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이라는 표현 하에 경쟁과 입시몰입교육을 지양하고, 자치와 상생을 위한 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존재들과 좌충우돌하며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하고자 합니다.[기자말] |
<대안교육이라 쓰고 미래교육이라 읽는다> 연재를 15화로 끝맺었다. 3개월 동안 기사를 쓰지 않으면 연재가 자동 종료되는 <오마이뉴스>의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미래교육'이라는 단어에 대한 목적과 인식의 괴리라고나 할까.
크나큰 헛발질을 예고하고 있는 'AI교과서'나 엄청난 교육 예산 낭비를 초래하고 있는 '에듀테크 사업' 등을 보면 미래교육의 의미는 단지 '첨단 기기 사용법 안내' 정도로 격하된 듯하다. 심지어 인문, 예술 등을 가르치는 과목에서조차 기계와 인공지능에게 인간 고유의 사유와 심미성을 내어주고 있다.
본인이 생각한 미래교육을 다소 단순화하여 1차원적으로 표현하자면, "미래 인공지능화 된 사회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교육'이었다. 역시 우리 학교의 교육 철학과 방침 또한, 미래 사회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각자의 고유한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시행되고 있는 교육의 태세는 오히려 반대로 가고 있는 듯하다. 만화적 상상을 더하면 마치 AI 문명에 잘 적응하고 복종할 수 있는 사람을 양성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러한 교육은 생성형 AI나 관련 기기 없이는 더 이상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없는 바보를 만들어 낼 것 같기도 하다.
생성형 AI의 놀라운 발전, 심지어 창작을?
며칠 전 야간 시간에 예닐곱 명의 교사와 함께 교육 연구 모임 중이었다. 그중 방학 기간을 이용해 미래교육 연수를 다녀온 두 명의 교사가 나에게 놀라운 것을 보여주겠다며 노트북을 열었다. 그것은 바로 AI가 창작한 음악이었다.
나는 음악 교사이다. 작곡을 전공했고 알량한 재주를 이용해 아이들과 창작뮤지컬을 만들어 공연하는 수업을 진행 중이다. 3년째 해마다 10곡에 가까운 곡을 새로 만들면서 전전긍긍한다. 12월 중하순 경으로 잡혀 있는 공연을 과연 제대로 올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학생들에게 독촉을 받아가며 악곡을 가까스로 완성한다.
이 모든 과정이 AI로 인해 단 몇 분만에 끝난 결과물을 들으니 실로 놀라웠다. 심지어 제법 유려한 음성과 정확한 발음으로 노래까지 더해져 있었다. 전혀 서툴지 않았고 가사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게다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까지 정확하게 담겨 있었다. 들려준 선생님에게 입을 떼었다.
"희망이 생겼습니다."
"어떤 희망이요?"
"이번 뮤지컬 창작을 빠르게 마무리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하하하하."
당연히 농담이었다. AI에게 맡길 것이었다면 애초에 창작을 안 하지 않았을까. 시중에 좋은 노래들은 널리고 널렸으니 말이다.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싶다면 AI 사용을 최소화 해야
며칠이 지난 후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생성형 AI의 능력을 살짝 맛본 후 잠시나마 조금 흔들렸던 부분이 있었다. '가사 쓰기 활동에서는 적당한 통제 하에서 AI의 도움을 살짝 받아도 되겠는데?"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곧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는 순간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성이 나올 수 있는 구멍이 순식간에 막혀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생각해 보라. 명령창에 몇 문장, 아니 몇 글자만 써도 결과물이 바로바로 나오는 상황에, 어떤 창작을 위해 상상하고 고민할 것인가. 결과물이 곧 실적이 되는 어른의 사회에서는 물론 AI의 도움을 받아 각종 업무에 필요한 콘텐츠를 빨리,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수업의 목표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발달과 성장 아니던가.
당장은 수업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잠자던 아이들이 일어나고 한 문장도 쓰지 못하던 아이들이 갑자기 한 편의 수필을 써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해당 학생에게 진정으로 글 쓰는 능력을 키워주는 과정이 될 것인가?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과물을 내는 행위인가, 그로 인한 배움과 성장인가.
더구나 이 과정이, 소위 말하는 에듀테크 속에서는 개인기기를 통해 곧바로 담당교사에게 전달된다. 눈 맞춤, 손글씨, 상호작용 없이 말이다. 학교는 회사가 아니고 학생은 회사원이 아니다. 수행평가는 맹목적 실적물 쌓기가 아니다. 수업에서, 학교에서 학생이 하는 모든 활동은 그로 인한 '성장'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학교 현장에 이러한 고민이 없다는 것이다. 학생에게 손쉬운 결과물을 안겨주는 이 행위가 그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 숙고하는 시간 없이, 눈앞에서만 성공적인 수업을 가져다주는 AI의 편리함에 젖어 들고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교육의 방향과 목적을 제시하고 책임져야 할 교육부와 교육청이 오히려 이러한 태세를 부추기고 있다. 사회의 변화가 학교에 고스란히 옮겨갔을 때 교육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면 그것을 오히려 통제하고 제한해야 할 터인데, 앞다투어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더 빨리 교실로 들일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기존에 사용하던 기자재는 창고로 들어갔고 스마트칠판, 개인용 노트북이 보급되었다. 사용 연한이 지나지 않아 폐기할 수도 없고 공적 물품이라 기부하거나 중고로 팔 수도 없다. 아직도 전원을 넣으면 힘차게 켜지는 TV와 프로젝터 등이 할 일을 잃고 잠정적 고철 신세가 되었다.
학생을 직접 만나는 교사의 수는 줄여가면서 AI교과서 사업과 각종 에듀테크 연수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는다. 이 모든 것이 교육적 효용성을 지니는지에 대한 검증 없이 한두 해만에 이루어졌다. 교육은 이제 '백년지대계'가 아니라 '백일지소사'에 불과한 수익사업이 되어버렸다.
정책이 그러하더라도 현장의 교사는 부화뇌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아이들의 두뇌와 인성, 사회성과 적응력을 키우기 위해선 고되고 지난한 과제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둔 채로 학습도구와 교수방법을 선택하고자 한다.
난 올해도 내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뮤지컬 대본을 만들어낼 것이다. 시적인 표현을 어려워하는 아이들에게 어느 무엇의 도움 없이 내면의 고민을 통해서 서툰 가사라도 한 편 완성하게 할 것이다. 나 또한 밤을 밝혀가며 악상을 떠올리고 곡을 써 나가야 한다.
그렇게 만든 악곡에 어우러질 모든 안무는 학생들이 직접 예술적 상상을 통해 만들고, 함께 시연해 보며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나갈 것이다. 비록 촌극 수준의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직접 완성한 뮤지컬을 무대에서 공연하고, 그 과정을 통해 부쩍 성장한 학생들의 내면을 바라보며 뿌듯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