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기농 농장에서 농사 체험하며 일손 돕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듣는 새로운 한국 이야기를 싣습니다.[기자말] |
"독일이 통일이 되지 않았다면 저희 가족의 삶은 완전히 달랐을 겁니다. 마음대로 여행이나 공부도 못하고, 직업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없었을 거예요. 언론의 자유도 없구요. 부족한 점도 많지만 그래도 독일이 통일이 되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나 민주적으로 훨씬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통일 이후 문제도 있지요. 앞으로 동서독의 격차를 더 줄이는 방향으로 독일이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좋아하는 한국도 빨리 통일을 해서 더 강하고 행복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독일 동부 작센 지방에서 자란 카롤린, 플로리안이 백화골에 팜스테이를 하러 찾아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만났던 독일 친구들은 대부분 서독 출신이었는데, 동독 출신인 이들이 들려주는 독일 이야기는 지금까지와 많이 달랐다.
평상시 잊고 지냈던 한국 통일이라던가,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환기시켜주는 친구들이었다. 한 달 동안 같이 일하면서 한국을 여행하며 느낀 점, 왜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지, 또 통일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봤다. 조금은 새로운 이야기들이 많아서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일 하며 여행하는 독일 커플
카롤린(26세)은 요가, 필라테스 강사다. 대학에서 건강 관련 공부를 한 뒤 인도에서 요가를 배우고, 중국 소림사에서 쿵푸까지 배웠다(이 대목이 놀라웠다. 소림사에서 영화처럼 극한의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필라테스는 독일에서 시작된 운동인 만큼 자연스럽게 요가와 병행해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어릴 적 벌에 크게 쏘인 적이 있어서 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벌이 많은 농장에서 일하기 쉽지 않을텐데, 응급약을 늘 가지고 다니면서 항상 열심히 일한다.
플로리안(25세)은 기계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다. 석사학위를 마치고 카롤린과 함께 긴 여행을 떠났다. 플로리안은 엔지니어답게 눈썰미와 일머리가 좋아서 일을 잘한다. 농사일을 이렇게 잘하는 외국인 봉사자를 오랜만에 만났다.
한국 사람들의 '열심히, 빨리빨리'도 금방 배우고 익혔다. 추석까지 이어진 폭염 속에서 가지와 고추 등을 수확하고 시금치, 유채나물, 마늘 등을 심었는데, 이 친구들 덕분에 폭염과 폭우로 이어진 이상기후를 버텼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기 시작해 계속 함께 하고 있다는 이 부지런한 커플은,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대신 농장을 찾아가 일을 하며 여행을 한다. 아이슬란드 농장에서 4개월, 스위스 농장에서 1개월을 봉사하며 지냈다. 각각 서로 다른 문화를 비교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한다.
싱글맘이 많고 온천과 폭포가 많은 아이슬란드, 여러 모로 시스템이 좋아 나중에 살고 싶다는 스위스, 역사를 간직하면서 초현대적으로 발전한 한국의 모습 등 여행하면서 많이 배운단다. 한국을 두 달 째 여행하고 있는 이 친구들에게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여행하기 전과 후에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한국 드라마와 음악을 정말 좋아하고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베를린에서 트와이스 콘서트에 참석한 적도 있었어요. 한국은 독특한 역사와 색다른 음식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여행하게 되었어요. 한국말에도 관심이 있어서 독학으로 6개월 동안 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카롤린)
사실 저는 한국을 여행한 뒤 한국에 대해 실망할까 두려웠어요. 미디어 속의 낭만적인 모습만 보아온 게 아닌가 하고요. 하지만 여행하고 나서 한국을 더 좋아하게 됐어요. 현대적인 도시와 전통문화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고, 근면하게 사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 좋아요, 특히 유럽에 비해 한국은 훨씬 안전해서 편안해요."
