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적인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것일까?'
노훈심 '안양군포의왕 환경운동연합(아래 환경련)' 사무국장과 대화 중 머릿속을 맴돈 궁금함이다. 그저 직업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입에서 쉼 없이 흘러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지구 환경에 대한 끝이 없는 사랑의 메시지였다.
"탄소를 줄이는 게 급선무인데, 그래서 저는 전기를 많이 먹는 가전제품부터 다 없앴어요. 정수기, 비데, 압력밥솥 같은. 이거 세 개만 없애도 전기료가 드라마틱(극적으로)하게 줄어요.
또 일회용품이 나올 수밖에 없는 배달 음식은 아이들(자식들)이 막 조를 때를 제외하고는 시켜 먹지 않고요. 시장에 갈 때는 무조건 바구니를 들고 갑니다. 그럼 비닐 포장을 안 해도 되거든요. 텀블러는 당연히 필수품이고요."
노 사무국장을 지난 9일 경기도 안양8동에 있는 환경련 사무실에서 만났다. 토론회장이나 기자회견장에서 마주쳤을 때 그대로 웃음기 있는 얼굴로 맞아줘 말 붙이기가 편했다. 1m 남짓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웃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얼굴 자체가 '웃는 상'이었다. 편안함이 느껴졌다. 날 때부터 '범생이'였을 것 같은 성실함도 느껴졌다.
환경에 관해 대화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공서 일회용품 사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며칠 전 환경련에서 발표한 것인데 요점은 '일회용품 줄이자는 조례까지 만든 지자체 공무원들이 일회용품을 분별없이 많이 사용한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군포시 공무원들 일회용품 사용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조사하러 군포시에 4일을 나갔었는데 정말 분통이 터졌어요. 결과를 보고는 더 열받았고요. 공무원 중에는 커피를 텀블러나 다회용 컵에 들고 시청사로 들어서는 이가 거의 없었어요. 텀블러 가지고 다니는 사람 3명 봤는데, 한 명은 예비군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민원인 같았어요."
실제로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안양시와 군포시가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를 시장 책무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결과였다. 지난 7월 점심시간에 군포시청에 입장한 사람 중 54.5%가 음료가 담긴 일회용 컵을 사용했다. 8월에는 이보다 조금 줄어 41.8%가 일회용 컵을 사용했다. 안양시청 일회용 컵 사용자 비율은 27.7%로 조사됐다.
이처럼 군포시가 특히 높은데, 이는 수도권 조사 결과 평균의 2배 정도 수치다. 지난 7월 환경운동연합에서 전국 단위로 진행한 공공청사 일회용 컵 실태조사에 따르, 수도권의 일회용 컵 사용률은 평균 23.3%였다(관련 기사 :
일회용품 줄이자 조례까지 만들어놓고선... 공무원은 예외? https://omn.kr/2a2oo ).
'손해났다'는 말을 고객에게 해야 하는 순간...
웃는 상 노훈심 얼굴에서도, 군포시 공무원 일회용품 사용에 관한 대화가 이어질 때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웃음기가 되돌아왔을 즈음 '언제부터 환경운동을 했느냐?'는 질문으로 화제를 슬쩍 돌렸다.
"올해가 7년째이고요. 그전에는 금융 계통에 있었어요."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학생운동 하다가 환경운동을 하거나, 다른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환경운동으로 옮기는 식이 아니었다. 환경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자본주의 냄새 풀풀 풍기는 '금융계'에서 왔다니.
그는 연봉이 억대가 넘는 투자·자산 관리 전문가였다. PB(Private Banking)라는 이니셜(initials)로 잘 알려진 직업이다. 고액자산가를 상대로 영업활동을 펼치고 자신의 실적만큼 두둑한 보수도 챙길 수 있어, 증권이나 은행 등 금융권 내에서도 인기가 높은 직군이다. 그런 만큼 업무 강도가 높고 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투자신탁회사 PB였다. 금융인 삶 20년 차를 맞이하던 어느 날 그에게 '번아웃 증후군(burnout)'이 찾아왔다. 심각했다. 더 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밀려올 정도였다고. 특히 고객이 맡긴 돈을 투자 실패로 손해나게 하는 경우를 견딜 수 없었다. '손해났다'는 말을 고객에게 해야 하는 순간에는 정말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 순간을 피할 수 없는 게 바로 PB의 숙명이었다.
"억대 연봉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일했겠어요. 고객 돈으로 주식도 해야 하고, 펀드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전 세계 금융시장을 다 꿰고 있어야 해요. 세계 시장을 다 훑어보는 게 매일 출근하자마자 하는 일이었어요.
해외 부동산 펀드에 투자했다가 고객 돈 원금 5000만 원 전액을 날리고, 그 얘길 해야 하는데... 아, 그건 정말 극심한 스트레스였어요. 이런 일 겪으면서부터 멘붕(멘탈붕괴)이 왔고, 번아웃을 겪게 된 거죠."
그는 "머리채나 멱살 잡히는 일은 없었지만 정말 미안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동료들은 '돈 벌러 온 사람들이니, 손해 볼 수도 있는 것'이라며 '너무 죄의식 갖지 말라'고 그를 위로했다. 실제, 고객 돈 수백억 원을 날리고도 당당한 강심장 동료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노훈심의 심장은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그가 선택한 해결책은 사표. 2014년 초 그는 20년 금융인의 삶을 접고 40대 중반의 나이에 전업주부라는 새로운 직장을 갖게 됐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게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무엇인가 공익적인 일을 해보겠다 마음먹었는데, 막상 찾아보니 그게 쉬운 게 아니었어요. 아파트 부녀회에서 봉사활동이라도 하려 했는데, 그것도 진입 장벽 넘기가 만만치 않았어요. 거기도 터줏대감들이 있었던 거죠."
