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식 재판은 얼핏 공정하고 정의로워 보이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재판관은 절대 양심의 가책이나 휴머니즘으로 판결하지 않는다. 국가가 강제하는 가장 값싼 권력 행사 양태에 경도되어 판결한다는 게 적확한 표현이다. 작금 우리 사법부가 그 표본이다. 그나마 봉건적 재판엔 인정이 깃들 여지라도 있었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이란 책에서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감시하고 처벌해 왔는지, 그 과정에서 근대적 인간형이 어떻게 창출되었는지'를 간파해 냈다. 국가는 권력을 유지할 가장 경제적인 도구로, 인간을 구속하고 수월하게 처벌할 수 있는 감옥과 재판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를 끊임없이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처벌받는 개개인의 구속과 재판이 낱낱이 기록 되어진다. 하나의 규범이나 전형을 세우려는 권력의 의도에 따라서다. 일종의 '판옵티콘(panopticon)'이다. 그가 재판에 얼마나 진실로 임했는지와는 별개 문제다. 처벌이 두려웠다면 최선을 다할 것이고, 반대라면 숨길 건 끝까지 숨길 것이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후자였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자들이, 갑오개혁이 만들어낸 얼치기 근대식 재판으로 선고받은 최초의 인물들이다. 전주성이 함락되자, 어리석은 권력이 외국군대를 끌어들임으로써 생겨난 억지 제도다. 그 얼치기 제도의 첫 희생자가 그들이라니, 역설도 지독한 역설이다.
전옥서(典獄署) 좌 감옥
한양에서 전봉준이 재판받은 곳은 의금사(義禁司=의금부를 1894.07 개칭)에 설치된 법무아문권설재판소(후에 평리원(1899.05))다. 지금의 종각역 사거리 SC제일은행 자리다. 이곳이 그땐 신식 법원이었다. 강제 병합 전까지 평리원으로, 그 후엔 각종 관청으로 사용되다 나중(1929)엔 종로경찰서로 변해 악명을 떨친 곳이기도 하다.
일제의 간섭과 압박으로 조선은 '재판소구성법(1895.03.25)'을 제정한다. 전봉준에게 사형이 선고(03.29)되어 집행되기 불과 며칠 전이다. 뭐가 그리 다급했을까? 선고 다음 날 교형(絞刑=목을 옭아매어 죽이는 형벌)에 처했으니 말이다. 선고내용이 알려지면, 민중이 봉기할까 두려워서였을까?
전봉준이 사형당한 곳은 현재 종각역 5번과 6번 출구에 있던 전옥서 좌 감옥이다. 의금사에서 운종가 남쪽 건너편, 지금의 영풍빌딩 앞이다. 그가 처형당한 자리엔,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앉은 모습의 그가, 형형한 눈빛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각종 기록으로 미루어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도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서 처형당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전봉준과 손화중의 시신은 여태껏 찾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노고에도, 모두 수포로 되었다.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김덕명과 최경선의 시신은 온전히 수습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을미(乙未=1895) 삼월 삼십일에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이 한양 감옥에서 교형을 받았다. 김방서 혼자서만 특사가 되어 돌아오자, 전라감사 이도재에게 잡힌 바 되어 전주 큰길에서 원사(寃死=원통하게 죽음) 당하였다.
이때 일본 신문에 「조선의 대의옥(大疑獄)」이라는 제목으로 비평이 실렸다 …(중략)… 전봉준 교형 당시 집행 총순(總巡=경무청 판임관) 직이던 강(姜) 모가 말하되 "나는 전봉준이 처음 잡혀 오던 날부터 마침내 형을 받던 날까지 그의 전후 행동을 잘 살펴보았다. 그는 과연 보기 전 풍문으로 듣던 말보다 훨씬 솟아 보이는 면이 있었다. 그는 외모부터 천인 만인보다 특별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깨끗하고 준수한 얼굴과 광채가 나는 안목으로 엄정한 기상이 강하고 장했으며, 품은 뜻은 세상을 한번 놀랠만한 대위인, 대영걸이 분명했다. 과연 그는 평지돌출로 일어서서 조선의 민중운동을 대규모로 일으켜 새 세상을 펼쳐 보인 자이니, 그는 죽을 때까지라도 그의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본심 그대로 태연히 간 자다."라 하였다.
