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제일 무서워 미룬이. 완벽하지 못할까 봐 지금이.
내일의 나에게 일단 미루지. 그러다가 돼버렸지 미룬이.
시작이 제일 무서워 미룬이시작이 제일 즐겁던 어린이는
끝내는 데만 급급한, 어른이 되지도 못했지 나는 미룬이.
널부러진 양말밭 건너 옷 걸린 숲을 지나서 설거지 동산의 향기를 모르는 척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어 미룬 걸 보는 건 일단 미룰래.
내일의 난 더 어른이니 나보다는 용기 있겠지.
약해 빠진 의지를 다시 한번 다지기 위해
동기부여 영상을 찾아 '나중에 볼 영상'에 저장해놔.
더 이상은 못 미뤄. 지금이 그때야. 이것만 보고 힘내서 시작할꺼야라는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일단 치킨을 먹는 나는
시작이 제일 무서워 미룬이. 완벽하지 못할까 봐 지금이.
내일의 나에게 일단 미루지. 그러다가 돼 버렸지 미룬이. (...)"
-이제규의 노래 ('미룬이' 중)-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미룬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가사가 의미심장하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최근 언제부터인가 이 미룬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아들에게 노래가 좋다고 했고, 엄마의 반응에 신난 아들이 유튜브 영상을 틀어줬다.
멜로디가 가볍고 흥겨워서 나도 종종 따라 부르게 됐는데, 어느 날 가만히 듣고 가사를 곱씹어 보니 내용이 꽤 철학적(?)이었다.
미룬이는 메타코미디 소속의 이제규라는 개그맨이 발매한 음악이다. 2024년 5월 1일에 발매된 곡이다. 멜로디는 동요 풍이지만, 가사는 굉장히 우울하고 암울하다.
바쁜 어른, 미루는 미룬
간단하게 살펴보면 "세상 가장 즐겁던 어린이는 시간이 지나 무언가를 시작도 못하고 그저 벌린 일을 끝내기만 하는 바쁜 어른이, 사실 어른이라고 하기에도 그조차도 못하고 아무것도 안 한 미룬이"가 되어버렸다며 그 인생을 비관하는 내용이다.
아들에게 노래가 슬프다고 했더니 '응?' 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다시 쳐다본다. 그래, 아들아. 너는 모르겠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며 시간을 낭비하다 보니 어느새 오십이 다 되어 가는 엄마의 이 비통한 심정을 어찌 알겠니.
그냥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아닌데... 노래 가사처럼, 나는 오늘도 뭔가를 미루며 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9월이다. 어영부영 지내다 보면 2024년도 금방 지나간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올해 초 독서모임에서 일 년 목표를 회원들과 공유했는데, 나의 2024년 목표는 소설가 등단이었다. 생각만 했던 소설을 올해엔 꼭 한번 써보고 싶었다.
그때는 시간이 많은 줄 알았다. 그래서 미뤘다. 소설 한 줄 쓰지 않고, 소설가가 될 수는 없다. 이제라도 생각만 하던 이야기들을 글로 써 내려가야 한다.
9월부터 아이들 셋은 매일 줄넘기를 하기로 했다. 중2인 딸이 일 년 동안 키가 자라지 않아서 아빠가 내린 특단의 조치다. 저녁을 먹고, 30분 정도 집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줄넘기를 한다. 나도 계획을 다시 세웠다.
나는 전업주부다. 방학 동안에는 아이들과 함께 하느라 내 시간이 없었다. 성공한 작가들을 보면 아이들을 재우고 식탁에 앉아 글을 썼다고 하는데 나는 9시만 되면 졸기 시작한다. 새벽에 일어나는 게 편한데, 새벽 운동하느라 글쓰기를 못 했다.
무엇보다 짜투리 시간에 독서하던 습관이 유튜브를 보면서 망가졌다. 틈만 나면 유튜브 영상을 본다. 소위 짦은 '숏츠' 영상은 짧아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쇼츠만큼 시간을 잡아먹는 게 없었다. 글을 쓰려면 유튜브를 끊어야 한다.
나는 글쓰기와 독서, 걷기와 근력운동, 금주와 유튜브 금지를 아이들에게 선포했다. 여름이니 덥다는 핑계로 맥주와 하이볼을 저녁마다 마셨더니 막둥이 출산 전 몸무게에 근접했다. 건강검진을 받기 전에 체중조절이 필요했다.
표를 만들어서 거실 한쪽에 있는 칠판에 붙였다. 아이들은 놀이처럼 줄넘기 개수를 적었다.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다.
기억하자. 더 이상 미루면 안 된다. 매번 후회만 하는 어른은 매력적이지 않다. 완벽하지 않을까 봐 시작을 못 한다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난 미룬이가 아니다. 나는 뭐든 하는 이, 지금 하는 '이룬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