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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투트가르트 중앙역 공사현장
슈투트가르트 중앙역 공사현장 ⓒ 박제민

슈투트가르트 기차역(중앙역)의 풍경은 이자르강과 확연히 달랐습니다. 분주해보이는 사람들은 그렇다쳐도, 군데군데 쳐진 철조망과 커다란 기계가 내는 시끄러운 소리들이 소란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이곳에 온 이유가 몸소 느껴졌습니다. 바로 '슈투트가르트 21'이라 불리는 사업을 보는 것과, 이 사업을 여전히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방적인 개발 사업, 시민의 반대를 불러오다

슈투트가르트 21은 독일 철도회사인 도이체 반(Deutsche Bahn)과 독일 연방 교통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슈투트가르트 시가 합작해서 슈투트가르트를 교통의 허브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수많은 기차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어 이용에 편리하도록 슈투트가르트 기차역을 지하에 새로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원래 기차역이 있던 땅에는 개발 사업을 통해 수익을 얻도록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곧장 이 사업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기차역 건물을 철거해야 하고, 250년 이상된 오래된 나무를 베고 공사 과정에서 지하수가 오염되는 등 환경 문제가 발생할 것이며, 막대한 재정에 대한 부담이 있고, 예산들을 꼭 이렇게 써야 하는지 등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시민들의 동의를 구하거나 설득하는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발표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시민들은 슈투트가르트 21을 반대하는 소송을 제기했만 기각됐습니다. 주민투표를 하자고 6만7천 명이 청원을 했지만 또 기각됐습니다. 결국 정부와 철도회사가 공사를 시작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자 2009년 10월 26일에 시민 4명이 자발적으로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갖게 될 '월요시위'의 시작이었죠. 월요시위는 점차 그 규모가 커져서 2010년에는 매주 2천 명에서 3천 명이 모였는데, 날선 구호를 외치거나 거친 행동을 하지 않고, 대신에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낭독하며 슈투트가르트 21의 문제점을 고발했다고 합니다.

 슈투트가르트 21을 반대하는 월요시위 모습
슈투트가르트 21을 반대하는 월요시위 모습 ⓒ wikipedia

하지만 슈투트가르트 21을 추진하는 연방, 주, 시 정부와 철도회사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시위 규모는 수만 명대로 늘어 났습니다. 2010년 9월 30일, 기차역 근처에 있는 슐로스가든(schlossgarten)의 나무를 처음 베어내던 날에 시위대와 경찰이 크게 충돌했습니다. 이 충돌로 인해서 400명 이상이 다쳤고 특히 경찰의 물대포로 인해 눈을 다친 시민이 결국 실명하게 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날이 목요일이었기 때문에, 이날은 '검은 목요일'로 불린다고 합니다.

'검은 목요일' 이후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집회 측 추산으로 10~15만 명까지 시위대가 늘었습니다. 당황한 주 총리는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 CDU)의 원로 정치인인 하이너 가이슬러(Heiner Geißler)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공사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2010년 9월 30일, '슈투트가르트 21' 반대 시위대와 경찰의 물대포
2010년 9월 30일, '슈투트가르트 21' 반대 시위대와 경찰의 물대포 ⓒ wikipedia

정치의 변화, 그리고 역설

슈투트가르트 21 반대 운동은 정치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원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는 소득 수준이 높고 정치성향이 보수적인 곳으로 기민련의 텃밭이었죠. 하지만 2009년 슈투트가르트 시의회 선거에서 역사상 최초로 녹색당이 다수당이 되었습니다. 2011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선거에서는 녹색당의 빈프리트 크레치만(Winfried Kretschmann)이 주 총리가 되는, 말 그대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녹색당이 주 정부를 주도하는 것 또한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죠. 2012년 슈투트가르트 시장 선거에서도 녹색당의 프리츠 쿤(Fritz Kuhn)이 시장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의 원인은 슈투트가르트 21 반대 운동에 앞장섰던 녹색당에게 시민들이 지지를 보내준 결과였습니다. 슈투트가르트 21을 밀어붙이던 기민당의 정치적 패배였죠. 또한 우물쭈물하며 모호한 입장을 취했던 사민당은 녹색당에 다수당을 내주게 되었습니다.

 (왼쪽부터) 녹색당 소속으로 당선된 빈프리트 크레치만(Winfried Kretschmann) 바덴 뷔르템베르크 주 총리(2011년~현재)와 프리츠 쿤(Fritz_Kuhn) 슈투트가르트 시장(2013~2021년 재임)
(왼쪽부터) 녹색당 소속으로 당선된 빈프리트 크레치만(Winfried Kretschmann) 바덴 뷔르템베르크 주 총리(2011년~현재)와 프리츠 쿤(Fritz_Kuhn) 슈투트가르트 시장(2013~2021년 재임) ⓒ Stuttgarter Nachrichten

2011년 11월 27일, 결국 슈투트가르트 21에 대한 주민투표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투표 문구가 말썽이었습니다. 투표 문구는 이랬습니다.

슈투트가르트 21 철도 프로젝트의 계약 계약에 대한 취소권 행사에 관한 법안(S 21 취소법)에 동의하십니까?

'예'에 투표하면 슈투트가르트 21 철도 프로젝트와 관련된 주 정부의 자금 지원 의무가 있는 계약을 취소하기 위해 주 정부가 해지권을 행사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에 찬성하는 투표를 하게 됩니다.

