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대학이 있는 줄도, 대학 갈 생각도 못 했던 시골 촌놈이 용기를 냈죠. 1백만원만 주면 성공해 돌아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한 거죠. 대학을 가고 화가가 됐는데, 이번엔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겁니다. 먹고 살 길도 그림을 어찌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여주에 처박혀 길을 찾았죠. 그렇게 잡은 실마리 하나. 나만의 화풍을 찾아야겠더라고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스물네 번째 주인공 김범석(60·남) 한국화가의 말이다. 25일 여주 장암리 작업실에서 마주한 그는 '늦깎이 화가'라서 그런지 자신만의 길(화풍)을 찾는 일도 늦었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의 미술과 그 미학의 끝은 오리무중이라고 했다.
"제가 대학을 또래보다 7년 늦게 다녔어요. 학생 때는 알바를 해가며 그럭저럭 잘 놀았죠. 졸업하고 나니 길이 안 보이는 거예요. 결국 그림을 그만두려고 했죠. 그때 아내 될 사람이 나타났어요. 억지춘양이랄지, 다시 시작했죠. 하지만 길을 못 찾으니 일탈이 계속되는 거예요."
오리무중 그 한가운데서 억지춘양
우여곡절 끝에 그는 여주에 정착했다. 그곳 자연 속 삶은 그에게 성찰의 기회를 줬다. 끝없는 뒤 돌아보기, 그 끝에 찾은 건 궁극의 그 무엇이 아니었다. 자신을 깨닫고 자신이 하려는 미술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정이 곧 미술이라는 깨달음.
그 화풍을 궁금해하자 손사래를 치면서도 말을 잇는다. 머릿속에 떠올려도 그려지지 않고,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창의력이 발동해 시작하면 순간순간 떠오르는 것, 그게 쌓여 흐름이 된단다. 대나무, 숲 등 대상의 단순 묘사를 넘어 은유적 표현을 찾는다고 할까.
"시를 읽게 됐어요. 문인화도 찾아보고. 시적 감성, 그 함축적 은유를 알아가고 있죠. 내 그림을 하나의 시로 여겨 메모해 보기도 하고요. 답은 안 나오고 어렵기만 하네요. 구도와 색감 씨름을 하기도 해요. 감성을 깨우는 시를 더 많이 읽으려고요."
경교명승첩이란 그림 모음이 있다. 화가 겸재(정선)와 시인 사천(이병헌)이 주거니 받거니 시에 그림, 그림에 시를 붙인 것이다. '시화상간첩(詩畵相看帖)'이라 불리는 까닭이다. 겸재가 '목멱조돈'(남산 해돋이)를 그리니 사천이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시를 붙였다. 남종화(문인화) 선조 왕유(당나라 시인 겸 화가)도 그림과 시를 같이 했는데, 시인 소동파(북송)는 '시 속 그림 있고, 그림 속 시 있다'고 했다. 김 작가의 시상(詩想)을 기대한다.
김 작가의 미술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때로 거슬러 오른다. 농촌(전북 김제)에서 자랐는데 학교 마치고 귀갓길 논둑 수로에 걸터앉아 풀밭이나 맨땅에 무언가를 그리는 기억에서 시작된다. 재능은 모르겠고, 그림이 재미있었다고 했다.
"둘째 형이 50색깔 크레파스를 사다 준 적이 있어요. 그 형이 언젠가 양철통을 가져오라더니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서울 있을 때 극장 간판 그림을 그렸다면서요. 형 방에는 자신이 그렸다는 그림이 걸려 있었죠. 푸시킨의 시 한 구절(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화내지 말라)도 쓰여 있었고요."
고교에서는 미술부 활동을 했다. 그 애들 따라 시내 화실에도 가봤다. 거기서 미술대학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원장이 미대 출신인데, 나더러 미대에 가보라고 권했다. 무턱대고 그 원장이 다녔다는 미대에 지원해봤는데, 떨어졌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대학은 언감생심이었죠. 갈 생각도 안 했고요. 근데, 미술부 10명 중 9명이 미대에 진학하고 나만 남은 거예요. 7년여 농사를 짓다 용기를 냈죠. 모심는 날인데, 아버지에게 1백만원만 주면 성공해 돌아오겠다고 했죠."
그는 아버지가 내미는 1백만원을 받아들고 그해 6월 상경했다. 홍대 앞 독서실(돈 없어 총무 알바)에 기거하며 화실(청소 알바)에서 6개월간 그의 인생 가장 혹독한 공부를 했다. 그 해 그 대학 미술대 동양화과에 입학했다.