"저는 주로 한국의 새로운 기술과 문화 측면에서 얼마나 발전했는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보니 식당에 가도 단말기로 주문을 하는 등 새로운 것들이 많았고, 독일의 대중교통보다 버스나 전철이 훨씬 편리하고 저렴해서 좋았어요." (플로리안)
채식 음식 주문하기 어려운 한국 식당
최근까지 이어진 이상기후 폭염은 충격적이었다. 9월 중반을 훌쩍 넘어갔는데도, 아침부터 밤까지 땀을 흘렸다. 이런 이상기후를 불러온 것은 무엇일까? 온실가스로부터 시작된 지구 온난화가 가장 큰 원인이다. 특히 화학농과 육식산업이 많은 온실가스를 만들어온 것이 사실이다.
지구를 오염시키는 온실가스의 10~50%가 화학농과 축산업으로부터 나온다는 보고도 있다. 이런 환경 오염을 막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되고 있다. KBS 뉴스(7월8일)에 따르면 독일 인구의 10%는 채식을 하고 있으며, 46%는 될 수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유연한 채식주의자라고 한다.
"14살 때부터 채식주의자가 되었어요. 동물복지와 환경 보호를 위해 채식을 시작했죠. 제가 처음 채식을 시작할 때만 해도 식당에서 채식 메뉴를 주문하기가 어려웠는데, 최근에는 한결 쉬워졌어요. 베를린처럼 큰 도시에 가면 채식 메뉴가 있는 식당들이 아주 많아요. 하지만 한국을 여행하는 동안 채식 음식을 주문하기가 무척 어려웠어요. 거의 김밥을 주로 먹었던 것 같아요. 고기를 빼달라고 주문하는 법을 차차 배워가고 있어요." (카롤린)
한국에는 사실 채식 메뉴가 많지만 주문하는 것이 쉽지 않다. 고기나 해산물을 좀 빼주기만 하면 되는데 식당에서는 짜증을 내거나 귀찮아 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음식을 골고루 먹지 않으면 편식을 하는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편견이 있어서다. 조금씩 바뀌어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은 300여 가지의 채소를 먹는 채식의 나라였다. 채소의 맛을 느끼고 아는 나라다. 서구 문화가 들어오면서 고기를 폭발적으로 먹게 되었지만, 비빔밥, 콩국수, 감자전, 된장찌개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 중에선 아직도 채식 요리가 많다.
한국에 사는 한 영국인 채식주의자 친구는 한국에서 비건식당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가격도 비싸고 자신이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아닌 이상한 외국요리를 팔아서 싫다고 한다.
단골 식당에 가서 "고기와 해산물을 빼주세요"하면 다양한 채식 한국 요리를 먹을 수 있다고. 계속 채식주의자 친구들이 많이 와서 우리도 자연스럽게 농장에서는 채식을 하게 됐다. 바로 수확한 유기농 채소로 식단을 차려 먹으니 환경에도 건강에도 좋다.
통일을 완성해가는 과정에 있는 독일
자연스럽에 이야기는 통일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사실 우리는 완전히 통일 문제를 잊고 사는 것 같다. 굉장히 중요한 주제인데도 말이다.
"만약 독일이 통일되지 않았다면 동독은 공산주의 국가고, 북한과 비슷했을 것 같아요. 여행도 자유롭게 못하고, 국가에 대해 나쁜 말을 하면 감옥에 가야 하고, 커피, 초콜릿, 오렌지, 바나나 등도 자유롭게 구입하지 못했을 거예요. 사실 우리는 원래부터 하나의 독일이었고 우리 모두는 자유와 평화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통일되지 않은 동독에서 평생을 살았다면 별로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플로리안)
"하지만 통일된지 30년이 지났는데도 동부지역 출신이라고 하면 차별을 받아요. 제가 어릴 때 먹던 동독 음식 중에는 서독 음식과는 다른, 질이 떨어지는 음식들이 많았는데, 당시 초콜릿 같은 비싼 재료 대신 값싼 재료로 식품들을 만들다보니 그런 음식들이 생겨났던 것 같아요.
