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로 칭찬 받은 적은 없었어요."
14년 차 성우 심규혁씨의 말이다. 그러나 성우여도 목소리가 타고날 필요는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감정을 담아 활자를 소리로 바꿔 전달하는 직업. 그것이 성우다.
심씨는 미소년 캐릭터로 유명하다. 2010년, 29살에 데뷔한 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미도리야 이즈쿠, <날씨의 아이> 모리시마 호다카, <웡카>(2023) 윌리 웡카(티모시 샬라메 전담), <스파이더맨>시리즈 피터 파커(톰 홀랜드 전담), <알라딘>(2019) 알라딘, <리그 오브 레전드> 에코, <원신> 소, <신비아파트> 현우 등을 연기했다. 오디오 북, 오디오 드라마, 광고에서도 활발히 활동한다.
그는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목소리가 하는 일>(스몰이슈, 2022)에 이어 지난 7월 <너의 목소리가 세상에 울려퍼지도록>(자음과모음, 2024)을 출간했다. 그는 독자에게 처음부터 재능을 타고날 필요는 없으며,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희망의 메세지를 주었다.
출간일로부터 약 두 달이 지났다. 9월 11일, 녹음을 끝내고 돌아온 심규혁 성우를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책 내용을 바탕으로 성우로서의 마음가짐에 대해 인터뷰했다.
친숙하면서도 낯선 직업, 성우
우리는 성우의 목소리를 늘 가까이 접한다. 성우에겐 목소리란 악기이자 서비스다. 애니메이션, 영화 같은 미디어 뿐만 아니라 ATM 같은 기기의 안내, 공연 안내 멘트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성우라는 직업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배우와 성우는 무언가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잖아요. 심규혁 성우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성우는 목소리만 뽑아 써요. 하지만 목소리는 행동하지 않으면 표현이 되지 않아요. 사실감을 위해선 호흡이 더 중요해요. 아플 때나 먹을 때처럼 일상적인 호흡을 의식하진 않잖아요. 예를 들어, 고통을 느낄 때 어떤 호흡이 나오는지 인지하기 위해서 실제로 벽에 부딪혔어요. 그래서 훈련할 때 많이 고생했어요. 이렇게 연습하는 방법이 배우의 연습과 다를 수 있어요."
-원래는 작가를 꿈꾸셨다고 하셨는데, 성우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고등학생 때 문예반에서 활동했어요. 대전 소재의 백일장에서 성과가 나서 서울권 대회에 나갔지만 상을 타지 못해 큰 벽을 느끼고 방황했어요. 목표를 상실한 채로 대학교에 진학했고 친구 따라 대학 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지원했어요. 오디오 테스트를 봤는데, 마이크를 통해 제 목소리를 들으니 생각보다 괜찮은 거예요.
우연히 재능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어렸을 때 인형놀이를 하면서 남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놀았고 더빙영화도 많이 봐서 알게 모르게 경험이 쌓였더라고요. 원래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인데, 연기는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8년이라는 긴 시간을 준비하며 고민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끊임없이 도전하게 만든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8년 중 일부분은 독학하고, 오디오 드라마 제작 같은 연기 관련 활동을 하면서 자질이 있는지 고민했어요. 대학교 졸업할 때 제 나이가 26~27살이었는데, 딱 30살까지 도전하고 안 되면 그만두자고 결심했어요. 그리고 29살에 공채에 합격했습니다."
-지망생 때 목소리 칭찬을 받지 못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성우가 되기 위해선 목소리가 타고날 필요가 없나요?
"성우라고 하면 목소리가 좋아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어요. 얼마 전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 DJ분이 '역시 성우 목소리는 다르다'라고 칭찬하시더라고요. 하지만 같이 일했던 스태프들은 '목소리가 성우 같지 않은 것 같다'거나 '목소리가 특별하지 않다'고들 해요."
-그런 상황에서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이상했어요. 본인이 듣는 본인 목소리는 몸 안에서 울리기 때문에 왜곡되어 들려요. 다른 사람이 듣는 내 목소리는 다르죠. 객관적으로 목소리를 듣기 위해 직접 컴퓨터에 녹음해서 들었어요. 평소 목소리와 다르다고 인식하니까 어떻게 캐릭터를 표현하는지 많이 연구했어요."
-자신의 객관적인 목소리를 파악하는 것이 연기할 때 얼마나 중요한가요?
"분석한 캐릭터의 맥락을 모두 표현할 수는 없어요. 목소리는 주관이 많이 개입돼요. 예를 들어서 냉정한 연기를 했는데 누군가는 따뜻하게 받아들여요. 자신을 깨닫지 못하면 엉뚱한 길로 갈 수 있어요. PD는 음색만 듣고 판단하지 않아요. 연기자의 습관과 성격에 따라 연기가 달라져요. 그래서 각 상황에서 어떤 톤으로 반응하는지 말하는 습관을 인지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잘 아는 게 어려울 텐데, 다른 사람의 피드백도 필요할 듯합니다.