나도 모르는 내 성향을 찾아 준 절친
4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집에서 살림만 하기에는 너무 젊었다는 게 노훈심 사무국장 설명이다. 더군다나 출근하고 퇴근하는 리듬에 맞춰진 '직장인의 몸'이었다. 뭔가 해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할 즈음 절친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에게 딱 맞는 일자리가 있다"는 반가운 내용이었다.
"안양군포의왕 환경운동연합 상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는 것이었는데, 저는 환경운동연합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상근자(상시근로자)가 뭔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못하겠다고' 했더니, 친구가 '장담하건대 너하고 딱 맞는 일'이라며 지원서까지 대신 써서 접수해 줬어요. 내가 알지 못하는 내 성향을 제 친구는 알았던 것 같아요."
이렇게 해서 발을 들인 환경련은 정말로 거짓말처럼 노훈심과 딱 맞는 직장이었다. 우선 돈을 좇지 않는 일이라 마음이 편했다. 공익성도 있어 자본시장에서 쌓은 업보를 씻는 것 같아 일을 할수록 자존감이 높아졌다. 무엇이든 아껴 쓰는 생활 습관과도 맞아떨어졌다.
정말 좋은 점은 '돈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돈이 많아서 자유롭다는 게 아닌, 돈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게 돼 자유롭다는 말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자식들 성적이나 진학한 대학, 자동차 크기를 남과 비교하는 따위의 다분히 세속적인 것에도 연연하지 않게 됐다. 그러면서 금융인으로 살면서 겪은 번아웃 증후군이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이와 함께 함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PB로 살 때는 돈이 최고의 가치였어요. 제 주변에 있는 대부분이 그랬다고 봐야 하죠. 당연히 관심사는 돈 버는 것이었고, 대화 주제 역시 돈 버는 기술 같은 것이었죠. 돈이 많고 적음으로 능력이 평가되고... 한 마디로 인생 최고 가치가 돈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환경련은 우선 대화 내용 자체가 달라요. 후손들에게 어떻게 하면 깨끗한 지구를 물려 줄 수 있나, 이런 게 주된 관심사죠. 이런 분들하고 몇 년을 함께 하면서 돈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거죠."
많이 벌 때나, 적게 버는 지금이나 살림살이는...
돈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친환경적인 삶에 있었다. 금융인으로 살 당시 벌던 1/5도 안 되는 월급을 받고 있지만, 그의 삶은 부족하지 않다. 친환경적인 삶 자체가 소비를 줄이게 하기 때문이다.
"많이 벌려면 그만큼 돈과 시간을 많이 써야 하는 게 자본주의 법칙입니다. 직장 일로 바빠 집안 살림을 못 하면 파출부라도 써야 하는 것이잖아요. 지금은 물론 파출부 안 부르고요. 탄소 줄이기에 동참하려고 가전제품도 줄였어요. 채소 같은 것도 아주 조금씩만 사고요. 배달음식은 거의 안 시키고.
이렇게 소비를 줄이니까 버는 돈이 적어도 부족함이 없는 거죠. 많이 벌 때는 여기저기 들어가는 돈이 많았어요. 계산해 보면 많이 벌고 많이 쓰던 그때나,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지금이나 살림살이는 별 차이가 없어요."
돈을 비롯한 온갖 세속적인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 그는 최근에야 확실히 알게 됐다. 예전 직장 동료들을 만나게 된 순간이었다. 임원급으로 진급한,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성공한 금융인의 길을 걷고 있는 그들이었다.
그들이 만나자고 했을 때 노훈심은 내심 걱정스러웠다. 혹시 그들을 부러워하게 되지 않을까. 10년 전의 사표를 후회하게 되는 게 아닐까. 환경운동가로 사는 내 모습이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진급해서 임원이 됐고,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를 한 자신과 달리 여전히 서울 강남에 사는 그들을 보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돼 오히려 기뻤다. 그들과 통장 잔액 따위를 비교하고 싶은 욕망은, 그의 마음자리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 선택이 옳았어'라는 확신만 강해질 뿐이었다.
"너무 일만 열심히 하지 말고"
억대 연봉 내던지고 찾은 환경운동이 노훈심에게는 삶의 돌파구였다. 번아웃 증후군을 극복하게 해줬고 친환경적인 삶의 가치를 일깨웠다. 아껴 쓰는 생활 습관이 살림살이도 챙겨주고, 지구 환경도 살리니 일석이조 아닌가.
그는, 은퇴할 나이가 돼 인생 2막을 맞이하게 되는 이들에게 "어떤 일을 하게 되든 너무 일만 열심히 하지 말고 자기 생활을 돌보며 살라"는 충고를 남겼다. "여건이 된다면 살림살이를 위해서라도 탄소(소비)를 줄이는 운동에 동참해달라"고 당부했다.
'잘 나가던 금융인이 인생 2막에 환경 투사가 됐다'라고 농을 치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투사라고요? 저는 싸우는 거 싫어해요. 연대, 손을 맞잡고 함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했다.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는 내게 그는 "집안 살림하면서, 또는 사무실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는 판단 기준을 탄소 중립에 이로운가 반하는가로 해달라"고 말했다. 습관처럼 하는 당부 같았다. 아니라고 우기지만, 노훈심 그는 환경 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