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3세로 대학 때 '조선어'를 공부했죠. 한국 전통문화를 알고 싶었거든요. 일본인이지만 위안부를 바로 보려는 이들이나 훌륭한 한국 문예인들을 알게 됐고요. '전태일의 노동'을 두루미 춤으로 표현하고요. 겸재의 완벽함과 추사의 허술한 아름다움, 제 작품에도 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지속가능한 인형극인, 이를 위한 국제연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스물다섯 번째 주인공 고규미(59·여) 인형극인의 말이다. 27일 용문(양평)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한국의 중견 인형극인으로 서기까지의 삶과 활동, 그리고 미래를 이렇게 들려줬다. 재일교포 3세로서 한국말 어눌함을 넘어서는 '산 역사' 이야기는 감동에 가까웠다.
그는 극단 '상사화'(1997년 일본서 창단, 국내에는 3년 전 법인 등록) 대표로 1인 인형극을 하는 예술인이다. 애초 인형극보다 '표현자'(퍼포머) 또는 '1인춤'으로 시작했지만, 일본 최고의 극단 및 연출가 도움으로 14년간 1인 인형극을 했고, '어려운 예술'(인형극을 그는 이렇게 표현) 그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했다.
"상사화로 이름 지은 건 분단된 조국이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이 꽃과 닮았다는 생각에서였죠.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의심하고 다투는 모습이 안타까웠고요. '그리워하는 꽃, 상사화' 1인 인형극도 그렇게 탄생했지요."
재일교포3세 한국유학 뒤 인형극 길로
그의 1인 인형극 역사 맨 아래엔 문화운동이 있다. 대학 때 조선어를 공부했다. 가르치는 곳이 많지 않아 국립학교 한국어 교사가 되려던 것. 교수(객원) 중 한국 판소리 연구가 등이 있어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졌고, 결국 한국에 2년을 유학하기도 했다.
"대학과 지역사회 문화활동가를 조직하고 풍물과 춤을 가르치는 일을 했죠. 한국 노래 음원을 제작하고 일본에 보급하기도 했고요. 민예총이나 극단 아리랑(김명곤 단장), 한국의 명창(성우향 등) 등을 알게 됐죠. 2년 유학 때 문화패 활동과 마당극, 그리고 연희 등을 배웠어요."
일본으로 귀국해 일자리를 찾다 오사카 유명 인형극단 '쿠라루테'에서 시간제 일자리(미술)를 얻었다. 1년여 임시직 뒤 정단원이 됐다. 1인 인형극 길에 들어선 것. 오사카, 교토, 나라 초등학교(그가 출연하는 연극은 고학년 대상)를 4년간 순회하며 1주일에 5~6일씩 무대에 섰다.
이후 독립을 선언했는데, 후지타 아사야 연출(극작) 작품 '보타야마에 핀 무궁화들'(일본 한 탄광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이야기) 객원 배우로 발탁됐다. 풍물을 할 줄 아는 배우를 구해 그가 선정된 것. 10여 년 전국을 공연하고 다녔다.
"후지타를 만난 건 행운이었죠. 일본연출가협회장 등을 역임한 그는 위안부 강제연행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거짓말쟁이 여자, 영자'(1995년과 2014년, 일본·한국 등에서)를 무대에 올린 분이죠. 윽박지르지 않고 친절하게 가르쳤어요. 아름다운 일본어 희곡을 쓰기도 했고요."
그는 1인 인형극 배우를 하며 짬 나는 데로 1인극(배우가 몸으로 하는) 공연도 했다. 공주아시아일인극제 등 한국에서도 여러 번 초청 무대에 섰다. 2003년엔 아예 서울로 이주했다. 조국이고 한국적(65년 이후 취득, 이중국적이나 국적변경 안 함)이니 거리낄 게 없었다.
상명대에서 4년간 강사(연극학과 아동청소년극)를 맡았다. 연극제나 극장엔 공모로 한 달에 4~5번 무대에도 올랐다. 노인복지관, 도서관, 학교 등 초청공연도 이어졌다. 5년여 서울살이 끝에 2008년 양평 양동으로 이주했다. 싸고 넓고 조용한 매력에 끌려서였다.
한국 공연작은 '흥부와 놀부', '구렁덩덩 신선비', '날개옷 전설'(선녀와 나무꾼), '서로 그리워하는 꽃, 상사화' 등이다. 전태일 분신과 재봉노동자 이야기를 담은 '불새의 춤'(이원수 작, 창비 출판)이 인기를 끌며 '두루미 1인 인형극'도 완성했다.
일제 강제동원과 위안부 진실을 찾아
"2023년 '달빛 아래 소녀'(극단 상사화 '미라클프로젝트' 작품 중 하나, 위안부 이야기) 공연 때죠. 마지막 대사 '이 아이의 손을 잡아주세요'를 외치자, 모든 관객이 손을 내미는 거예요. 한 어머니(아이와 함께 온)는 '안아주고 싶다'고 다가왔고요. 뭉클했지요."
