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정부 R&D 예산이 삭감된 이후, 정부는 일련의 'R&D 혁신 방안' 등을 내 놓으며 R&D 예산 구조조정의 명분을 설명하고, R&D 혁신방안 등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2023년 12월 발표된 '윤석열 정부 R&D 혁신방안'은 향후 정부 R&D 지원 방향을 총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이것을 기준으로 이후 기초연구, 산업·에너지, 중소기업 등 각 분야별 R&D 지원 및 혁신 방안이 제시되었다.
이번 기사에서는 이 중 정부의 중소기업 R&D 지원에 초점을 두고, 첫째, 2024년 중소기업 R&D 예산의 삭감 현황을 살펴보고, 둘째, R&D 삭감 이후 발표된 정부의 중소기업 R&D 지원 방향의 변화 내용을 살펴보고, 셋째, 이러한 정책 변화가 초래할 수 있는 문제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2024년 중소기업 R&D 예산의 삭감과 그 영향
2024년 정부 R&D 예산의 삭감으로 인해, 중소기업 R&D 예산도 크게 감소하였다. 2024년 중소기업 R&D 예산은 1조 4097억 원으로 전년 대비 4150억 원, 약 22.7% 감소하였고, 사업수는 13개로 축소되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단기현안, 유사성격 R&D를 구조조정 하였고, 그 결과 2024년 중소기업 R&D 예산이 감소한 것으로 설명한다(중소벤처기업부, 2024.1). 정부의 이러한 인식은 소위 '나눠먹기', '뿌려주기' 등 비효율적 정부 R&D 지원의 대표적 사례가 그간 중소기업 R&D 지원이었다는 평가와 비판에 근거한다.
문제는 R&D 예산 삭감은 필연적으로 기존 계속 과제의 예산 삭감, 신규 과제의 선정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우수한 기술역량을 갖추었지만 민간으로부터 자금 조달이 어려워 정부 R&D 지원이 꼭 필요한 중소기업에게 전해진다는 점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2024년 R&D 삭감과 구조개편 과정에서 폐지된 20개 R&D 사업, 2477개 기업 과제에 대해 2024년 예산을 50% 감액하였다(전자신문, 2024.1.31.). 감액 기업이 R&D 지속 수행을 희망하는 경우 3년간 융자를 지원한다고는 하지만, 융자 지원은 고스란히 기업 부담이기 때문에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실제로 계속 과제 예산 삭감으로 중소·중견기업이 R&D 과제 수행을 포기한 사례가 다수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중소벤처기업부가 지원한 정부 R&D 과제 수행을 도중 포기한 중소·중견 기업 수는 2021년 23개, 2022년 44개, 2023년에는 29개였으나, 2024년 1월에서 7월 사이에만 무려 175개로 전년 대비 6배 수준으로 늘었다(오마이뉴스, 2024.7.30).
2024년 R&D 예산 삭감 이후, 정부의 중소기업 R&D 지원 방향의 변화
2024년 6월 중소벤처기업부는 '중소벤처기업 R&D 혁신방안'을 발표했는데, 이를 통해 그간 중소기업 R&D 지원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평가를 확인할 수 있고, 아울러 윤석열 정부의 중소기업 R&D 지원 방향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그간 중소기업 R&D 지원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평가는 첫째, 기술 수준이 부족한 기업을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기업R&D 저변확대'에 치중해 R&D 지원의 방향성이 미흡하고, 둘째 2억 원 미만 소액과제 위주로 창업기업과 소상공인에 대한 기회부여(저변확대)에 치중해 사실상 연구인력 인건비 보조로 활용되는 '뿌려주기식' 지원이며, 셋째 성공할 수 있는 과제만 제안해 실효적 의미 없는 R&D 성공과제를 양산하며, 넷째, 예산확보를 위한 형식적 공동연구이며, 또한 수출을 위한 글로벌 R&D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평가에 기초하여 정부는 '저변확대'에서 '전략분야 육성'으로 정책방향 전환을 천명하며, 12대 국가전략기술분야와 탄소중립 등에 중소벤처기업부 신규 과제의 50% 이상을 집중 투입하고, 전략분야 외 과제에 대해서는 수월성과 혁신성을 중심으로 지원하고, 저변확대·기술보급·추격형 연구는 최소화한다는 계획을 제시한다. 아울러 중소기업 R&D는 2년·5억 원을 표준 지원으로 사업구조를 설계하여 소액·단기지원을 지양하고, 전략적 관점에서 글로벌 딥테크·해외연구소 등과 협업할 수 있는 글로벌 공동R&D를 지원하는 방향이다.
