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자, 순자, 연자 영애, 명희, 수지, 허니, 릴리, 로즈...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들이 있다. 김소월 시인의 절창 '초혼'에서도 대답 없는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 허공 속에 헤어진 이름을, 사랑하던 그 사람의 혼을 절규하듯 부른다.
성이 무언지 알 수 없는 춘자는 고향이 어디였을까. 순자가 사랑하다 죽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연자는 어찌 하여 기지촌으로 흘러왔을까. 영애는 왜 독한 여자가 되었고 매일 술에 취해 멍해졌을까. 거리를 떠돌며 몸을 팔던 어린 명희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클럽에서 일하는 수지와 허니는 얼마만큼 돈을 모았을까. 릴리는 미군과 결혼해서 꿈에도 원하던 아메리카로 갔을까. 소식도 없이 버림받은 로즈가 떠난 곳은 상패동 공동묘지일까. 그곳이 그녀의 집이었을까.
햇볕 없는 삶을 살다 짓밟힌 청춘, 꿈, 희망, 사랑, 가족... 그 모든 것을 짐승 같은 놈들에게 빼앗겨버리고 영영 안식할 수 없는 묘지에서, 수풀 우거진 산비탈에서, 그 어둡고 깜깜한 땅 속에서, 로즈가 울고 있다.
로즈를 찾아야 한다. 로즈의 이름을 찾고 고향을 찾고 얼굴을 찾아야 한다. 나의 누이여! 누나여, 언니여, 동생이여, 형제여! 어머니와 아버지의 딸이여! 누가 로즈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는가?
로즈는 죽지 않았다. 살고 싶어 부른 그녀의 노래는 꽃이 아니다. 시도 아니다. 꽃과 시는 똥이다. 세상의 모든 꽃은 세상의 꽃밭을 향해 던져야 하는데, 세상을 독차지한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세상에 꽃을 가둔다. 그것은 돈이라는 꽃이다. 로즈에게 향기를 다오. 사람이라는 꽃을 피워다오.
아름다운 시를 쓰는 자여. 시를 쓸 때마다 당신의 똥냄새가 나지 않은가? 더러운 것, 숨기고 싶은 것, 부끄러운 것, 온갖 치욕과 거짓과 역겨움을 토해내는 것, 그렇게 말끔히 게워낸 구토와 오물이 시가 되지 않으면 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쓴단 말인가? 당신 아닌 천사들의 삶을 시로 생각하라.
포주와 업소와 한편이 된 경찰
로즈는 기지촌 골목에서 미군에게 장미꽃을 팔았다. 몸도 팔았다. 아, 미군에게 살해당한 윤금이도 부족한 방세를 메우려고 꽃도 팔고 몸도 팔았다지. 로즈는 시를 좋아했다. 일기를 쓰듯 시를 썼다. 그러나 시인이 되지 못하고 '깔보'가 된 로즈가 불쌍하다. 일찍 죽어 더욱 더 불쌍하다. 차마 로즈가 말 하지 못한 로즈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가시덩굴에 찔린 수많은 로즈들이 있지만 내가 아는 로즈는 열다섯 살이었어. 앞서 얘기했다시피 고향도 성도 이름도 몰라. 어느 먼 남도의 시골에서 돈을 벌러 서울로 올라왔다고 해. 로즈는 직업소개소에서 알선해 준 다방으로 갔대. 동두천에서 가까운 연천이었다는데, 다방이 뭔지도 모를 나이에 취직을 한 셈이었지.
그러나 군부대가 밀집한 그곳 다방은 커피나 따라주는 곳이 아니었어. 만으로 열넷 먹은 로즈가 오빠뻘, 삼촌뻘, 아버지뻘 남자들에게 시달린 일이야 말해 뭐하겠어. 로즈는 못 견디고 다방을 나가려고 했다는데 다방 주인이 로즈를 좋은 일자리 알려준다고 데려간 곳이 동두천 기지촌이었대. 그래, 로즈는 다방 주인에게 기지촌으로 팔려 갔던 거야. 미군 클럽에서 로즈는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이 되고 말았어.
도망치려고 했다지. 그러나 업주에게 이미 빚을 씌워 묶인 몸이라 쉽지 않은 일이었대. 그러다 클럽에서 어찌 도망쳐서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대. 경찰이 당연히 도와줄지 알았는데, 경찰은 로즈를 다시 포주에게 넘겨버렸대. 그게 당시에 포주와 업소와 한편이 된 경찰이었대.
또 다른 로즈는 어린 로즈보다 나이가 많은 스물셋 언니 로즈도 있어. 그녀는 이름도 사연도 좀 알려졌어.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로 불린 '김연자'야. 왕언니는 자전 에세이를 쓴 책을 펴냈거든. 그녀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볼까?
