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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일을 구하시면 돼요.', '그런 것 따지면 이 바닥에서 일 못합니다.'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송 노동 실태에 대한 반응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 현실이 개선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진다. 이러한 현실을 당장 완전히 바꿔내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방송 제작 현장에서의 고용 불안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제작이 진행 중인 기간 동안만 고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드라마는 짧게는 3개월, 길어도 반년, 예능의 경우도 시즌제가 정착하면서 하나의 시즌을 제작하는 기간 동안만 고용한다. 마치 건물을 짓는 과정하고 비교할 수 있다. 고용기간은 짧아도 노동시간은 길다. 촬영 시간을 기준으로 일주일에 52시간을 꽉꽉 채우고, 직군에 따라서 준비시간을 감안하면 실제 노동시간은 더 길다. 아예 노동시간 개념이 없이 무제한으로 일하는 직군도 많다. 짧은 기간에 매우 집중적으로 일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셈이다.

콘텐츠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이유로 팀이 교체되는 일도 종종 있다. 드라마나 예능이 아니어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제작을 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도 쇄신을 이유로 작가를 교체하는 일이 벌어진다. 경쟁강도가 높아진 최근 미디어 환경의 변화도 영향이 있겠다. 방송은 OTT 뿐만 아니라, 유튜브와도 경쟁하고 있다. 경쟁 강도가 높아진다고 콘텐츠의 질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일하는 이들에게는 바로 영향이 간다. 특히 제대로 된 계약서나 노동조합과 같은 안전장치가 없는 방송 산업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상시적 실업 상태, 작동하지 않는 고용보험

드라마 촬영 현장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는 수많은 스태프들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드라마 촬영 현장드라마 촬영 현장에서는 수많은 스태프들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방송 일을 하는 이들에게 실업은 일상이다. 이들이 실업을 경험하는 빈도에 비해서 실업급여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한빛센터가 지난 3~4월에 진행한 방송산업 고용불안 실태조사에서 응답자 179명 중에서 실업급여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비율은 38.5%에 불과했다. 방송 업계에서 5년 이상 일을 한 경우로 좁혀도 42.1%에 불과하다. 오래 일을 해도 실업급여는 반쪽짜리 제도인 셈이다.

실업에 대한 안전망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업급여를 받지 못했던 이유에 대한 문항에는 실업급여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29.3%),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서(22.8%), 고용보험 가입일수가 충족되지 않아서(20.7%), 퇴직 사유를 제대로 처리해주지 않아서(15.2%) 순으로 나타났다.

고용보험 가입일수가 충족되지 않은 경우와 자발적 퇴사인 경우는 고용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였어도 실업급여 수급이 되지 않는 경우이지만, 나머지 사유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였다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실질적 사각지대'라고 볼 수 있다. '실질적 사각지대'에 놓인 종사자가 75.0%에 달한다.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만 하여도 방송 산업에서의 고용안전망 사각지대를 4분의 1로 줄일 수 있는 셈이다.

방송종사자들의 사회보험 가입과 실업급여 수급 경험 2024년 3~4월에 방송 종사자 179명에게 사회보험 직장 가입률과 현재까지 실업급여를 받아 본 경험이 있는지, 받아 본 경험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물었다.
방송종사자들의 사회보험 가입과 실업급여 수급 경험2024년 3~4월에 방송 종사자 179명에게 사회보험 직장 가입률과 현재까지 실업급여를 받아 본 경험이 있는지, 받아 본 경험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물었다.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다른 사회보험에 대해서도 직장 가입을 경험한 비율이 훨씬 낮았다. 산업재해보상보험(36.3%), 건강보험(36.9%), 국민연금(37.4%) 모두 3명 중 1명만 직장 가입을 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최근에 가입 경험이 있는 경우는 훨씬 적을 것이다. 산업재해의 위험은 방치하고, 건강보험은 지역가입자나 피부양자로 들어가고, 국민연금은 가입을 회피하는 것이 종사자들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각자도생은 당연해진다. 당장은 실업급여와 같은 고용안전망으로부터의 배제가 문제이지만, 10년, 20년이 지나면, 방송 분야에서 일한 이들이 노후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예술인 고용보험에 가입 경험이 있는 경우를 포함한다면, 종류에 상관없이 고용보험 가입을 경험한 비율은 84.3%까지 높아졌다. 세부적으로는 기술 직군에서 예술인 고용보험 가입 경험이 82.9%까지 높게 나타났다. 방송 분야에서 예술인 고용보험 가입은 의무사항이라는 것도 많이 알려져 있어서, 상대적으로 가입률도 높고, 그 덕분에 종사자들의 소득 안정에 보탬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술인 고용보험의 명과 암