그림 속 시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대학 때는 쏘다니며 놀았다. 전시회도 다니고, 그림 여행도 했다. 산이 좋았는지, 현실도피였는지 지리산·설악산을 수없이 다녔다. 입산금지철인 줄 모르고 설악산에 들어갔다 들켜 관리자에게 막걸리에 파전 사주고 훈계 듣고 몰래 한밤중 팬티(더워)만 입고 양폭산장까지 오른 일. 산장지기한테 얻어먹은 소주와 명란젓·취나물 안주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게 대학 4년을 지내고 보니, 그림 공부를 한 게 없는 거예요. 미술학원 강사 한 거 말고 남은 게 없더라고요. 대학 공부라는 게 걸음마 단계이니, 맛만 조금 보고 만 셈이죠. 졸업할 때 절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앞날이 캄캄했거든요."
94년 졸업하고 2년여 어정쩡 보냈다. 방황이랄 수도 있고. 서울 생활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다. 헌데, 대학 동기가 한 여자를 소개해 준 게 그의 마음을 바꿔놓았다. 2년여 연애 끝에 결혼도 했다. 돈 걱정 말고(자기가 벌 테니) 그림 계속하라는 격려도 들었다.
대학원(석사과정)에 진학했다. 두 번 낙방했는데, 아내(러시아문학 전공)한테 영어 개인교습을 받고 합격했다. 그 덕에 2006년부터 대학 강단에 설 수 있었다. 10여 년 덕성여대, 성신여대, 한성대, 중앙대, 강원대, 한예종 등. 아내는 전문서점(어린이), 도서관 학습프로그램 등으로 돈벌이를 했다.
"장인이 돌아가시고 장모를 모시기로 해 함께 살 집과 작업실을 찾던 중 2004년 여주로 이주하게 됐다. 서울서 찾다 돈이 모자라 양평을 뒤졌는데, 역시 돈이 문제였다. 장호원까지 내려갔다 올라가는 길에 들려라도 보자고 왔던 곳 계약이 성사됐다."
여주살이는 그에게 안정을 줬다. 미술 작업도 다시 할 수 있게 됐다. 공부도 예술도 늦깎이였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정선·영월 등에 스케치 여행도 자주 다녔다. 예술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던 대학 강사는 2014년 우연히 그만두게 됐다.
"해남 한 섬에 문화예술 창작시설(레지던스)을 운영한다며 어느 기업이 작가 3명을 초대한 거예요. 강사를 마지막으로 한 데가 한예종인데, 당장 그만두고 참여했죠. 일이 잘 안 풀렸어요. 비금도·보길도 등 인근 섬을 다니며 10여 개월 낚시에 술놀음에 빠졌죠. 설상가상일까. 이듬해 봄 정원에 쌓아놓은 나무를 태우려다 불이 이웃 묘목밭으로 번져 119가 출동했고요."
악재가 겹쳤다. 하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 갈피를 못 잡아 어수선하고 늘 뭔가에 휘둘리던 자기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 시절 독서를 게을리했던 반성까지. 최근까지 고전문학을 2백권이나 읽었다. 내면으로 파고든 것이다.
"화첩 대신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죠. 나만의 화풍을 찾으려고요. 아이디어를 그리기 시작했죠. 먼저 1권(150매)을 채웠죠. 그 밑그림(아이디어)을 작은 작품(드로잉)으로 1차 완성하고 수정 보완을 거쳐 최종 작품으로 그리는 거였어요. 철사 조형, 목조각 등도 도움이 됐어요."
그는 이제야 자신의 미술을 한다고 겸손이지만, 나름 잘나가는 작가였다. 중앙미술대전(중앙일보, 1998년) 특선, MBC미술대전 우수상(1992년, 대학시절), 성곡미술관 선정 '내일의 작가'(신인, 2012년)가 됐다. 개인전도 성곡미술관(2012년 내일의 작가 선정 특전, 수백점 출품), 자하미술관(2016년 여름, 80여점 출품) 등 8차례 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등에 가면 그의 작품(판매)을 만날 수 있다.
악재 속 어수선함 걷어냈더니
가족은 부인과 사이에 대학생(휴학중) 딸 하나를 뒀다. 생계 부담에 힘들었을 부인은 남편 예술을 어찌 볼까 궁금했다. 화가는 에둘러 미안함을 표했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평가가 또 있겠냐면서. 딸에게는 미술학도는 아니지만 좋은 그림을 볼 줄 아는(눈물 흘릴 줄 아는) 마음을 가지라고 늘 당부한다고도 했다.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정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수습한 뒤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어간 화가다. 당송(唐宋) 그림을 흉내 내지 않고 실경(실재풍경)의 단순 묘사를 넘어 조선의 가치를 담은 회화풍을 재구성했다. 추사(김정희)도 구양순체 등 대륙의 유명 서화를 익혔지만 자신만의 서체를 창안하고 차별화한 서화풍을 만드는 데 일생을 바쳤다. 한국화(동양화)의 기존 틀에 갇히기 싫어 자신만의 화풍을 세워가는 김 작가. 그의 이런 구슬땀은 분명 한국화를 더욱 빛낸 열정으로 평가받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