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짜장면만 먹어도 7억이 필요하다란 무서운 이야기가 있다. 은퇴 후 두 사람이 7천 원짜리 짜장면을 하루 세 끼씩 약 40년 동안 먹을 때 나오는 단순 계산이다. 하루에 세끼가 아니라 두 끼만 먹어도 4억이다. 물가상승율이나 병원비 등의 갑작스런 지출은 감안하지 않았다.
단순히 짜장면으로 계산했지만 돈이야 다다익선 아닌가. 자녀 양육에서 벗어난다해도 여전히 조부모란 타이틀이 있을 거고 커뮤니티가 좁았던 이전 세대와 달리 우리 세대는 장년까지 이어 온 모임이 많은 편이다.
예전의 가정은 퇴근 후 집밥에 TV 앞에 주로 있었지만 요즘 장년들은 청년들 이상으로 활발하게 다양한 취미 생활을 한다. 때문에 은퇴 전 임금피크가 되더라도 따박따박 받는 월급으로 생계를 책임지고 한 달, 1~2년 이상의 경제 계획이나 여행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모든 직장인은 예비 은퇴자
자영업이나 사업자가 아니라면 모든 직장인들은 은퇴자가 된다. 직장생활 중 사표를 시원하게 내던지고 싶었던 사람들이나 국가 다음으로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도 피할 수 없다. 종착점이 언제인지 확실히 알았지만 은퇴 후 이럴 줄 몰랐다란 반응이다. 은퇴한 선배들이 하나같이 하는 소리가 있다.
"확실히 달라. 미리 준비할 걸 그랬어."
올해 초 은퇴한 63년생 친척은 새로운 자격증을 준비하기위해 사설평생교육원에 등록했다. 30만 원이면 직업상담사부터 여러 가지를 딸 수 있다고 한다. 놀란 것은 공부를 위해 스터디 카페에 갔더니 흰머리가 태반이라고 한다.
본인과 같은 마음이다. 늦었지만 어디선가 써먹을 수 있는 자격증에 이제야 눈을 돌린 것이다. 미리 준비해야 한다란 수많은 조언을 들었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다른 종목에 시간과 마음을 주는 게 어디 쉬운가? 현직에 있으면서 도전하는 사람이라면 설사 꼭 사용할 자격증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총알 하나는 더 장전한 셈이다.
이 "뭐 하고 살 거냐?"는 돈이란 말만 안 했을 뿐 '뭐=수입'이다. 사실 아직 가보지 않은 세계라 얼마가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계산하지 못했다. 그저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대충 월 300만~400만 원은 있어야 두 사람이 살 수 있나 보다 생각할 뿐. 국민연금과 저축으로만 살기엔 부족할 게 뻔하다.
교사인 친구는 골프를 치는 선배 교사가 은퇴 후 운동을 접었다고 한다. 이전보다 오른 회비 몇 천 원이 부담스럽다고 했단다. 그나마 안정된 사학연금이 있음에도 월급에 준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가계가 어려우면 제일 먼저 줄여야할 게 유흥비.
내가 운동하는 탁구장만 봐도 은퇴 전후가 확연히 다르다. 게임하고 뒷풀이를 가고 뒷풀이에서 각출이 다반사였다면 요즘은 점심 후 나와 저녁 전 귀가한다. 많이 먹어야 커피믹스고 간간히 내기 탁구에서 아이스크림 먹는 재미가 전부다.
서로가 같은 처지니 얻어 먹을 생각은 안 하는 눈치다. 탁구나 등산처럼 가성비 있는 여흥은 그래도 낫다. 친구의 선배처럼 몇 천원에도 움찔해지는 게 충분히 공감된다.
노후에 대한 넘쳐나는 정보 중 최고는 '생활비'다. 때로는 과잉 걱정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느 프로그램의 한 패널은 요즘 제시되는 금액은 상류층 수준이라고 일침했던 게 기억난다.
여행 가고 외식 하고 운동 하고 모임 하고 그건 현직 때도 누리지 못했던 규모라고 덧붙인다. 맞는 말이다. 현직 때도 마이너스통장에 의존하거나 맞벌이이거나 보너스가 나올 때 가능했던 누림이다.
TV에서 호들갑스럽게 "노후, 노후"를 외칠 때 위기감이 적잖았다. 계산기를 두드려보지만 답이 없다. 내린 결론은 그 걱정할 시간에 나가서 배우거나 일해야 한다란 생각이다.
나이가 많아 일거리가 없다고 하지만 당근마켓을 보면 알바가 넘친다. 물론 이전 경력과는 비교 안 되는 영역이고 금액이지만 할 수 없다. 나이가 많으니깐. 가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다. 선배들의 과정을 충분히 보았으니 똑같은 실수, "이럴 줄 몰랐다. 미리 해둘 걸"은 덜 해야겠다.
데자뷰가 느껴지는 질문들
어디를 가나 은퇴 후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을 받는다. 심지어 은퇴자가 은퇴자에게말이다.
"뭐 하고 살 거냐?"
남의 노후가 왜 궁금할까싶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반은 정보를 얻기 위함이고 반은 공감이다. 그만 좀 물었으면 싶은데 어느 곳을 가나 은퇴자가 넘쳐나니 매번 같은 질문에 고민하고 한숨 쉰다. 직장이 지겨워 때려치웠음 좋겠다란 말을 달고 살던 사람들도 이 질문에는 명쾌한 표정이 아니다.
자녀 양육을 위해 자발적으로 그만둔 나는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옮겼을 때, 주5일에서 점점 근무 일이 짧아지면서 은퇴자 이상으로 상실감이 컸다. 꾸준히 배우고 찾은 중장년 시절이었지만 비정규직의 한계는 극복하기 어려웠다. 그 와중에 자주 들었던 질문.
"이번 일 그만두면 또 뭐할 거냐? 내년에는 뭐할 거냐?"
끊임없이 일하는 와중인데도 다음 일을 재촉하는 느낌이다. 평생 일하고 방금 은퇴한 자들에게 또 재촉하는 이 질문, 지친다. 우리는 안다. 우리는 어차피 개미, 절대 베짱이과는 못 된다는 걸. 평생 일을 위해 공부했고 그래서 평생 일했고 또 일하지 않은 것에 불안한 개미다. 그러니 이제는 그만 물어보았음 싶다.
그런데 이런 질문, 뭔가 데자뷰가 느껴진다. 청년들에게, 젊은 사람들에게 툭툭 던졌던 질문 아닌가.
"너, 졸업하면 뭐 할 거야?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집은 어떻게 장만할 거냐, 아이는 언제 얼마나 낳을 거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