"맞아요. 주변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예민하게 받아들여요. 실제로 선생님들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너는 평소에 표정이 없어'라고 하셨어요. 실제로 제 얼굴을 보니 표정이 별로 없더라고요. 이후 거울을 수시로 들여다봤어요."
-표정이나 감정을 하나하나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맞아요 예를 들면, 피드백을 받고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하고 넘기기보단 '내가 왜 기분이 나빴을까?' 한번 더 생각해요. 그래서 감정일지를 써요."
감정은 알 수 없는 존재... '잘' 읽고 써야 한다
-평소 어떤 부분에서 영감을 받나요? 다른 활동에서 뜻밖의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다면요?
"독서요. 전혀 관련이 없는 '책'이 의외의 해답을 줘요. 최근에 취미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요. 제대로 공부하려고 사진 관련 책을 읽었는데 연기랑 비슷한 부분이 많았어요. 사진을 찍으려면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나만의 시각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더라고요. 대본도 마찬가지예요. 이 캐릭터가 왜 여기서 이런 말을 했는지,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분석하면 성격이나 캐릭터가 잡히니까요.
독서는 기본이지만, 어떻게 읽는 지에 따라 맥락이 달라져요. 같은 글이라도 '국어책 읽기'식의 연기가 될 수 있으니 말투와 표현을 신경써요. 책이 아니더라도 대본이나 간판같이 주위에 있는 글자를 어떻게 내 생각을 말하는 것처럼 읽을지 고민합니다."
-감정을 목소리로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노하우가 있다면요?
"느끼는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해요. 표정을 다양하게 지어요. 적어도 편한 사람들과 있을 때 감정을 얼굴로 드러낸다면 목소리는 반드시 담기거든요. 그래서 한 번씩 스마트폰을 켜고 얼굴을 들여다봐요.
더빙 작품을 다룰 때 원어의 타이밍을 맞추는데 급해서 표정을 신경 쓰지 못할 수도 있어요. 대사의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캐릭터의 표정에 동화돼야 해요. 감정의 싱크를 맞추는 거죠. 다만 부작용도 있어요. 느끼는 것보다 크게 감정이 드러나요. 화낼 상황이 아닌데 감정에 몰입해서 정말 화낸 적도 있어요."
-그래서 감정일지를 쓰시나요?
"기록을 남기면 사라지지 않아요. 감정은 흐르기 때문에 관찰하기 힘들어요. 감정일지를 쓰는 것도 내 기분이 어떤지로 끝내지 말고 상황을 엮어서 써야 해요. 어떤 식으로 표출했고, 어떻게 느꼈고, 어떻게 해결했는지 쓰다 보면 감정의 원인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곳에서 나오더라고요.
예를 들어, 농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인데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서 예민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발견하죠."
-불안할 때는 어떻게 감정을 다스리시나요?
"감정을 완전히 컨트롤하는 건 불가능해요. 감정은 알 수 없어요. 감정이 왜 이런지 끝까지 파고들어서 원인을 찾을 필요도 있지만 때로는 사로잡히면 안돼요. 구분하긴 쉽진 않죠. 그래도 저는 최대한 감정을 마주하려 애써요. 상황을 회피하고 무시하는 행동 자체가 자존감을 엄청 떨어트린대요."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않으면 자존감이 흔들릴 수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지켜내셨나요?
"성과로 자존감을 채울 순 없어요. 도전 자체에 의의를 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저도 실패할까봐 많이 고민했지만 불안을 극복하고 도전했어요. 성우가 되지 못했더라도 도전했다는 사실에 대해선 후회하지 않았을 거예요. 입상하지 못했더라도 좋아하는 것에 도전했다는 행위 만으로도 의미 있어요."
결과에 연연하기 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선생님'이란 소리 들을 때까지 현업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싶어요. 신인 시절엔 목표를 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눈앞에 있는 일을 정신없이 헤쳐 나가느라 방향을 생각해두진 않아요. 평생 연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오히려 목표를 정하면 도전하기가 어려웠어요. 차기작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써야 할지, 몇 권 낼지는 정하지 않고 그냥 책을 쓰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하니까 글이 써져요. 꾸준히 쓸 기회가 생기면 좋겠습니다."
-성우를 꿈꾸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일하면서 느낀 깨달음이나, 목표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어떤 성과나 목표에 연연하지 말고 정말 이 일에 빠져들고 싶은지 체크해보세요. 성공여부로 삶을 판단하기엔 언젠간 실패의 순간이 오고, 성공한 사람이라도 언젠간 현업에서 떠나는 시기가 닥쳐요.
오히려 노력해도 안 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니 열심히 임했어요. 이게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면 자연스럽게 도전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