19살 때 대학 공부를 위해 서독으로 이사를 갔는데, 200명의 학생들 중 저를 포함해 단 두 명만 동독 출신이었어요. 그때 저는 '이곳에서 내가 완전히 외부인이구나'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요. 사람들은 제 동부지역 말투나 색다른 문화를 놀리거나, 이국적인 사람으로 취급할 뿐이었어요. 결국 저는 1년 만에 동독으로 돌아왔지요. 아직도 동부지역은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못해서 가난합니다." (카롤린)
"제가 지금 독일 남부지역으로 가서 엔지니어로 일을 한다면 동부지역에 비해 거의 두 배의 월급을 받아요. 아직도 완전한 통일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부지역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극우성향입니다. 우려스러운 일이에요. 하지만 아직도 통일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도 통일을 위해서는 독일에서 시행착오를 겪은 일들을 참고해서 점진적으로 통일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플로리안)
실제로 최근 치러진 동부 지역 튀링겐 주의회 선거에서는 극우 성향의 독일대안당(AfD)이 득표율 32.8%로 제1당이 됐다. 카롤린과 플로리안 고향인 작센 주의회 선거에서도 AfD는 근소한 격차로 2위(30.6%)를 차지했다. 나치 이후로 처음으로 극우 정당이 지방의회를 장악한 사건이라며 우려했다.
통일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카롤린과 플로리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꼭 필요한 일이구나 싶었다. 통일이 되면 북한의 노동력과 풍부한 천연자원, 남한의 첨단 기술이 하나가 되어 부강하고 평화로운 나라가 될 터.
독일은 남녀가 거의 평등한데, 한국은...
한국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독일과 다른 차이점을 물었다.
"한국은 자연이 아름답고 사람들이 정말 친절해요. 의료시스템도 좋고, 독일보다 범죄율도 적어서 밤 늦게 다녀도 안전하게 느껴져요. 제가 한국에서 특히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카페입니다.
한국에는 어디에나 매우 독특한 카페가 있는데, 독일보다 저렴하고 아름다운 인테리어와 고품질 커피를 제공해줘서 좋아요. 한국과 비교했을 때 독일에서 제가 좋아하는 점은 남녀가 거의 평등하다는 점이에요. 한국에서는 여전히 여성의 권리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들었어요." (카롤린)
외국 친구들도 현재 한국에서 성평등 문제가 중요한 이슈라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실제로 한국은 남녀 임금격차가 2022년 기준 31.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중 꼴찌다. 똑같이 일하고 남자가 100을 받을 때 여자는 68.8을 받는다. 독일은 13.5%로 22위다.
"풍경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데 한국의 푸른 산과 구불구불 아름다운 강이 있는 풍경이 보기 좋아요. 거의 모든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창의적인 조명 디자인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습하고 극한 더위에 깜짝 놀랐어요. 독일에도 사계절이 있지만 한국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아요. 이밖에 한국에 비해 독일의 교육 시스템은 경쟁이 치열하지 않고 안정적이라 좋아요. 독일의 근무 문화도 더 느긋한 편이구요." (플로리안)
이 친구들은 이제 다음 달이면 일본으로 넘어간다. 일본에서도 여행자네트워크를 통해 여행을 하려 하는데, 채식주의자를 받아주는 호스트를 만나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대마도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일본 친구네 가족과 연결을 시켜줬다. 앞으로 일본을 여행하면서 이 친구들이 또 어떤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될까. 아직 젊고 생각도 깊은 친구들이라 여행하며 많이 배우고 더 행복한 인생을 살 것 같다.
"12월까지 여행을 계속하고 독일로 돌아갈 예정이에요. 그리고 앞으로 어디에서 살지 생각해보려구요. 독일 동부에 머물고 싶지는 않고, 다른 지역이나 스위스에서 직장을 구해서 사는 것도 고려하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 한국을 꼭 다시 방문하고 싶습니다. 그때는 한국말을 더 열심히 공부해서 편안하게 여행할 거예요. 거리에서 낯선 이방인인 저희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신 한국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꼭 다시 만나요!"
소외된 독일 동부 지역에서 온 카롤린, 플로리안을 통해 또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됐다. 독일이 통일이 되었지만 아직은 온전하게 하나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 살짝 서글펐다. 하지만 통일을 통해 더 부강하고 좋은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 한국도 점진적으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특히 역사의식을 가지고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독일 청년들이랑 함께 지내며 더 나은 삶과 사회는 어떤 것일까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자기만의 멋진 색깔을 가진 청년 카롤린과 플로리안의 여행길이 더 행복하기를, 앞으로 계속 멋진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