'반대'에 투표하면 주 정부가 슈투트가르트 21 철도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주 정부의 재정 지원 의무가 있는 계약을 해지하기 위해 해지권을 행사하는 의무에 반대하는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이 투표 문구는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른바 슈투트가르트 21 취소법에 대한 찬성이 41.1%, 반대가 58.9%로 나왔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단순하게 "슈투트가르트 21에 찬성합니까, 반대합니까?"라고 물어봤다면 어땠을까요?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슈투트가르트 21 반대 운동을 통해 집권하게 된 녹색당 주 정부가 주도하여 슈투트가르트 21을 계속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반대 운동은 끝난 걸까요?

슈투트가르트 21 반대, 월요시위에 참여하다

다음날, 기행팀은 월요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예전처럼 수천, 수만 명이 모이는 자리는 아니었고, 대략 수백 명 정도가 모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손수 만든 피켓을 들고 음악을 연주하고 군데군데에서 음식을 나눠 먹으며 발언을 이어갔죠.

 계속 하고 있는 '슈투트가르트 21' 반대 월요시위
계속 하고 있는 '슈투트가르트 21' 반대 월요시위 ⓒ 생명평화아시아

기행팀에게도 연대 발언의 기회가 주어져, 이번 기행의 주최단체인 생명평화아시아의 이명은 활동가가 발언했습니다.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는 한국과 특히 대구시의 무분별한 개발 문제를 거론하며, 이것이 슈투트가르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개발에 맞서 싸우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이며 함께 연대해서 맞서 싸우자고 했습니다. 침착하면서도 힘 있는 발언에 많은 박수가 터졌습니다.

 슈투트가르트 21 반대 월요시위에서 연대 발언하는 생명평화기행팀
슈투트가르트 21 반대 월요시위에서 연대 발언하는 생명평화기행팀 ⓒ 생명평화아시아

2시간 발표를 준비한, 머리 희끗한 반대활동가들

기행팀이 초대를 받아 간 곳은 슈투트가르트 어느 골목에 있는 소박한 사무실이었습니다. 거기서 여전히 S 21에 반대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났습니다. 다들 머리가 희끗희끗했죠. 에어컨 없이 선풍기 몇 대가 열심히 돌아가는 그곳에서, 활동가들은 능숙하게 빔 프로젝트를 수동으로 연결하며 미팅을 준비했습니다.

활동가들은 저희에게 할 말이 많다면서 장장 2시간(!)에 걸친 발표를 했습니다. 그 열정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어서, 오후 더위에 감기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그 내용을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분들은 왜 여전히 반대하는지, 대안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동안 만들어진 것을 완전 무위로 돌릴 수는 없으니, 지상은 최대한 생태적으로 활용하고, 지하는 물류 통로로 활용하자는 계획을 갖고 있더군요. 무조건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슈투트가르트 21 반대 활동가들이 2시간 동안 열띤 발표를 해주었다.
슈투트가르트 21 반대 활동가들이 2시간 동안 열띤 발표를 해주었다. ⓒ 생명평화아시아

드디어 발표가 끝나고 으레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기행팀 일행 중에서 한 분이 녹색당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헉! 거침없이 직진으로 나아가는 질문을 한 그 분은 한국 녹색당이기도 했습니다. 활동가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 있다. 녹색당은 현재 정부/여당으로서 기민련과 연정을 구성한 입장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헉! 이렇게 넓은 마음이라니! 한국 녹색당 당원이기도 한 제가 왠지 모르게 부끄럽기도 하고, 그 넓은 마음에 뭔가 숙연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활동가가 말을 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도와주는 것은 좌파당(Die Linke)뿐이다. 하지만 바덴 뷔르템베르크 주는 보수적이어서 좌파당은 인기가 없다."

버티며 저항하기

월요시위도, 활동가 미팅에서도, 참가자와 활동가대부분 나이가 많아 보였습니다. 월요시위 때 한 참가자에게 젊은이들이 왜 많이 참여하지 않은지 물었습니다. 선뜻 명확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들도 고민이 많다고 했죠. 한때는 십수만 명이 모여 항의할 정도로 큰 규모였지만, 오랜 투쟁 기간과 몇 번의 좌절과 타협 끝에 많이 줄어든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하지만 비록 그 수가 적고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활동가와 시민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버티며 저항하기! 슈투트가르트에서 이 사람들을 보고 만나면서 든 생각입니다. 자연스레 제주 강정마을도 생각나고, 곳곳의 투쟁 현장들이 떠올랐습니다. 버티며 저항하는 사람들, 활동과 삶이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 말이죠. 또 한국의 녹색당 당원들도 떠올랐습니다. 녹색당이 시민을 대표해 의회에 진출하고, 또 영향력 있는 정당이 되길 바라면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언제가 그럴 때가 온다면 한국의 녹색당은 여기 독일 녹색당의 모습과 얼마나 닮고, 또 얼마나 달라야 할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과 세계의 곳곳에서 버티며 저항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슈투트가르트를 떠났습니다. 마침내 기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녹색 도시, 프라이부르크로 향했습니다.

#독일생명평화기행#녹색당#생명평화아시아#슈투트가르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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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정치연구소 연구원/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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