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괜찮아, 싶을 때쯤 삶은 또 힘들어지곤 합니다. 그게 삶이니까요. 소중한 존재들과의 이별,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가족 간의 갈등, 잘 나아지지 않는 반려병 등. 어려움과 동행하면서 매번 다시 일어서는 마음에 대해 씁니다.[기자말] |
무더위에 정신이 아득해지던 이번 여름 어느 날, 평소 잘 들어가지 않는 작은방에 들어갔다가 헉, 하고 놀랐다. 스킨답서스 화분 이파리들이 축축 늘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을 준 기억을 더듬어 보니 최소 2주는 지난 것 같았다.
"미안해, 미안해!"를 연발하며 허둥지둥 물을 들이부었다. 다행히도 하루가 지나니 줄기와 이파리는 다시 꼿꼿해졌다. 내가 언제 시든 적이 있었냐는 듯. 고마운 마음에 이파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엄마와 돌봄
이 스킨답서스는 엄마가 보내준 것이다. 내가 식물 죽이기에 탁월한 능력이 있는 건 엄마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서도 잘 크는 걸 보내주셨는데, 그렇다 쳐도 이 녀석은 꽤나 강했다.
심지어 몇 주나 물을 주지 않아도 가지마다 또 가지를 쳐가며 순식간에 빽빽하게 자라났다. 그런데 아무리 강한 녀석이라도 창가에서 물도 없이 이 무더위 불볕을 견디기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엄마는 돌봄에 영 소질이 없는 나와 정반대다. 화분을 어찌나 정성스럽게 잘 키우는지 볼 때마다 이건 재능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달에 한 번씩 본가에 가면 엄마는 "빨리 와서 봐봐" 하고 나를 재촉해 부른다. 가서 들여다 보면, "꽃 핀 거 색깔 봐봐", "여기 봉오리 올라온 거 봐라", "삽목했는데 새싹 올라온 거 신기하지?" 하면서 꽃보다 화사하게 웃는다.
화분을 가꾸는 일은 엄마의 가장 오래되고 꾸준한 취미인데, 그렇게 정성 들인 결과물을 보여줄 사람이 대체로 나뿐이니 얼마나 보여주고 싶을까. 리액션에 인색한 나는 평소의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아, 그렇네", "진짜 잘 키웠네", "이쁘네" 같은 말을 최대치의 공감이랍시고 하는데, 이번에 본가에 가면 돌고래 소리 정도는 질러드려야겠다.
엄마의 돌봄은 숨 쉬듯 자연스러워 보인다. 엄마는 돌봄 일을 직업으로 하는데, 3개 가구 가구원들의 집안 살림과 거동 등을 보조한다. 엄마의 성격상 누가 시키지 않는 일들도 찾아서 해주고 무리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자주 듣는다. 그 정도면 진이 빠져 집안일은 대충 할 법도 한데 본가는 단 한 번도 어질러져 있는 적이 없다.
화분을 돌보는 것뿐 아니라 구피를 키우는 어항의 물을 갈고, 더울 때는 얼음을 하나씩 넣어주고, 내가 본가에 갈 때마다 반찬에 신경을 쓴다. 올해만 해도 내가 안 먹을 찬거리까지 잔뜩 포장해서 소포로 부친 게 몇 번이다. 오빠 걱정도 쉴새가 없다. 엄마는 도대체 몇 집을, 몇 명을 돌보고 있는 것일까.
반대로 엄마는 과연 누구의 돌봄을 받고 있는 것일까. 엄마의 생일은 추석 연휴 중에 있다. 혼자 사는 엄마가 생일을 쓸쓸하게 보내지 않는 건 다행이지만, 엄마 생일이라는 개념은 명절에 묻혀 흐지부지 사라지기 일쑤다.
자식과 손주들이 온다고 이것저것 준비해둔 명절 음식이 곧 생일상이 되고, 내가 비좁은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기 바쁜 엄마를 물리치고 맛도 보장되지 않는 미역국을 굳이 끓여주겠다고 하기 머쓱하여 주저하다 보면, 어느새 미역국도 엄마가 끓여서 내놓는다.
