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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도 젊어서 하는 거지 나이가 드니까 여행도 힘에 부친다."

예순을 훌쩍 넘긴 어머니 말씀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이가 있으니 하루 1만 5000보 정도 걸으며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나, 힘에 부치는 일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여행은 젊어서 하는 거라는 말씀은 유럽 여행을 하면서 점차 줄었고, 오히려 다음 여행을 위해 체력을 키워야 한다는 다짐으로 바뀌어 갔다.

캠핑장에 모여든 프랑스 노인들

 하루 평균 15,000 이상 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 평균 15,000 이상 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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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의식의 대전환은 캠핑장에서 시작됐다. 조용하던 캠핑장에 거대한 캠핑카 행렬이 이어졌다. 얼핏 십수 대의 캠핑카가 마치 시간을 맞춘 듯이 차례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차 번호판에는 'F'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프랑스에서 온 차들이었다. 독일에서 빌린 우리 캠핑카에는 'D'가 찍혀 있다. 참고로 국가명의 첫 알파벳이 겹치는 경우에는 두 글자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핀란드는 'FI' 덴마크는 'DE'를 사용한다.

처음에는 그저 '프랑스 사람들이 참 많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캠핑장에 빈자리 하나 없이 빼곡하게 캠핑카들이 자리를 잡은 후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두 명씩 내리기 시작하더니 옹기종기 모여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수십 명의 인파가 되어 캠핑장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모여들었다.

 캠핑장을 가득 채운 프랑스 은퇴자 모임
 캠핑장을 가득 채운 프랑스 은퇴자 모임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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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간은 호젓했던 호숫가 옆 캠핑장을 호방하게 바꿔놓은 사람들
 약간은 호젓했던 호숫가 옆 캠핑장을 호방하게 바꿔놓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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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 성성한 노인들의 외모와는 반대로 맥주와 와인을 마시며 한낮의 축제를 벌이는 이들이 누구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약간은 호젓했던 호숫가 옆 캠핑장을 호방하게 바꿔놓은 이들은 프랑스에서 은퇴한 부부들이 만든 캠핑카 모임이었다.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젊고 외국어에 능숙한 고래 양의 엄마가 할머니 한 분을 인터뷰한 내용이었다.

프랑스에서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했던 노부부 몇몇은 은퇴 후 캠핑카 여행을 위해 일찍부터 준비를 했단다. 다들 자기 소유의 캠핑카를 마련했고, 하나둘씩 은퇴를 시작하자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모임을 결성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모임 인원이 점차 늘어나 지금처럼 많아졌단다. 프랑스에서 시작한 이들의 대장정은 스칸디나비아반도를 한 바퀴 돈 후 이곳 베르겐에서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유럽의 어느 곳을 가든 여행자들은 대부분 노인이었다. 카페 테라스에서 햇살을 즐기며 차가운 샴페인을 마시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편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청년이었다. 여행은 늙어서 하는 것이고, 젊을 때는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다.

젊을 때는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 그래서 일상도 바쁘고, 여행도 바쁘다. 젊은이가 이 글을 읽는다면 속상할 것 같다. 내가 젊었을 때 이 글을 읽었다면 화가 났을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의견이 아니라 여행을 마칠 때쯤 꺼냈던 우리 엄마의 생각이다.

자전거를 타는 노인들

베르겐의 브뤼겐 지역 카페 테라스에서 햇살을 즐기며 차가운 샴페인을 마시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노인이었다.
▲ 베르겐의 브뤼겐 지역 카페 테라스에서 햇살을 즐기며 차가운 샴페인을 마시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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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의식의 대전환은 길 위에서 일어났다. 노르웨이는 오슬로-베르겐을 이동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고속도로'라고 할 만한 곳이 없다. 지형 탓이기도 하지만 국토 면적이 남한의 3.8배인 노르웨이의 전체 인구는 55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주요 도로는 우리나라의 왕복 2차선 지방도와 같고, 그나마 중앙선이 없는 좁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고속'이란 노르웨이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고속'과 가장 거리가 먼 이동 수단이 바로 자전거다.

나는 유럽 사람들이 아니라서 그들에게 자전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다만, 유럽 사람들은 아마 모든 인구가 1인 1자전거를 갖고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탄다. 베트남이 오토바이의 나라라면, 유럽은 자전거의 나라다.

평지가 많아서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할머니가 가파른 언덕을 눈 하나 깜짝 않고 올라가고, 젊은 엄마가 앞에는 유모차를 붙이고 뒤에는 큰 아이를 태우고 가뿐하게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존경과 박수가 나왔다.