그가 형을 받을 때 교수대 앞에서 법관이 "가족에게 남길 말이 있거든 하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답하였다 한다. "나는 다른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 주는 것이 어떤가? 어찌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黯然=침울하게)히 죽이려 하느냐"며 준절히 꾸짖었다 한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69~271)
조선이라는 나라는 반외세·반봉건, 자주 국가를 외친 이들을 역적 취급했다. 죽임 후에도 이리저리 조리돌려 모욕했다. 그 가족과 후손은 고향과 재산, 이름을 버려야 했고 성씨마저 바꿔 숨어 살아야 했다.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이 일제에 이용당하기도 했다. 이 탄압에 일제는 절대 나서지 않고, 철저히 배후 조종만 했다.
양반과 부호, 고관들이 극악하게 동학군을 탄압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이해관계였고 권력 유지의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부수적으로 친일은 안위를 보장받는 확고한 길이기도 했다. 동학도에 대한 처결과 계급적 이해에서 친일이 싹텄다고 생각한다. 처형당한 동학 지도자들을 목격한 벽안(碧眼)의 영국 여성 시선에서 훨씬 더 큰 위안과 연민이 느껴진다.
동학혁명은, 외세를 조선에 끌어들였다는 이유로 국왕에 대한 사군이충(事君以忠)의 틀을 조심스레 벗어나, 반봉건·반외세라는 별도의 주체적인 독립자주국을 강하게 표방하며 일어났으나, 1895년 1월 초에 진압되었다.
그리고 한 충직한 장수는 동학군 대장인 전봉준의 머리를 베어 서울로 압송했다. 나는 서울 서소문 밖 가장 사람의 왕래가 잦은 북경로(北京路)에 전봉준의 목 잘린 머리가 걸려있고, 그 아래에 다른 사람의 목 잘린 머리가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머리는 마치 야영 솥 걸이처럼 세 발 장대에 조잡한 장치로 허공에 높이 매달려 있었고, 두 사람의 얼굴은 조금도 비굴함이 없이 당당하고도 평온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2구 이상의 또 다른 목 잘린 머리는 세 발 장대에 걸려있을 뿐만 아니라 노상에 방치되어 있었고, 개들이 몰래 숨어서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먼지투성이의 길 위에 버려진 목 잘린 머리들을 뜯어 먹고 있었다.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I.B 비숍. 신복룡 역주. 집문당. 2006. p260~261)
1895년의 스산한 봄기운은 한양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엔 이제 일제에 저항할 세력이 모두 일소되었다. 그들 앞에 모든 걸림돌이 사라졌다. 일제의 시선이 향한 곳은 따라서 당연하게 대궐이다. 그중에서도 표독스러운 왕비다. 방만하기 그지없는 국정으로 스스로 불러들인 화다. 동학 지도자들이 효수당하자, 굴욕과 식민을 예비하는 스멀거리는 기운이 도성 하늘을 시꺼멓게 뒤덮고 있었다.
전주 숲정이
친구에게 배신당한 김개남이 전주로 압송된다. 위정척사파로 오직 왕권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전라감사 이도재의 즉결처분으로 참수(12.03(음)) 당하고 만다. 그를 구출하려고 농민군이 몰려들까, 혹은 동학과 흥선대원군의 관계를 폭로해버릴까 염려 되어서다.
김개남이 참수당한 곳은 전주천 옆 완산 7봉 끝자락 '초록 바위'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에 진북동 천주교 성지인 '숲정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전주에서 참수당한 김개남의 수급이 한양으로 와, 서소문 밖에서 12월 25일부터 3일간 내걸린다. 이후 남부 각 지방 곳곳으로 보내져 조리돌림 당했다고 한다.
김개남이 처형된 후, 일본 공사와 조선 정부 사이에 한때 파문이 인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는 조선 정부에 서한을 보내 '비도(=동학군) 처형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며 체포된 비도들은 정토대(征討隊=일본군)에 넘겨 처리토록 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전라감사가 김개남을 독단적으로 처형해 버리자 일본 공사는 조선 정부에 '전라감사를 불러들여 그 까닭을 엄중히 조사하여 알려주고 그에 대한 처분 문제는 공동으로 상의하자'고 압박한다.
난처하게 된 조선 정부는 '경위를 해명하고 그에 대해 처분할 것이니 불러들여 조사하는 것만은 재고해 달라'며 간신히 모면하고, 이도재는 감봉 3개월의 징계에 처해 진다.
이게 나라인가? 일개 관리의 안위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나라가, 하물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을사늑약 후의 일진회를 뛰어넘어, 마치 조선총독부를 연상시키는 2024년 대한민국 정부는 과연 어떠한가? 이들이 정녕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낼 의지와 능력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