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함께 17년 전 자영업, 그러니까 지금 운영 중인 도시락 가게를 시작할 때 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전과는 다른 낯선 조리법, 매달 돌아오는 월세 내는 날, 또 행방불명 될 토요일을 포함한 주말이었다.
하고 싶었던 일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정말로 도시락가게 (음식업)를 하게 되면 밤낮없이 또는 휴일도 없이 일하게 되는 건 아닌지가 제일 겁이 났었다(관련 기사:
17년 차 자영업자, 오늘도 이렇게 애쓰고 있습니다 https://omn.kr/29jnr )
당시 읽었던 '성공한 자영업자 사장님들'의 인터뷰엔 꼭 이런 내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이건 요즘도 비슷한 것 같다).
"저는 장사 시작하고 하루도 쉰 날이 없었습니다. 명절과 공휴일에도 물론 일을 했고, 아끼는 자녀들의 입학식과 졸업식에도 못 가고 일을 하곤 했습니다."
이런 취지의 말을 읽거나 들을 때마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저렇게 매일 매 순간을 일해서 얻는 성공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당연히 시작한다면 열심히 해야 하겠지만, 내가 하는 일의 최종 목표가 그저 부자가 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만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늘 허전한 마음이 들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자영업으로 돈도 벌고 나름 보람도 얻게 될지, 시간 될 때마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을 많이 했다.
우리는 우선 일요일은 무조건 쉬는걸로 합의했다. 그리고 공휴일이나 토요일은 가능하면 쉬는 걸로. 마음 같아선 그 와중에 틈틈이 여행도 많이 다니고 각자 취미 생활도 다양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 생각 대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가게를 열고, 초반에 매출이 형편없었을 때는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느낌이었다.
원래는 쉬자고 합의했던 토요일, 그런데 토요일에 일하면 얻는 매출을 포기 하기가 쉽지 않았다. 토요일 한 달 네 번 가게 문을 열면? 매출이 괜찮은 경우 거의 한 달 월세 정도가 나온다는 계산에 다다르면, 쉬지 말고 일을 하자는 남편을 설득하기엔 늘 역부족이었다.
개업하고 수년 간은 일개미처럼 일만... 이제는 달라졌다
그러다 보니 개업하고 수년 간은 취미 생활이나 가족과 며칠 간 휴가를 가는 계획은 거의 늘 그림의 떡이었다. 실제로 우리 두 아이 초중고 졸업식은 늘 남편과 나 둘 중의 한 사람만 대표로 다녀오곤 했었다. 생각하면 실은 지금도 마음 아픈 부분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17년이 지난 지금, 자영업자인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다행히도 17년이란 세월을 지내면서 하는 일에 근육이 생기다 보니, 이제는 주 5일 평일 근무만으로도 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지난 토요일 나의 하루를 이야기해 보려 한다. 덥디 더운, 무더운 긴 여름을 통과하면서 제법 마음의 기온이 2도 정도 떨어졌다고 믿고 싶은 주말이었다. 폭염 중에도 지난 한 주 간 바쁘게 주방에서 보낸 나에게 제법 여유 있는 다른 세상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 선물을 나 자신에게 해주기로 했다. 요즘 보고 싶었던 독립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기 위해 조조 상영관을 찾아 보았다. 여기엔,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서 줌으로만 만났던 글벗 한 명을 더 초대했다. 함께하는 모임이 끝나가니 아쉬움도 달랠 겸 밥 한 끼를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동지애가 느껴지는 참이었다.
그녀는 경기 용인에서, 나는 경기 부천에서 출발하는 터였다. 우리는 각자 위치의 중간 쯤 되는 곳인 서울 강남의 신사역 근처 영화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평소 장보기며 배달이며 모두 자차로만 움직이던 내가 전철 노선도를 쳐다보며 길 찾기를 하는 것부터가 신세계였다. 내게는 다른 세상으로 이미 진입한 느낌이었다.
일단 가까운 7호선까지는 남편이 데려다 주고, 이후 혼자서 한 시간 남짓 지하철을 만끽했다. 최근 대만의 지하철을 경험해서인지 제법 낯설지가 않았다. 더구나 최근에 생긴 지하철들이라 깨끗할 뿐 아니라 기분이 확 좋아질 만큼 쾌적하고 시원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난 '글벗' 친구. 그동안은 조그만 줌 화면, 영상 속 온라인으로만 접했던 그녀를 처음 만났지만, 이미 얼굴이 낯익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지루한 듯 심심한 듯한 분위기의 독립영화여서 그런지, 아니면 아침이어서 그런지 영화관 안에는 대여섯 명 밖에 오지 않은 채였다. 그녀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과는 절대 같이 보지 않았을 것 같은 영화. 그렇게 드디어 필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퍼펙트 데이즈> 영화 속 주인공은 도쿄 시내의 공공 화장실을 돌며 청소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매일 성실하게 수행한다. 겉보기에는 늘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인 것 같지만, 시선은 참신했다.
그의 좁은 차 안에서는 향수를 자극하는 팝송이 흘러나오고, 그가 공원 화장실을 통해 만나고 마주치는 사람들도 평범하지만 늘 흥미롭게 그려진다. 배치가 절대 변할 것 같지 않은, 그의 소박한 방 안에 놓인 그의 물건들. 헌 책방에서 구해 온 책들과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 그리고 작은 식물이 자라는 '반려 화분'들이 평범해 보이는 그의 삶을 매일 평범하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두 시간 남짓, 나는 실컷 영화에 빠져 있다가 나왔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나이가 아마 내 나이쯤으로 돼보여 감정이입이 제대로 된 상태였다. 그렇게 주인공과 함께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영화 마지막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여운을 즐겼다.
글쓰기 모임 친구와의 만남
그 뒤엔, 글벗과의 본격 만남이 시작됐다. 나는 그녀 손에 이끌려 말로만 들어본 강남 가로수길 어느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빌딩 숲 사이의 커피숍에서 시원한 음료를 함께 마셨다. 내가 보낸 성급한 초대에 응해 준 것도 너무 고마운데, 그녀는 나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선물마저 건넸다. 책과 꽃모양 반지를 선물로 들고 온 것이다.
아마도 글쓰는 사람인지라 그런지, 두터운 책을 꼼꼼히도 포장해 온 모습이었다. 글모임에서 함께 하는 내 필명이 '서꽃'이라서 특별히 꽃모양 은반지를 준비한것 같았다. 그녀의 세심함이 글 뿐 아니라 마음에서도 느껴지는 고마운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날 처음 대면한 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재밌게 얘길 나눴다. 오래도록 그날 본 영화 이야기며 각자 사는 이야기로 그녀와의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쉽지만 돌아갈 시간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일지도 모르는 그날의 만남을 뒤로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다시 부천행 전철에 올랐다.
흔들리는 전철 손잡이를 잡았는데, 얼마 전 튀김 요리 할 때 생긴 손가락 끝 화상 자국 위로 새롭게 은빛 꽃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영업을 시작한 후로는 내 손가락에 반지는 설거지 할 때 걸리적거리는 소품일 뿐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결혼 반지 이후 따로 반지를 껴 본 적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하루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날 본 영화 제목과 정확히 일치할 것 같았다. '퍼펙트 데이', 완벽한 하루.
오늘,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한 주는 비록 지난 17년과 똑같이 새벽에 시장을 보고, 손 바쁘게 음식을 만들어 도시락을 만들어 파는 하루일 것이다.
그렇게 오래 반복돼 왔고 여전히 반복되는 일상이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지금이 바로 '퍼펙트 데이즈', 내 인생의 완벽한 나날들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