 ‘내 나이가 몇인데, 다 늙어서 무슨....’으로 시작하는 포기가 그들에게는 없어 보였다.
 ‘내 나이가 몇인데, 다 늙어서 무슨....’으로 시작하는 포기가 그들에게는 없어 보였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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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북유럽 1만km를 운전하며 직접 본 것이 바로 자전거 타는 노인들이었다. 도심에서도, 국도변에서도, 끊어진 길을 연결하는 작은 페리에서도, 더운 날에도, 추운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자전거를 타는 노인'들이 있었다.

물론 젊어서부터 단련이 되어서 그렇겠지만 적어도 '내 나이가 몇인데, 다 늙어서 무슨....'으로 시작하는 포기가 그들에게는 없어 보였다. 엄마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엄마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엄마가 달라졌다. 원래도 의욕이 넘치는 분이었지만, 환갑을 넘기고 은퇴를 하면서 세월은 못 이긴다는 노인들 특유의 푸념도 자주 입에 올리기 시작하는 엄마였다. 근육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가 반평생을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하고, 그 뒷바라지를 혼자 감당하셨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랬던 엄마가 달라졌다. '내 나이가 몇인데, 여행하기 딱 좋은 나인데....'로 바뀌었다.

요즘은 백세시대라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쓴다. 그게 사실이다. 엄마는 살아온 만큼이나 긴 여생이 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담당 의사 선생님이 약봉지만 들고 있으면 오래 산다고 했으니, 노년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마음 단단히 잡수셔야 한다. 이 글을 쓰는 중에 가족 단톡방에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다음 여행까지 뱃살을 빼겠노라 선포한 엄마가 구포 둑을 달리며 젊은이처럼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백세시대를 준비하는 엄마의 바람직한 모습
 백세시대를 준비하는 엄마의 바람직한 모습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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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에서 첫 외식

우리의 첫 번째 도심 관광이었던 베르겐에서도 엄마는 잘 걸었다. 휠체어와 유모차가 있으니 노약자와 어린이는 걱정이 없었고, 동생 내외는 젊으니까 문제가 없었다. 걱정과 문제는 없었지만 경비가 넘치도록 여유롭지는 않아서 물론 베르겐 어시장에서 여유로운 점심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범선이 옛 모습 그대로 떠다니고 있었고, 브뤼겐(Bryggen)의 알록달록한 목조건물들은 내가 처음 왔었던 10년 전의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고 서 있었다. 없는 건 놓아주고, 있는 것만 즐기면 된다.

 눈앞에 범선이 옛모습 그대로 떠다니고 있었다
 눈앞에 범선이 옛모습 그대로 떠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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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겐의 브뤼겐 지역 한자동맹 시절 창고였던 건물들이 지금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 베르겐의 브뤼겐 지역 한자동맹 시절 창고였던 건물들이 지금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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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무역을 위한 한자동맹의 창고였던 건물들이 지금은 관광객을 맞이하는 카페와 식당 그리고 기념품 점으로 바뀌었다. 과거에는 상인들이 역동적으로 상하역을 했던 자리가 지금은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갈매기 떼와 인증샷을 찍는 곳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유럽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정경을 즐기며 타박타박 걸었다. 그리고 5세 고래 양의 관심이 겨울왕국에서 기념품점으로 옮겨가자 얼른 반짝이는 노르웨이 열쇠고리를 사서 그녀의 품에 안겨 주었다. 고래 양은 이 반짝이는 풍경을 더 오래 기억할까, 이 반짝이는 열쇠고리를 더 오래 기억할까. 여행은 늙어서 하는 것이 맞다.

베르겐의 브뤼겐 지역 5세 고래 양의 관심이 겨울왕국에서 기념품점으로 옮겨갔다.
▲ 베르겐의 브뤼겐 지역 5세 고래 양의 관심이 겨울왕국에서 기념품점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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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상징 '트롤' 고래 양이 트롤을 사달라고 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다.
▲ 노르웨이의 상징 "트롤" 고래 양이 트롤을 사달라고 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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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으로 번잡한 브뤼겐 거리에서 한 골목만 벗어나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골목마다 늘어선 아기자기한 목조주택은 내가 어릴 때 크레파스로 그렸던 딱 그 모습이었다. 삼각형 지붕에 네모난 나무 창들이 낯설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집이란 이렇게 생겨야 해'라고 생각하며 그렸던 바로 그 집들이었다. 목조주택 특유의 포근함이 참 좋았다. 골목을 걷는 그 자체가 즐거운 여행이었다. 하지만 너무 포근했기 때문일까? 고래 양은 유모차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베르겐의 주택가 관광객으로 번잡한 브뤼겐 거리에서 한 골목만 벗어나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 베르겐의 주택가 관광객으로 번잡한 브뤼겐 거리에서 한 골목만 벗어나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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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겐의 주택가 목조주택 특유의 포근함이 참 좋았다.
▲ 베르겐의 주택가 목조주택 특유의 포근함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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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다!"

