문에 이름이 잊히지 않는다. 또, 김동삼은 저 유명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주역으로, 그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자 그를 존경하던 한용운이 장례를 치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또렷이 기억된다.
이런 때일수록 독립운동사에 관심 가져야
그러던 차에, 또 한 분의 임시정부 요인을 알게 됐다. 지난 주말 전남 함평에 자리한 일강 김철 기념관에 다녀왔다. 가족끼리 소풍 삼아 나들이하는 길에 우연히 들렀다. 도로변 안내판에 임시정부 요인이라는 수식어를 달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의 이름을 놓칠 뻔했다. 왜 그런 인물들 있잖은가. 당대의 거물급 인사에 가려 업적이 과소 평가되는 경우 말이다.
그는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부터 순국할 때까지 평생을 임시정부와 함께한 독립운동가다. 특히 사실상 임시정부가 와해된 1930년대 초,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당시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으로서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기획했다. 당시 집단지도체제의 김구와 이동녕, 조소앙 등의 이름에 가려졌을 뿐, 초기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이었다.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항주로 근거지를 옮겼을 때도 국무위원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직후 고향의 아내에게 재혼을 권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의지를 밝힐 정도로 열혈 투사였다. 흡사 '남아출가생불환(男兒出家生不還)'이라는 글을 남기고 망명을 결행한 윤봉길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기념관이 세워진 자리는 그의 생가터다. 이곳 유적의 남다른 특징은 사당, 기념관 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의 건물을 그대로 옮겨놓았다는 점이다. 그가 평생을 임시정부와 생사고락을 함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읽힌다. 건물 내부에는 집무실과 회의실 등이 복원되어 있고, 그의 동지인 임시정부 요인들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임시정부 건물을 돌아 나오면 뒤편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선 무덤이 있다. 김철과 두 명의 부인을 함께 모신 합장묘다. 사실 김철의 유해는 현재 찾을 수 없는 상태다. 1934년 48세를 일기로 순국했을 때, 임시정부가 옮겨 간 항주에 시신을 모셨지만 이후 그곳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묘소의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다.
망명하면서 홀로 남겨진 첫째 부인은 자결로써 그의 뜻을 따랐다고 하며, 중국에서 재혼한 둘째 부인은 그가 세상을 뜬 직후 두 딸과 함께 귀국했다고 전해진다. 알고 보니, 묘소 곁 아름드리 소나무는 첫째 부인이 자결한 현장이라고 하는데, 이름하여 '단심송(丹心松)'이다. 숙부인 김철의 손에 이끌려 13세의 나이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전개한 김석의 자취까지 보존되어 있어 방문객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아 그렇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자취는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다. 독립운동의 공적으로 건국 훈장을 수훈한 이들만 수백 명이다. 나고 자란 곳이든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든, 비유컨대, 넘어지면 코 닿을 듯한 거리에 사적지가 있기 마련이다. 길을 가다 우연히 들르게 된, 이곳 일강 김철 기념관처럼 말이다.
정부가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해 일제에 의해 강제 노역을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조차 관철하지 못하고, 뉴라이트 세력이 한국학중앙연구원과 독립기념관 등 국책기관장 자리를 꿰차는 어이없는 시절이지만, 이런 때일수록 대한민국 헌법에 명토 박아둔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에 더욱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물론, 그 시작은 조국의 독립에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기억하는 일이다. 15일은 79주년 광복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