예술인 고용보험은 2023년 11월까지 시행 3년 동안의 방송(연예) 분야 누적 가입자가 7만 3000명에 이르렀다. 이는 방송 관련 업종(영상·오디오 기록물 제작 및 배급업, 방송 및 영상·오디오물 제공 서비스업)의 기존 고용보험 가입자가 총 7만 명 내외임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수준이다. 하지만 예술인 고용보험에 대한 가입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을 좋게만 볼 수 없다. 대다수의 방송 종사자는 기존의 고용보험에 가입되어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예술인 고용보험은 제도의 취지 자체가 기존의 고용보험으로 포괄되기 어려운 문화예술 종사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이들은 지휘종속성이 상대적으로 약하거나, 사용자를 특정하기가 어렵거나, 소득활동의 상태가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점 등의 특징을 가진다. 하지만 방송미디어 산업의 대다수의 종사자는 방송사 또는 제작사에게 고용되어서 일하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기존의 고용보험으로 온전히 포괄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예술인 고용보험 가입 대상 문화예술 용역 계약자이거나 예술활동증명이 가능한 경우에 예술인 고용보험 가입 대상이 된다.
예술인 고용보험 가입 대상문화예술 용역 계약자이거나 예술활동증명이 가능한 경우에 예술인 고용보험 가입 대상이 된다.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그럼에도 대체로 방송사와 제작사들은 정규직으로 고용하지 않은 대다수의 종사자를 기존의 사회보험이 아니라 예술인 고용보험에 가입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회보험 가입에서 회사가 부담하게 되는 사회보험 사용자 부담 분을 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노동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보다 쉽게 주장한다. 게다가 기존의 고용보험 보험료(노사 각각 0.9%)보다 낮은 예술인 고용보험 보험료(노사 각각 0.8%)를 부담한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여러 조건이 충족되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으므로,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여타 다른 제도로부터의 배제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그대로 둘 수만은 없는 것이다.

현재의 고용보험은 방송 현장의 일하는 방식과 다소 괴리도 있다. 고용보험이 지급하는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가입기간은 약 7개월(가입일수 180일)을 충족해야 하고, 3~9개월 동안 실업급여를 받게 된다.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게 되는 방송 종사자들이 실업급여를 끝까지 받으면서 다음 일자리를 준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구인구직이 이뤄지고, 대체로 너무 오래 쉬면 일하는 감각을 잃어버릴 수 있는 직군들이 많다보니, 일감이 들어오면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이 개인에게는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경우를 위해서 있는 조기재취업수당은 1년 이상의 고용유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언감생심이다. 실업기간을 불규칙하게 자주 겪게 되는 현실에는 안 맞는 상태인 것이다.

방송 종사자들이 말하는 고용안전망의 필요성

부족한 고용안전망에 대한 공감대는 방송 종사자들에게도 이미 있었다. 실태조사 참여자들은 방송 분야가 다른 업종에 비해서 "다른 어느 산업군보다도 기형적으로 비정규직이 많다"고 느끼고 있고, "단발성 프로젝트 건으로 고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정부나 지자체에서 주는 정책은 대부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방송 계통 외에서는 실업급여를 받은 적 있었는데, 방송 계통에서는 활성화가 많이 되어있지 않아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도 한다.

사회보험 및 고용안전망에 대한 강화 필요성에 대해서도 높은 공감대가 나타난다. 사회보험 가입률과 구직 정보, 직업훈련, 실업급여 모두 높은 공감대를 보였다. 특히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완화되어야 한다는 문항에 92.1%가 필요하다고 답하였다. 또한 실업급여 수급 기간이 길어져야 한다는 문항에도 88.3%에 달했다. 실업은 일상적이지만 실업급여가 안전망으로 잘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공감대가 높았던 문항은 취업 알선, 구직 정보 등을 제공하는 고용서비스 강화가 필요하다는 응답이 89.9%였다.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폐쇄적인 방식으로 주로 구직 정보 공유가 이루어지는 점과 최근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진 방송 업계의 상황 때문일 것이다.

이런 논의에서 항상 나오는 부분은 방송은 특수하다는 이야기이다. 방송 업계의 특수한 것은 있다. 그러나 방송에서 일하는 사람이 특수한 것은 아니다. 방송 콘텐츠 제작에 대한 열정이 있을 뿐, 모두가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는 것이 좋아서도, 불규칙한 수입에도 생계에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회보험과 고용안전망은 보편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를 휩쓰는 K-콘텐츠를 말하고, 이를 만드는 사람들이 새로운 수출 역군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사회안전망에 포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바뀌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방송노동환경 개선을 위해서 활동하는 공익법인입니다. 최근 기자회견과 토론회를 통해서 발표한 내용을 토대로 K-콘텐츠 전성시대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노동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방송#드라마#K콘텐츠#사회보험#실업급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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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한 줄기의 빛,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故 이한빛 PD의 유지를 이어 만들어진 공익법인입니다. 카메라 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바꾸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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