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바로 이거야. 이거 뭔지 너무 알 것 같아. 나도 이런 적 있었어.'
그런 순간이 있다. 남의 고통을 마치 자기 것처럼 느끼는 순간. 우리는 종종 책을 읽다 그런 경험을 한다.
장강명 작가는 그런 순간을 "희귀한 경험이고 이상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감동을 느끼는 건, 어떤 신호라고. 내 마음이, 이 책 속에 나오는 인물의 고통 때문에 움직였다면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골똘히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장강명 작가는 <리어왕>을 읽고 이런 신호를 감지했단다.
지난 8월 말 영등포 아트홀 2층 전시실에서 장강명 작가의 북토크가 열렸다. 코레일유통·영등포문화재단이 함께 주최한 행사로, '일상 속 책 읽기 문화 조성'을 취지로 마련됐다. 작가는 '인생 질문, 문학도서'를 주제로 해서 이날 모인 참여자들과 함께 '문학과 친해지는 방법', '우리가 문학을 만나는 이유' 등에 관한 진솔한 얘기를 나눴다.
앞서 <한국이 싫어서>, <당선, 합격, 계급> 등으로 한국 사회의 이면을 예리하게 파헤친 베스트셀러 작가 장강명. 문학으로 시대의 맥을 짚고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작가. 그는 이날 문학의 효용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고통이 있다면 그걸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덧붙여 과거 <리어왕> 서평을 썼던 걸 언급하며, 자신이 리어왕에 공감했던 이유로 '늙고 약해져 버려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얘기했다.
작가지망생인 나는 이날 북토크 참석에서 작가를 만난 뒤 인터뷰를 따로 요청했다. 약 2주가 지난 9월 16일, 화상 인터뷰로 작가를 다시 만났다.
여전히 외로운 사람들... "지역 독서공동체가 해결책 중 하나"
- 강연에서 작가님은 과거 고전 <리어왕>
을 읽고나서 '늙고 약해지고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언급하셨죠. 이런 두려움 없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아마 모든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일 거예요. 우선 지역 공동체가 활성화돼야 합니다. 노년층의 경제적 어려움도 해소해야 하죠. 다행히 한국 사회는 이 부분에서 진전을 보이고 있어요. 노령연금 같은 제도가 확대되고, 기초생활보장제도도 잘 운영되죠."
- 한국의 노인 복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국도 복지국가의 문턱에 들어섰다고 봅니다. 노령연금 도입 후 노인 자살률이 크게 줄어든 것을 보면 그 효과를 실감할 수 있죠. 경제적 안전망은 어느 정도 갖춰졌지만, 다만 외로움을 해결하는 지역 공동체 문제는 아직 과제로 남아있어요. 저는 지역 독서 공동체가 그 해결책 중 하나라고 봅니다."
- 멋진 노년을 맞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건강, 경제적 안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해요.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경제적으로 준비하며, 건강 관리에 신경 써야 해요. 사회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사회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진 않아요. 결국 개인이 스스로 해결할 부분도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이날, 장강명 작가는 삶의 여러 과정에서 개인의 주도적인 노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사회가 제공하는 제도나 환경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작가로서의 길은 긴 여정이기에, 주변의 평가나 성공에 조급해하지 말고 자신만의 속도와 방향을 유지하며 꾸준히 성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지칠 땐 낮잠... "아직도 제 글쓰기 실력은 성장하고 있습니다"
-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소설가는 젊은 나이에 성공하는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소설은 수학이나 음악처럼 천재성으로 승부하는 영역이 아니에요. 경험과 꾸준히 쌓은 실력으로 승부하는 곳이죠.
전성기도 50~60대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요. 이건 장거리 마라톤입니다. 조바심 내지 마세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글쓰기 실력이 늘고 있는지, 무엇을 쓸 것인지에 집중하세요."
- 본인의 글쓰기 여정을 돌아보면 어떠한가요?
"데뷔 14년 차인데, 제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아직도 제 글쓰기 실력은 성장하고 있거든요. 한국 문학계나 출판계가 젊은 작가 위주로 조명하는 경향이 있어 안타까워요."
- 소설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뭔가요?
"저는 취재 전에 항상 작품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 고민합니다. 최근 단편소설 주제로 쓰려고 전세 사기 사건을 취재했는데요. 한국의 부동산 시장이 얼마나 기이한지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나요?
"소설을 쓸 때 제가 집중하는 네 가지 테마가 있는데요. 우선 '월급 사실주의 동인' 활동입니다. 동시대 한국사회에서 먹고 사는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을 사실적으로 다루는 작가 모임이죠. 월급 생활자의 현실을 문학으로 풀어내며,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과 계층 문제를 작품 속에 반영하려고 합니다.
AI와 같은 기술이 삶에 미치는 영향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표백>이나 <재수사>에서 담으려 했던 것처럼 신의 죽음과 윤리의 확장도 제가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 중 하나예요. 마지막으로 독서 생태계 문제입니다. 소설로는 한 권 정도 쓸 것 같고, 나머지는 논픽션이나 에세이일 것 같아요."
- 작가님이 내신 여러 저작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뭔가요?
"<산 자들>입니다(2019년 작). 2010년대 한국 사회의 노동과 경제 문제를 드러내는 10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연작소설이예요. 2편도 내년즈음 낼 것 같아요. 3~4년에 한 번씩 <산 자들> 연작을 쓰고 싶습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이요."
- 작가님은 글을 쓰시다가 지치거나 힘들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글 쓰다 보면 머리가 좀 멍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주로 웹 서핑을 하는데, 오히려 더 피곤해지더라고요. 요즘에는 낮잠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합니다. 가끔은 '이게 다 뭐하는 짓일까? 아무리 써도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
그럴 땐 책을 읽거나 아내와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다스립니다. 우울한 생각에 못 헤어나오는 때도 있었는데, 약도 먹고 정신과도 찾아가며 잘 극복했습니다."
- 스스로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이 언제인가요?
"어렸을 땐 제가 좀 비겁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기로 약속하고 장거리 연애를 했던 경험이나, 새로운 도전을 위해 이전 직장을 그만두고 기자 시험을 준비했던 경험이 자랑스러워요.
남들이 다 안 될 거라고 했던 일을 스스로 결단을 내려서 이뤄냈다는 사실이 힘이 돼요. '나는 그 정도 인간은 된다', 이런 생각이 들었죠."
2011년 데뷔한 그는 여전히 '더 나은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앞으로 써 내려갈 이야기를 확장하고 싶다고. 또 그만의 속도감, 리듬, 명료함을 유지한 채로 언어의 섬세함을 더 키우고 싶어 지금도 필사를 한단다. 그가 덧붙였다.
"인생 표어는 '항상 미소를 잃지 말자'예요. 왼팔 위쪽에 문신으로 새겼어요."
장 작가는 특히 제임스 M. 케인의 직접적이면서도 시적인 기운과 줌파 라히리의 아스라한 정서를 배운다고 했다. 둘의 테크닉 모두를 익혀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내는 것이 요즘 그의 목표다.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글을 쓰고자 하는 그의 열정은 여전히 식을 줄 모르는 듯했다. 그가 맞이할 전성기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잡지교육원에서 취재기자/미디어에디터 양성과정을 수강 중입니다.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