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할 때 우울하더라도 조금 더 편하게 우울하면 어떨까 해요."
설경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우울증 당사자이기도 하다. 서울 금천구의 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인 그는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으로, 그리고 정신과 의사로서의 경험을 지난 5일 낸 신간 <나를 지키는 용기>(유노라이프)에 담았다. 한국에서 정신과 의사로서 공개적으로 우울증 경험을 밝히며 책을 낸 사례는 이례적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따돌림과 학교폭력을 경험했던 설 원장은 성인이 되고나서도 심한 무력감에 시달렸고, 입대 후에는 관심사병으로 심한 우울증과 공황발작을 겪기도 했다. 이후 2011년부터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서 전공의로, 또 현재 일하는 병원의 원장으로 환자를 돌봤다.
신간을 통해 설 원장은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 환자들의 여러 감정 가운데 무력감과 무기력감, 공허감에 집중해 이야기한다.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점심시간을 반납한 채 인터뷰에 응한 설 원장을 지난 19일 그가 일하는 병원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 정신 질환 환자의 경우 특히 무기력감에 대한 호소가 많고, 점점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나를 사랑하자"가 아닌 "내가 지금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를 강조했다.
"우울증에 의심 많은 한국인, 이유 찾는다"
- 책 <나를 지키는 용기>에서는 여러 정신 질환 가운데 무력감과 무기력감, 그리고 공허감에 시달리는 이들을 다루었다.
"최근 내원하는 환자들 가운데 무기력을 호소하는 분들이 특히 많다. (병원이 위치한 가산디지털단지의 경우) 주변에 IT 계열에 종사하는 20~30대 환자가 많다. 상대적으로 공무원처럼 직업이 안정된 경우보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안정되지 않아 무기력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 환자이면서 (무기력감을) 핑계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공격하거나,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고 해도 (무기력감에 대해) 나약하다고 자책하는 이들이 많다."
- 자기 자신을 향한 가혹한 잣대는 한국 환자들의 특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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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 한국 사람들은 자기가 우울한 것에 대해 의심을 많이 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차에 뛰어들까 고민하면서 병원에 와도, 정작 정말 우울증이 맞는지를 되묻기도 한다. 자기 감정에 대해서 바라보는 것도 서툴다. 무엇보다 우울증을 스티그마(사회적 낙인)로 생각해 자기 자신이 우울증이라는 '집단'에 들어가는 걸 불편하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의심한다.
그래서 실제로는 충분히 우울한데도 끊임없이 우울한지 의심하고 우울하다가도 웃기라도 하면 우울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다가 더 힘들어지기도 한다. 우울증이 삶의 연속선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임에도 연속적인 상태로 바라보기보다는 '그래서 내가 우울증 환자냐 아니냐'라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한다. 마치 우울증이 있으면 삶을 놓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우울증과 삶은 얼마든지 같이 갈 수 있다. 심지어 아무런 이유가 없지만 우울감이 느껴질 수도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내가 우울하면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 왜 그럴까?
"내 감정이 아니라 내 기능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나를 나 자신으로 온전히 대한다기보다는 내가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이를테면 경쟁에서 뒤처지는 일 등이 발생할 때가 돼서야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병원에 온다. 우울증이라고 하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도 있지만 반대로 어떤 분들은 안심한다. 스스로 설명이 되지 않는 상태에 괴로웠기 때문에 우울증이라면 '그래서 그랬구나'라고 안도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는 나아진다기보다는 도피하는 것이다."
"무기력, '나 자신과의 관계 개선' 신호"
- 무기력은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사실 '이런 감정은 다룰 수 없다'고 책에 나와있다. 무기력이란 그저 빙산처럼 드러난 부분이고 현상일 뿐이다. 무기력이 해결되면 다른 문제는 없었던 것처럼 치부되는데 사실 무기력이 나타났다는 건 '나 자신과의 관계'가 이미 훼손돼있다는 증거다. 한국은 굉장한 경쟁 사회라 무기력한 것도 싫지만 무기력하지 않게 돼 다시 경쟁을 하기도 싫은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는 다시 무기력감이 올라올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치지만 때로는 질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지 않는다. 경쟁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와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있다는 걸 주목하지 않는다."
