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였지만, 한동안 글을 쓰지 않다가 최근 소음 얘길 쓰면서 다시 기사를 송고하기 시작했다. 쓰지 않는 것이 쓰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고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마침 활동을 재개한 동료 시민기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최근 내가 쓴
'현관문 열고 사는 옆집... 결국 이렇게 해결했다' 기사에 대한 반응 얘길 나눴다(
https://omn.kr/29x3z )
실시간 랭킹 1위, 댓글 1위 등 뜨거운 반응이었다. 악플도 아니고 거의 선플. 좋은 글엔 사람들이 반응하는구나, 무더위에 독자가 사라진 게 아니구나 하는 말을 농담처럼 주고받는다. '기사 랭킹 1위' 캡처화면을 내게 보내온 지인도 있다.
답 없는 메일, 카톡, 쪽지, 일대일 문의. 어쩌면 반응 없는 모든 것들이 의욕을 상실하게 만드는 주범일지 모른다. 그동안은 내가 쓴 기사들에도 거의 반응이 없었고, 그래서 나도 동력을 잃었었다. '옆집 소음을 해결했다'는 기사의 반응 중에는 글쓴이의 기쁜 감정이 오래가지 않을 수 있으니 잘 기억하라는 식의 조언도 달려 있었다.
자가당착을 늘 조심하지만, 글과 사람이 항상 같은 건 아니니 언제 또 내 감정이 뒤바뀔지 모른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글쓰기를 경계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정직한 감정인 그 순간을 외면한다면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 차라리 다행이라 위로한다.
요즘 집에서 요리를 할 때면, 혼자 있을 옆집 노인이 생각난다. 여기 이사온 지 얼마 안 된 옆집 노인은 소음 분쟁으로 인해 처음 알게 되었다. 분쟁이 있을 때 그가 적반하장이었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을지 모른다. 다행히도 우리는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살가운 이웃이 되었다.
그 분은, 요양보호사가 오는 낮 몆 시간을 제외하면 매일 거의 혼자 계시는 독거 노인이신 듯했다. 우리 집에서 종종 삼겹살을 굽거나 부침개를 굽다가도 솔솔 옆집에 냄새가 들어갔을 생각을 하면 갖다 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생각은 많고 용기는 부족해 망설인다.
이웃과 음식을 주고 받는다는 것
음식은 (상할 수도 있으니) 나누는 게 안 좋다는 사람도 있고, 입맛이 다 다르니 쓰레기통으로 간다는 소리도 들었기에 괜한 오버일 거 같아서 몇 번을 드리려다 관뒀다. 그러던 며칠 전 아침,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샐러드 야채빵을 만들면서 그 분 생각이 나서 몇 개 더 만들었다.
부담스러운 음식도 아니고 맛있다는 얘기도 들었던 터라 가볍게 드시면 좋을 거 같아, 옆집 현관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가 재빨리 건네주었다.
"아... 고마워요."
언제나 그렇듯, 예의 무표정으로 무뚝뚝하게 말하는 어르신을 뒤로 하고 돌아섰다.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것이 시골에선 익숙한 일상인데, 도시에선 낯설고 결심을 해야 되는 것만 같다. 나는 사십 년 동안 시골에서 살다 마흔이 넘어 회사 때문에 버스로 두 시간 거리 쯤 되는 이곳에서 도시 생활을 처음 시작했는데(현재는 시골 가는 버스 노선조차 몇 개 없다), 지금도 가끔 시골에 가면 이웃들이 서로 음식을 하고 나누는 모습을 종종 본다.
우리 시골 앞집 젊은 부부는 자신들이 김밥을 싸거나, 굴전과 잡채 같이 음식을 할 때면 조금이라도 맛보라고 들고 온다. 녹두전, 호박죽, 부침개, 떡 같은 별식을 할 때도 이웃들끼리 나눈다. 들기름을 짤 때는 두말할 것도 없고. 집에 가면 항상 먹거리가 풍부해 미처 먹지 못한 음식은 냉동실에 넣어 두곤 했었다.
여전히 시골 사시는 엄마는, 주변 이웃들이 나눠준 야채를 혼자 해결하지 못하겠다며 며칠 전 택배로 내게도 보내왔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요즘처럼 야채 값 비쌀 땐 이런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이 든 엄마가 요즘 같은 무더위에 엄마 혼자 끼니를 어떻게 챙기나 가끔 여쭈면 동네 이웃들과 모여 콩국수, 냉면을 시켜 먹는다고 하신다. 먹고 싶은 걸 말씀하시라면 동네 이웃이 치킨을 사다 주셔서, 또 누구는 피자를 사 왔다면서 따로 먹고 싶은 게 없다 하신다. 큰 사업을 한다던 중년 여성 이웃, 아마도 그 분이 우리 엄마에게 치킨을 주기적으로 사다 주시는 것 같다. 고마울 따름이다.