두루미는 고고한 선비의 기상. 조선시대 문관 흉배 문양으로 쓰인 것도 그런 까닭. 그래서 학반이라 했다. '청담동 두루미'는 현대적 은어. 드라마 '모래시계' 주제가도 '백학'이다. '육신은 진창에서 죽더라도 영혼은 하늘 백학처럼'(러시아 전사자를 추모할 때) 노래했다. 이름은 울음소리를 땄다. 우리는 '두루', 일본은 '츠루'. 7월 몽양추모제 때 두루미 춤사위(1인 인형극)로 선생의 고귀한 뜻을 전했다.
그는 한국에서 한국인형극협회 이사, 세계인형극연맹 한국지부 이사, 한국민속춤협회 이사 등을 맡으며 '한국인형극100년사'를 편찬(3인 공동저작, 2022년)했고, 아시아(한국, 중국, 캄보디아, 인도, 인도네시아, 미얀마) 전통인형극아카이브 기획전(2022~2023년, 춘천인형극박물관)을 주도하기도 했다.
포르투갈, 인도, 불가리아, 체코, 벨기에, 중국, 대만 등 해외 공연도 했다. 한국 전통 정서와 아름다움 담은 '퍼펫 환타지' 연작 '나비오마주', '선녀춤', '두루미의 흥과 멋의 시나위', '할아버지 얼씨구', '작은 인형들의 세상', '꽃의 환생' 등을 무대에 올렸다.
그의 국제활동은 인형극인 국제연대 '가상 인형극 거주지 바다'로 이어졌다. 인형극인들이 지구 문제를 깨닫고 어떤 노력을 할지 모색(1단계), 프로그램(2단체), 영상공유(3단계, 현재), 과제선정(4단계), 총회 제안(5단계 세미나 발제, 내년 춘천서 열리는 세계인형극연맹)하는 활동. 마카오, 싱가포르, 한국, 인도네시아, 인도, 네덜란드 등이 참여하고 있다.
그는 한국미술협회 회원이기도 하다. 인형작품을 만들어야 하기에 전통공예분과(목공) 활동을 해왔다. 한국예술대전에서 '초대작가상'(예총회장상)을 받는 등 각종 예술경연에서 20여개 상(입선, 장려, 우수, 특선)을 받기도 했다.
한국 인형극 상황을 묻자, 전통인형극이 있지만 보급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물론 일제강점기 때 자료들이 상당부분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일본은 '인형의 나라'답게 지역마다 인형극이 있고 잘 보급되고 있다고 했다.
"사료를 뒤져보면, 당나라가 고구려 몰락 때 인형극인을 대거 끌고 갔다는 기록이 있어요. 중국은 꽤 많은 인형극 전통을 가지고 있거든요. 당시 고구려 인형극이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죠."
'세한도' 허술함 속 아름다움에 반해
양동에서 홀로 사는 그는 재일교포 3세. 제주가 고향인 외조부모가 오사카에서 어머니를 낳았고, 그와 언니도 오사카 태생. 홀로된 어머니(외가쪽)와 산 기억밖에 없는 그로서는, 할아버지 별명이 '토재비'(제주 사투리 도깨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활동)였다는 것과 아버지가 '꽃을 좋아했다'는 걸 엄마한테 들은 것 외 아버지 쪽 가정사를 모른다고 했다.
"일본에 귀화하지 않은 건 강제 점령국(가해자) 국적을 갖기 싫어서였어요. 어머니도 언니와 저도. 아버지 없이 홀로 생계를 꾸린 엄마 생각하면 많이 아프죠. 언젠가 저희에게 '난, 돈 걱정 한 번도 안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낙관적 사고를 저도 받았나 봐요. 가난했지만 행복했다고 기억해요."
존경하는 한국 예술인으로 겸재와 추사를 꼽았다. 금강산전도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림 안에 모든 게 있기 때문이라 했다. 인형극 작품을 만들 때 그도 늘 그런 생각을 한다고 했다. 추사의 세한도에선 집과 나무를 보며 허술함 속 작품성에 감탄한다고 했다.
'붕가붕가'라는 말이 있다. 20세기 초 반전평화운동을 했던 버지니아 울프 이야기다. 제국의 거함거포주의(침략전쟁 이기려고 큰 함선, 큰 포 각축) 조롱이다. 그와 친구 5명이 에티오피아 왕족으로 가장해 전함 드레드노트(영국이 자랑하는)에 들어가 사열을 받은 사건으로 영국이 발칵 뒤집혔다. 말문이 막히면 '붕가붕가'를 외쳤는데, 들키지 않았다. 그는 수필 '자기만의 방'으로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페미니즘 을 1백여년 전에 외쳤다. 이역만리에서 두 딸을 키워낸 엄마, 조국에 와 1인 인형극으로 역사와 진실을 전파하는 딸. 기억해야 할 여성들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저널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