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칼 나의 피.
시골 출신 고등학교 2년생이 보기에는 너무도 섬뜩한 내용이었다. 청소년기 내가 살았던 지역의 한 종교단체에서 나눠준 그 책을 받아들고 페이지를 넘기다가 심장이 그대로 멎는 듯 정신이 혼미했던 기억이 난다.
조국 해방 후 1946년 10월 16일 해남에서 머슴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의 이름 김남주. 일자무식 머슴이었던 부친은 그가 글을 배워 면서기나 하면서 살기를 바랐다. 부친의 바람대로 그는 공부를 꽤나 잘했다. 그래서 전남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광주제일고등학교로 무난히 진학했다.
명문고를 졸업하고 대학을 나오기만 하면 면서기보다도 더 나은 삶이 보장되었던 시기, 양반집 머슴의 자식은 앞길이 훤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기대와 다른 삶을 향해갔다. 주입식 입시 위주의 교육에 신물을 느낀 그는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검정고시를 통해 어렵사리 대학이라는 곳의 문턱을 간신히 넘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서슬 퍼런 박정희 독재정권이 유신헌법을 만들어 경제개발을 명목으로 밤낮없이 국민들을 착취하고 있던 때였다. 애초부터 그의 본성은 시대에 순응하는 소시민으로서의 소양이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그는 전사(戰士)가 되어 독재정권을 향해 처절하게 투쟁하다가 15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감옥에서 담배 곽에 있는 은박지와 우유곽, 화장지 등에 칫솔을 뾰족하게 벽에 갈아 새겨 넣은 시들을 엮어 책으로 냈다. 나의 칼 나의 피. 여기에서 칼은 펜을 상징한다. 그의 시는 사람들의 가슴을 후볐다. 그의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민중의 외침이 되었고 혁명의 노래가 됐다. 그는 펜으로서 세상을 향해 외쳤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혁명시인이 되었다.
그를 기념하는 30주년 기념식이 전국에서 열렸다. 지난 2월 그의 기일을 맞아 광주전남작가회의와 김남주기념사업회 주최로 광주시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문학행사가 열렸고, 이어 한국작가회의와 익산문화재단 길동무가 공동으로 서울 종로 영풍빌딩에서 김남주 추모 서울문화제를 열었다.
지난주에는 3일 동안 그의 고향 생가에서 전국의 문인들이 모여 3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민주화의 열망을 품은 각 나라의 학자들이 행사에 참여해 국제 심포지엄도 개최하는 등 성황리에 진행됐다.
밤에는 해남문화예술회관 본관에서 김남주 일대기를 담은 뮤지컬 공연까지 그야말로 민주화의 성지가 된 느낌이었다.
감옥에서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출소 후 젊은 나이에 세상과 작별한 김남주를 추모하는 노제에서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황지우 시인은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시를 이번 행사장에서 다시 낭송한 황지우 시인은 오열하며 많은 참가자를 울게 했다.
지난달 해남 현산면 백포만 일대에서는 공재 윤두서 문화제도 열렸다. 올해로 16주년 행사인데, 여전히 공재 윤두서는 그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행사 주관은 해남민예총과 전남민예총이 함께했다.
민주화의 열망을 품었던 그들은 공재 윤두서 문화제를 주관한 이유가 있었다.
공재 윤두서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씨를 뿌린 사람이다. 공재 윤두서는 조선 사대부 위주의 화풍에서 벗어나 백성들의 삶을 조명했고 조선의 화풍을 바꿔 일대의 혁신을 이뤘다. 그는 그림의 이론서라고 말할 수 있는 화평(畵評)이라는 책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그대로 신지도의 원교 이광사에게로 이어졌다. 철저히 계급주의였던 조선 사회에 만민 평등사상을 주창한 두 사람은 조선의 양명학을 필두로 사회의 변혁을 꿈꿨다.
공재 윤두서가 조선의 양명학을 시작했다면 원교는 그것을 완성했다.
신지도에 유배 온 원교 이광사는 서결(書訣)이라는 서예 이론서를 남겼다. 그것은 단순한 이론서가 아닌 조선의 변혁 사상이 담긴 서책이었다.
공재 윤두서는 우리만의 화풍으로, 원교 이광사는 우리만의 글씨를 통해 동국의 세상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씨를 뿌린 조선의 혁명가였다.
한국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원교 이광사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이유를 생각한 적이 많다.
그래서 신지도에 있는 원교 이광사 적거지를 자주 찾아갔다. 다행인 것은 원교의 사상을 간직하려는 기념사업회가 그곳에 있었다. 이제는 원교 서맥전을 확장해서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문화 예술의 불모지가 되어버린 완도 땅에 이제는 사상가 원교 이광사의 뜻을 펼쳐 세상의 변혁을 꿈꿔 봄직하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