요컨대 그간 중소기업 R&D 지원은 관행적·보조금·보편적 성격의 R&D 지원으로 나눠주기(저변확대)·뿌려주기(소액지원) 지원이라는 평가와 비판으로부터, 윤석열 정부는 수월성, 혁신성, 전략성 중심으로 중소기업 R&D를 지원하고, 글로벌 협력 등을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정부의 중소벤처기업 R&D 지원의 역할과 R&D 포트폴리오 관리
일반적으로 기업에서 'R&D 포트폴리오 관리'(R&D Portfolio Management)란 기업 전체 관점에서 전략에 맞게 과제 분류별로 균형 잡힌 예산 투입을 계획하고, 이에 맞게 과제를 선정하고 조정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가계 살림에 비유하면, 여유 자금을 안정형 투자와 수익형 투자로 적절히 나누고 이를 통해 수익과 리스크 간 균형을 이뤄 단기 계획(생활비 마련)과 미래 계획(주택 마련)을 달성하는 것이다(LG Business Insight, 2012.8.15.).
정부의 중소기업 R&D 지원도 이와 같은 포트폴리오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 수월성, 혁신성, 전략성 등은 정부의 R&D 포트폴리오 전략 수립 시, 고려할 수 있는 중요 기준이다. 한편, 정부는 나눠주기·뿌려주기로 비판했으나, 전략성, 수월성의 반대 개념인 보편성, 균형성 등도 중요한 기준일 수 있다. 이는 중소기업의 성장 단계(창업기업 → 중소기업 → 중견기업)에 따라, 그리고 기술개발 역량 축적에 따라, 정책 목적이 다르고 중소기업의 정부 R&D 지원 수요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창업 초기 단계의 경우, 다양한 기술 아이디어의 구현 및 시장 검증이 중요하기 때문에 작은 금액이지만 넓게 창업 초기기업을 지원(소액 나눠주기·뿌려주기, 저변확대)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후 성장 단계 기업의 경우, 글로벌 시장 개척 및 시장 선도기술 확보가 중요하기 때문에 큰 규모의 금액을 전략을 갖추어 소수 성장 기업에게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시기 중소벤처기업부가 R&D 지원 유형 중 하나로 창업 초기 기업과 시장 미형성 산업 분야를 위해 저변확대 성격의 R&D를 포트폴리오에 포함하여 지원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정부의 중소벤처기업 R&D 지원 방향 변화에 대한 우려
문제는 R&D 예산 삭감의 명분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정부가 중소기업 R&D 지원의 저변확대적 특성을 축소하고, 수월성, 혁신성, 전략성만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정부의 중소기업 R&D 지원 포트폴리오가 왜곡되고, 결과적으로 혁신 성과가 낮아질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첫째, 신규과제의 50% 이상을 12대 국가전략기술분야 등에 투자하는 정부의 방향은, 국가전략기술분야에 포함되지 않지만 우수한 기술역량을 가진 중소기업이 적절한 수준의 정부 R&D 지원을 받지 못하는 소외 현상을 낳을 수 있다. 12대 국가전략기술은 반도체·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모빌리티, 차세대원자력, 첨단바이오, 우주항공·해양, 수소, 사이버보안, 인공지능, 차세대통신, 첨단로봇·제조, 양자 등을 포함하는데, 대체로 R&D 집약도가 높은 고기술 분야로, 이 분야에 참여할 수 있는 기존 중소기업도, 창업기업도 많지 않은 상황이다. 실제로 2019년 기준 제조창업 기술수준별 비중은 저기술(44%), 중저기술(26%), 중고기술(23%), 고기술(7%) 순으로, 중저기술 이하가 70%를 차지하고 있다(한국산업단지공단, 2022.11.29.).