가끔 내가 생일 케이크를 사서 초에 불을 켜지만, 그것도 손주들의 촛불 끄기 놀이가 되어 그날의 주인공을 알 수 없게 되곤 한다. 지난해 생일도 그랬다. 나는 조카들이랑 놀아준다고 상차림을 돕지도 못했지만, 적어도 상을 차려준 사람이자 그날의 주인공인 엄마가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뜨는 게 식사의 시작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어서 앉아서 같이 먹자는 내 말에도 엄마는 여전히 주방을 오가며 "나 신경 쓰지 말고 느이들 먼저 먹어"를 반복했다. 그리고 오빠와 두 조카, 내가 한 번에 앉자 의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엄마는 "나는 서서 먹어도 돼" 하면서 정말로 서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데다 그 옆에 별 생각도 없이 앉아 있는 오빠를 본 나는,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참지 못해 오빠에게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와 이혼한 후 거의 혼자 생계를 책임지면서 말 그대로 돌봄밖에 모르고 산 엄마가 왜 이렇게까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 자신을 포함해 거기에 익숙해져 있는 식구들에게 화가 났다. 엄마는 "엄마 괜찮으니까 울지 말어. 엄마 앞에서 싸우지 말어" 하면서도 화장지를 뽑아 눈물을 닦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엄마에게 여러 번 말했다. "엄마, 엄마가 자꾸 괜찮다고만 하니까 식구들도 엄마 안 챙기고 당연하게 넘어가잖아. 엄마 스스로를 소중히 대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가장 엄마를 돌봐야 했던 건 식구들이었다는 걸. 엄마는 과중한 '엄마 역할'에 대해 가부장 문화가 주는 압박에 충실해 왔을 뿐이라는 걸.
"꽃 보러 오라"는 이웃
올초 엄마는 몇 년 만에 내 자취방에 왔다. 본가에서 4시간 넘게 걸리는 곳이다. 그때 나는 이별 후유증으로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한두 시간에 한 번은 엉엉 울어야 그나마 살아지던 때였다는 변명을 붙여보지만, 말하기 부끄러운 일들뿐이다.
나는 엄마를 대접하기는커녕 아침에 내 방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에게 나 지금 울어야 하니 나가 달라고 말했고, 말 한 마디에 예민해져 잔뜩 짜증을 냈다. 엄마는 우리집에 와서도 밥을 해주고, 장을 봐 와서 반찬을 몇 개나 만들어놓고 갔다.
같이 바다에 갔을 때 바다를 보며 소리 지르자고 말해 주었고, 수평선을 보면서 몰래 우는 내게 다가와 등을 쓸어주었다. 나는 엄마가 돌아간 뒤 다시 울었다. 이별 때문이 아니라 엄마에게 한 번 웃어주지도 못한 나와, 여기까지 찾아와 작은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엄마가 생각나 울었다.
집에 돌아간 엄마는 다음날 내게 스킨답서스 화분을 보내 주었다. 식물이라도 키워보면 마음이 나아질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아픔도 다 희미해진다고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엄마도 그 긴 아픔을 그렇게 흘려보낸 걸까. 돌볼 수 있는 것들을 돌보면서. 돌아보기보다 그저 돌보면서. 엄마의 화분들은 고통을 먹고 그렇게 예쁘게 자라나는 걸까.
나는 요새 엄마가 혼자 사는 아래층 아주머니와 이따금 오며 가며 지낸다는 게 다행스럽다. 엄마가 조금은 덜 적적할 것 같아서도 그렇고,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가기에 시간이 걸리는 나 대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들여다봐 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저번에는 엄마와 같이 있을 때 아래층 아주머니가 엄마에게 꽃 사진을 보낸 것을 봤다. '해가 지면 꽃이 져요. 꽃 지기 전에 보러 오시든가요. ^^' 엄마는 저녁을 먹다 말고 꽃을 보러 다녀왔다. 아래층 아주머니의 꽃도, 엄마의 꽃도 예쁘지만, 내게는 요즘 같이 삭막한 세상에서 '꽃을 보러 오라'는 말이, 그리고 밥을 먹다가도 꽃을 보러 다녀오는 엄마가 더 생기 있고 아름다워 보였다.
돌봄이란 내 생각만큼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것 좀 보라는 말에 다가가서 들여다봐 주는 일. 그 사람이 아프고 기쁘게 키워낸 무언가가 얼마나 귀한지 알아주는 일. 그런 게 돌보는 마음인지도, 그러니 나도 조금씩은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작은방에서 스킨답서스를 살피며 내 상태를 짐작해 보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물을 준 지 오래됐다면, 내 끼니 역시 골고루 안 챙겨먹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냉장고에 붙여 놓은 엄마의 메모를 한 번 더 본다. '울딸, 갈 때 냉장고 반찬 잊지 말고 가져가렴', '냉장고에 있는 반찬 더 꺼내 먹으렴'. 나부터 잘 돌보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엄마가 지고 있는 돌봄의 무게를 줄일 수 있게.
어제는 당근마켓 나눔으로 큰 화분을 하나 받아 왔다. 흙도 한 봉지 샀다. 본가에 가기 전에, 비좁은 화분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스킨답서스에게 분갈이를 해 줄 생각이다. 본가에 가면 엄마가 키워낸 화분들을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봐야겠다. 그동안 나의 스킨답서스는 넓어진 화분 안에서 마음껏 자라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