마흔 넘어 도시에 처음 왔을 때, 돈을 지불해야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풍경에 난 "엄마 여긴 다 각자 사 먹어야 돼. 이웃끼리 아무것도 없어, 누가 사는지도 몰라"라고 했다. 엄마 왈, "도시라고 크게 다르겠니, 다 사람 사는 곳인데. 네가 아직 왕래를 안 해서 그렇겠지"라고 하셨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게 도시 이웃은 낯선 사람들로 모두 경계 대상이었다. 혼자인 걸 들키지 않으려 현관문은 꼭꼭 닫고 엘리베이터도 같이 타지 않았었다. 어쩌면 내가 뉴스를 너무 많이 본 탓일 수 있다. 그렇게 수 년이 넘어가도록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채 문을 꼭꼭 닫고 살았다. 그게 안전하고 편하다고 생각했다.
소음 분쟁으로 인해 알게 된 것들
그러다 최근 소음으로 이웃들을 차츰 알게 되었는데, 새로운 세계였다. 어찌 됐든 서로 안면을 튼다는 것은 각자 한 발 양보해야 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뭔가를 나눠야 하는 일이었다.
그 전과 달리, 출처와 배경, 이유를 알게 된 소음은 더 이상 전만큼 시끄럽지 않았다. 어쩌면 마법처럼 거슬리지가 않았다. 이전엔 고역이었던 음식 냄새도 감상이 달라졌다. ' 아 저 집 뭐 맛있는 거 해 먹나 보구나, 나도 시골에서 엄마가 해주던 건데... 오늘은 그 음식인가 보네'라며 냄새에서 그리움을 찾곤 한다.
손해 보듯 양보하고 살면 세상이 편하다고 엄마가 늘 말씀하셨는데, 나는 50대가 돼서야 그 말을 이해하고 살아내는 모양이다(가끔 순간순간 차오르는 분노만 다스리면 될 것 같다).
주로 독거노인들이 많은 이곳.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이제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친근한 이웃들이다. 서로 아는 척 인사하고 짧은 안부를 묻고 서로 불편할 것도 없는데 그동안 모른 채 살아왔던 시간이 아쉽다. 사람은 가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외면하는 게 안전하고 편하다고. 사실은 편한 게 아니라 고립이었던 것을.
나를 '애기'라 부르는 3호 노인은 "처음엔 도도해 보여서 좀 그랬는데 "라는 말을 내게 했다. 생각해 보니 노인은 나와 마주칠 때마다 아는 척을 하려 했으나, 무반응으로 일관했던 나였다. 부끄럽다.
그 분은 "나도 조심은 하는데, 그래도 소리가 나는 것 같아"라며 고백을 한다. 지난번 옆집 소음 때문에 환장하겠다며 자기가 고함을 질렀었는데, 문을 열고 생활하니 자신도 밥하고 설거지 할 때 소리가 나는 걸 뒤늦게 알았단다. 자기가 예민해 그런 것 같다고도 했다.
내가 "괜찮아요, 다 사람 사는 소린데요. 이젠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이해해 줘서 고마워"라 답하신다. 이젠 안 보이면 궁금해 할 '이웃'이 되었다.
며칠 전 아침 샐러드 야채빵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린다. 전엔 노크해도 문을 바로 열어준 적은 없었지만, 이웃을 알게 된 뒤부턴 겁먹지 않고 문을 열기 시작했다. 옆집 노인이다. 노인 유모차를 끌고 문 앞에 서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유모차에 과일과 함께 불가리스 8개들이 한 박스를 싣고 와 건넨다. 과한 듯해 처음엔 사양했다. 저는 과일도 별로 안 좋아하고, 안 그래도 괜찮다고 했더니 한참 실랑이가 이어졌다.
어르신 고집을 꺾을 순 없어서 결국 받았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다. 받은 게 미안해서, 또는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를 계속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피식 나왔다.
줄 수 있는 걸 주고, 할 수 있는 걸 하는 마음
한때는 주고받는 게 부담처럼 느껴져 싫었던 적이 있었다. 되로 받고 말로 더 주던 엄마 모습이 싫었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부담이 아니라 서로 줄 수 있는 걸 주고 할 수 있는 걸 하는 마음이란 걸 이제 알 것 같다.
받은 것보다 더 많이 줘야 직성이 풀리는 어른들을 볼 때면 나 역시 더 많이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 걸 보면, 젊었을 때의 짧은 생각이 가치 있는 삶에 반응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같다.
매번 뜨거운 반응을 기대하기엔 낭만이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살며 배우며 이렇게 느끼고 알아가는 것을. 뭐든 노력하고 같이 나눌 수 있는 동료와 이웃이 있고 말이다. 좋은 글 따뜻한 글에 굳이 시간들여 '고맙다'고 남긴 사람들, 그리고 가족과 이웃이 있는 삶이 나를 나아가게 만드는 동력임은 틀림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