- 실제로 무기력감을 호소해 병원에 내원했다가 치료가 끝났는데도 다시 병원에 오는 경우가 자주 있을까?
"그런 사례는 굉장히 흔하고, 일반적이기도 하다. 요즘 들어 환자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우울증은 원인도 뚜렷하지 않고 이유도 없이 재발하곤 한다. 그걸 경험하는 사람으로서는 '내가 또 왜 이러지'라면서 다시 무기력해진다. 이런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서 '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과정이 반복될수록 스스로 답이 없다고 느낀다. 좋아지다가도 다시 언제 나빠질지도 모르고, 나빠지는 것도 뚜렷하게 이유가 없다.
이전에는 확실히 (사건 등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의해 우울해지거나 화병처럼 해결할 수 있든 없든 그래도 연결 지을 만한 원인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원인이 모호해졌다. 그러면서 '내가 왜 우울하지? 우울한 게 나인가? 우울한 게 나와 분리될 수 있는가?' 이런 식으로 만성화된 우울증이 확실히 많아졌다고 느낀다. 나 자신과의 관계도 (병이 길어지면) 화부터 나면서 훼손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 무기력을 개선할 수 없다면 무기력한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무기력 그 자체는 당연히 있는 것보다 없는 게 좋지만 삶에 불가피하게 찾아올 수 있다. 이를 다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 순간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봐야 한다. 무기력에 시달리는 그 순간에 너무 괴로우니 나도 모르게 해결책을 찾게 된다. 하지만 무기력감에는 다루려고 해서 다뤄지는 게 아니라 다루려고 하지 않는 순간 다뤄지는 역설이 따라온다. 예를 들어 잠을 자려고 노력하면 더 못 자고, 잠을 자야겠다고 다짐해도 여전히 잠을 자야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못 자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 '탈중심화'이다."
- 책의 서문에서 "'나를 아끼고 사랑하자' '우울하고 무기력해도 괜찮다' '나를 이해하고 존중하자'와 같은 말은 결코 쓰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맞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자는 다짐은 사실 나를 아끼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조폭이 몸에 '착하게 살자'라고 써둔 이유는 '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 아닌가. 그러니 나를 아끼고 사랑하자는 말은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 '내가 지금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말은 의미가 있다.
어느 날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느꼈는데 다음날 그게 사라질 수도 있다. 그 느낌은 평생 머무르지 않는다. 살다 보면 나를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느낌이 사라진 순간 '내가 지금 고생하고 있구나'가 아닌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또 이러네'라고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그 느낌이 있고 없고는 그저 내 상태를 비추는 거울일 뿐이고 오히려 그 순간을 다루는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 원장님은 최근 어떤가?
"나의 경우는 심한 우울증이라기보다는 만성적으로 우울한 경향이 강한 기분부전증으로 표현한다. 우울보다는 조금 얕은 것 같고 괜찮다기보다는 조금 힘든 것 같고, 그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다. 정신과 의사에게 우울증은 흔한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에선 정신과 의사의 자살률도 높다. 나는 원래 소심하고 용기가 없었는데, 두려움이 없어졌다. 물론 책이 안 팔리고 내 이야기를 밝혔다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해 속상할 수도 있다(웃음).
속상하지 않아야 된다는 게 아니라 속상할 수도 있다. 그 곳에서 나와의 관계를 보는 거다. 우울한 바로 그 순간 내가 나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알게 되면 우울해지기는 해도 스스로를 많이 괴롭히지는 않게 된다. 우울감이란 일종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 느끼는 소감이다. '우울한 때에도 나랑 같이 잘 있자', '우울할 거면 조금 편하게 우울하자'고 생각하게 됐다."
책 <나를 지키는 용기>의 저자 소개란에는 다음의 문장이 있다. 무기력에 시달리면서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책은 '나를 지키는 용기'의 여러 방법을 소개한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이야기해 줄 따뜻한 내가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삶은 안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