둘째, 또한 국가전략기술분야 중심의 지원은 중소기업 R&D 과제의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정부가 원하는 '유행하는 연구'로 중소기업을 내몰 우려가 있다. 중소기업이 정부 R&D 과제에 참여하는 이유는 자금 확보의 목적도 있지만, 정부 과제 '참여 실적'(Track Record)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다. 이는 민간 투자기관의 투자자금 유치를 위해서는, 참여조건 또는 평가기준 중 하나로 정부 과제 참여 실적 등이 요구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규과제의 50% 이상을 국가전략기술분야 중심으로 지원하게 되면, 이 분야에 해당하지 않는 중소기업의 경우 정부 과제 참여 실적을 확보하기 위해 '울며겨자먹기'로 자신의 연구개발 분야를 국가전략기술분야에 맞추거나 또는 포장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정부 자금과 실적 확보가 필요한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R&D 주제를 선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액 금액의 다수 지원이라는 저변확대 전략에서, 큰 규모 금액의 소수 선도기업 지원이라는 집중 전략으로의 전환은, 자칫 중소기업 성장 단계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창업기업이 필요한 정부 R&D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이는 중소벤처기업부의 대표적 스타트업 지원 사업인 '민간투자주도형 기술창업지원'(팁스, TIPS) 프로그램의 예산 감소 및 지원 축소로 현실화 되고 있다.
팁스는 민간 투자 기관이 지분을 투자한 유망 기술 기업에 정부가 R&D 자금을 추가로 지원하는 제도로, 그간 실효성이 높은 스타트업 지원 정책으로 평가받아 왔다. 그런데, 중소벤처기업부는 올해 팁스 신규 사업에 약 1200억을 배정했지만 내년 예산안에서는 약 282억 원 감액한 약 918억을 배정했다. 아직 국회 심의 등이 남았지만 예산이 이대로 확정되면 팁스 선정 기업 수는 올해 900곳에서 700곳으로 줄어들게 되고, 정부 지원을 받는 창업 초기 기업 수가 감소할 수밖에 없다(서울경제, 2024.9.5.).
정부가 R&D 지원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 현황을 엄밀히 진단하고 이로부터 정책 개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필요한 역할이다. 그러나 '중소벤처기업 R&D 혁신방안'의 정책 변화는 정부의 중소기업 R&D 지원 포트폴리오를 왜곡하여, R&D 과제의 쏠림 현상과 단기적 성과만을 지향하는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대통령의 말로 시작된 2024년 R&D 예산 삭감 과정의 혼란을 겪은 이후, 얻은 교훈의 하나는 급격한 정책 변화는 충분한 숙의를 거쳐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정책 변화의 득과 실이 존재하는 경우라면, 이러한 숙의 과정은 더 깊고 폭넓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수월성, 혁신성, 전략성만을 강조하는 정부의 중소기업 R&D 지원 전략의 변화가 오히려 우수한 기술역량을 가진 중소기업이 적절한 수준의 정부 R&D 지원을 받지 못하는 소외 현상을 낳지는 않을지, 중소기업 R&D 과제의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정부가 원하는 '유행하는 연구'로 중소기업을 내몰 우려가 있지는 않을지, 중소기업 성장 단계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창업기업이 필요한 정부 R&D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하지는 않을지 면밀해 검토해야 한다. 정부의 아집과 오류로 R&D 기반 제조업 중심의 성장과 발전이 좌초되지 않을까라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