대학생 때 동생과 함께 온라인 게임에 푹 빠져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 우리가 자주 했던 말이자, 전투의 승패를 좌우했던 말이 동생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바로 지금이 우리가 외식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순간이라는 뜻이다.

공격대장의 신호가 떨어지자 재빨리 근처 식당을 찾았다. 유럽에서 즐길 수 있는 적당한 가격의 적당한 메뉴는 오직 이탈리아 음식이다. 유럽 사람들은 이탈리아 음식이 전파되지 않았다면 대체 뭘 먹고 살았을까 싶을 만큼 피자는 유럽 전역에서 가장 보편적인 외식 메뉴다.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각자 1인 1판을 주문해서 칼로 썰어 먹는 정도이다.

성인 5명이 적당한 식당을 찾아 적당한 가격의 메인 메뉴를 세 가지와 음료 두 잔을 주문했다. 놀랍겠지만 우리는 사실 수돗물 마니아라며 나머지는 Tap Water(수돗물)를 마셨다. 그리고 1750Nok(약 230,000원)의 계산서를 받아 들었다.

음... 베르겐 어시장에서 킹크랩 1kg의 가격이 2199Nok였으니, 우리는 정말 저렴한 점심을 먹었다. 킹크랩은 각자의 나라에 돌아가서 먹기로 약속하고 일어서면서 참 싸고 맛있는 식당이었다고 서로 식사 후기를 남겼다. 노르웨이에서 우리의 첫 외식이었고, 동시에 마지막 외식이었다.

휠체어나 유모차가 불편하지 않은 관광지

 우리는 베르겐에서 정말 저렴한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베르겐에서 정말 저렴한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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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목적지는 베르겐 플뢰옌산(Fløyfjellet)에 있는 전망대였다. 동네 뒷산 정도의 높이라서 나 혼자라면 타박타박 걸어갔겠지만, 우리는 점심으로 엄청난 예산 절감을 이루었기 때문에 푸니쿨라(Funicula)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가기로 했다. 5분 정도 타고 올라가는데(체감으로는 2분이다) 한 사람당 180Nok(약 23,000원)였다.

다행히 고래 양은 무료였지만, 이쯤 되니까 돈이 아니라 종이 조각이라는 생각이 약간 들었다. 다행인 건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기 때문에 돈도 종이도 눈에 보이지 않아서 속쓰림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베르겐 플뢰옌산 전망대 베르겐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전망대
▲ 베르겐 플뢰옌산 전망대 베르겐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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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뢰옌산 푸니쿨라 2분 같은 5분 동안 타고 올라가는데 왕복 23,000원이었다.
▲ 플뢰옌산 푸니쿨라 2분 같은 5분 동안 타고 올라가는데 왕복 23,000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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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니쿨라를 타고 내리는 데에 휠체어나 유모차가 불편한 점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배려를 받을 수 있어서 더 편했다. 아버지와 고래 양 덕분에 여행 내내 각 나라의 장애인과 유모차 시설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가 많았고, 느낀 점도 참 많았다. 선진국, 복지국가라는 말은 단지 GDP 규모로만 결정되는 것이 분명히 아니었다.

2분 같은 5분 동안 푸니쿨라를 타고 전망대에 도착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마주하자마자 돈이고 뭐고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동생 내외도, 부모님도, 심지어 5세 고래 양도 감탄사를 터뜨리며 달려 나갔다. 눈 앞에 탁 트인 풍경에 넋이 나가서 플뢰옌산 전망대에서 우리는 가족사진 하나 남기지도 못 했다.

플뢰옌산 전망대 가족사진 찍는 것도 잊게 만든 전망
▲ 플뢰옌산 전망대 가족사진 찍는 것도 잊게 만든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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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릉부릉#캠핑카#북유럽#가족여행#베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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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호치민에서 아이들과 책을 읽고 어른들과 그림을 읽으며 일상을 여행처럼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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