그녀 말에 따르면 동두천 기지촌에는 거의 사천 명이 넘는 여자들이 있었대. 클럽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이천 명, 거리에서 미군을 불러 몸을 파는 윤금이와 같은 '히빠리'들이 이천 명이었대. 한 기지촌에 사천 명의 여자들이 있었다니! 동두천 경제가 이 여성들로 인해 성장했다는 것은 과장된 게 아니었지. 그때 성매매 업소를 운영했던 포주들은 모두 큰돈을 벌었다지. 딸 같은, 자식 같은 애들과 처녀들을 데리고 매춘을 시켜서 땅 사고 건물 사고 부자가 되었다지. 그 포주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지금 동두천시는 성병에 걸린 기지촌 여성들을 잡아다가 강제수용한 '성병관리소'를 하루 빨리 없애려 하고 있어. 1996년 폐쇄된 성병관리소가 소요산에 아직도 남아 있는데, 30년이 다 되도록 방치된 그 건물이 흉물이라고 철거하려는 거야. 자국의 여성들을 매춘으로 내몬 정부가 성병관리소까지 만들고 운영했으니, 한마디로 대한민국 정부가 포주 노릇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잖아.
그래서 성병관리소를 역사 유산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철거 반대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나섰어. 동두천 시청과 시의회에 성병관리소에 대한 역사적 상징성과 역사 문화에 대한 활용 방안을 전했지만, 기어코 철거를 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있어.
왜냐면 성병관리소가 있는 곳이 '소요산관광지 확대개발사업'(소요산 일대 60만㎥를 앞으로 10년간 개발할 예정이고 대략 3700억 이상의 천문학적 예산이 필요한 사업)의 핵심 부지라는 거야. 여기엔 '동두천 지역발전 대책위원회'라는 단체가 철거를 주동하고 있어. 이들은 상인연합회, 자유총연맹 등 동두천 지역 내 수백 개의 단체들이 모여 있어서 그 힘이 막강하다고 해. 성병관리소 철거에 대다수 시민들이 찬성한다는 동두천 시청의 말은 정확한 여론이라고 볼 수 없어. 그들이 말한 '시민'이란 곧 지역발전대책위와 같은 사람들의 집단이야.
그들은 성병관리소 보존 운동을 하고, 일인 시위를 하고, 천막 농성을 하는 똑같은 시민인 우리들에게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 무조건 동두천 출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외지인들이 와서 보존하자는 것이라고 악선전을 하고 있어. 그들은 당사자인가?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는 전국적 연대체이며,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은 동두천 사람은 물론이고 의정부, 연천, 양주, 포천 등 인근 지역 사람들이야.
천막농성장 앞 도로 청소를 하던 청소 노동자도 이런 말을 하더라고. "나도 철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바로 시민들의 여론인 거야. 장삿속과 개발 이득에 눈이 먼 사람들과 정치적 결속으로 엮인 집단의 철거 주장은 무언가 악행을 저지른 악인들이 그 행위를 숨기고 지우려는 수작일 뿐이야.
아, 이야기가 잠깐 벗어났네.
"기, 브, 미, 씨, 가, 레, 또, 플, 리, 즈"
왕언니 로즈는 처음에 미군을 상대하는 일은 말이 통하지 않아 너무 답답했다고 해. 세상에 실뿌리라도 내려보려고 했지만, 욕만 늘고 싸움만 늘고...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게 짙은 분칠을 하고 두껍고 긴 마스카라에 빨간 루즈를 칠하고 가발을 쓰고, 그렇게 애쓰던 미자, 금순이 같은 로즈들이 동두천에서 양공주가 되어 만났다지.
기지촌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모두 정부에서 발행하는 '검진증'이 있어야 영업할 수 있었는데 그때야 알았대. '대한민국은 윤락 행위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나라'라는 것을! 그럼에도 정부가 금지해놓 고 여자들에게 성병 검진을 받게 하고 걸핏하면 검사를 하고 성병관리소에 가두고, 정부의 공식 문서에도 미군 상대 기지촌을 '적선기지'라고 하다니! '적선'이란 말은 미군의 성적 요구에 도움을 주라는 행위잖아. "재수 더럽게 없다. 내 **인줄 알았는데 나라 **였네."
왕언니 로즈는 '몽키 하우스' 수용소에 보내진 적이 있었어. 여자들은 하나같이 몽키 하우스 생활을 끔찍이 여겼대. 모든 것이 온통 미제인 미제 수용소에서 미군들은 자기 나라 군인들을 보호한다고 자기들이 직접 검사를 하고 아주 독한 주사를 놓았대. 그 주사를 맞으면 근육이 뭉치고 어지럽고, 약물 과다로 죽건 말건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날마다 날마다 미군들에게 가랑이를 벌리고 깨끗한 여자인지 아니지를 검사받는 일은 정말로 수치스러웠대.
더 많은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우리들의 로즈가 무연고자로 묻힌 공동 묘지에 가 보면, 땅이 꺼지듯 가슴이 무너질 거야. 그 무덤도 머잖아 공원 사업으로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아무도 로즈를 꺼내줄 수 없어. 로즈의 이름을 불러줄 수 없어. 묘비 없는 무덤에 로즈가 죽은 뒤로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고 무덤 앞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까.
철거 뜻 바꿀 생각 없다는 시의회 의장
로즈를 생각하면 정말 화가 나는 일이 있다. 바로 어제였다. 어제(27일) KBS에서 동두천 시청 앞에 설치된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 천막농성장 취재를 나왔다. 방송팀은 오전에 성병관리소가 있는 소요산 촬영을 마치고 점심 시간 이후에 추경예산 회기 중인 동두천 시의회 취재를 하고자 했다. 성병관리소 철거 예산을 추경안에 포함한 시의회와 철회를 요구한 공대위의 간담회가 열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사 기자와 카메라가 오자 의회에선 간담회를 열지 않았다. 의회 의장은 끝내 간담회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시민과 소통하고 시를 견제하는 역할이 시의회인데도 대한민국에 이런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지자체 의회가 있나?
공대위는 동두천 시의회에서 벌어진 상황과 과정을 이렇게 알렸다.
1시 30분 동두천시의회 간담회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어 KBS기자와 함께 시의회로 들어가자 시의회는 비공개 간담회라고 하면서 취재와 촬영을 거부하고 간담회를 비공개로 하자 재차 제안해 왔습니다.
이에 송성영 대표님과 안김정애 대표님, 저는 긴급히 논의해 비공개 간담회는 있을 수 없다는 뜻을 전달하고 대신 시의장과 면담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시의장은 철거를 정당화한 자신의 논리를 예전과 똑같이 피력했고, 우리 대표단은 현재의 상황이 비민주적이며, 역사를 외면한 것이며, 동두천 경제활성화와 역사적 가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 강조했습니다. 추경 철거 예산안을 부결해 많은 시민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갖자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의회에선 마치 공대위가 기자를 대동하고 나타난 것으로 이야기를 몰아가며, 간담회 파행의 원인이 공대위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동두천 시의회 의장과 공대위 대표단 3분이 만나 이 상황을 조율하려고 만났습니다. 만남의 자리에서 김승호 의장(국민의힘)과 이란 말이 오갔다고 합니다.
회의 비공개는 공문에도 없었고 비민주적인 운영이라는 대표단의 항의로 시작.
김승호 의장의 답변은 이랬다.
1) 왜 KBS를 끌고 들어 왔느냐?(공대위가 기자를 끌고 온 게 전혀 아님)
2) 위안부라는 단어 사용에 동의 못 한다.
3) 유네스코 등재 추진에 대해서는 성병관리소는 집창촌 그 건물 안에 가치 있게 보존할 거 하나도 없다. 지정돼 봤자 지자체에 도움될 거 없다.
4) 미국·미군이 도와줘서 한국이 10대 경제국이 된 것이다.
5) 현재 미국이 반환하지 않는 동두천시 기지 문제에 대해 왜 시민사회단체들은 가만있는가?(경기북부평회시민행동에선 매월 2회 미 반환 미군캠프 둘레길 걷기 등 반환 운동을 하고 있음)
6) 동두천시 재정자립도는 11%에 불과. 우리 의회는 시에서 추진하는 소요산 개발계획 찬성이다.
이에 공대위는 김승호 의장 발언에 대해 보도 자료를 내고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한편 김승호 의장은 기자에겐 공대위와 면담 여부와 상관 없이 철거 의지를 바꿀 생각은 없다고 말했고 재차 물었지만 맞다고 했다는 전언입니다.)
동두천 시의회 의원들과 의장에게 로즈가 묻는다.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내 삶을 돌아보고 반성해도 모자랄 판에 나를 두 번 죽이려 하는가? 내 피눈물을 그만큼 빨아먹었으면 됐지, 내 뼈를 갈고 영혼까지 태워 하나의 인간이 살다 간 흔적마저 지워버린 채, 또다시 배를 채울 무슨 욕심이 그리도 많이 남아있단 말이더냐?
저기, 로즈가 온다.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과 물욕으로 가득 찬 당신들의 세상을 꾸짖으러 온다. 가난하고 서러운 로즈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로즈가 가만히 어두운 눈을 뜨고 바라본다. 단지 행정 권한을 위임 받은 지위를 이용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다면 평생 아늑한 당신의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겠는가?
* 이 글에 나온 기지촌 여성의 사연은 기지촌 여성들의 수기 <두레방 이야기>와 김연자 저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삼인, 2005)를 참고해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