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Planet B(제2의 지구)가 없기에, Plan B(플랜 B)또한 없다." 기후위기와 관련된 유명한 표어 중 하나입니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끊임없이 성장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떤 플랜 A를 선택해야 할까요? 유일하고 유한한 지구를 함께 살아가는 행성으로 만들기 위한 지구를 위한 플랜 A를 제안합니다.[기자말] |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라는 요리사들의 요리 대결 예능이 대히트를 치고 있다. 요새는 어디를 가나 <흑백요리사> 이야기뿐이다. 심지어 가장 유행에 무감각한 친구까지도 <흑백요리사>를 보기 시작했다. 결국 나도 <흑백요리사>를 조금 봤다. 소문처럼 꽤 재미있었다. 요리도, 참가자들의 협력과 갈등도, 흑수저와 백수저라는 작명도 그랬다. 안성재 심사위원이 잘 익지 않은 요리를 보고 "이븐(even, 고르게)하게 익지 않았어요"라고 말할 땐 조금 웃기도 했다. 그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심사 방식이었다.
<흑백요리사>에서는 라운드마다 심사 방식을 다르게 설정한다. 그중 심사위원들이 눈에 안대를 한 채 오로지 맛과 향으로만 요리를 평가하는 방식도 있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라는 속담이 있긴 하지만, 제작진들은 안대를 쓰고 심사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라 판단한 모양이다. 제작진의 판단대로, 좋은 음식을 판별하는 제1의 기준은 맛일 수밖에 없다.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는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보기 좋지 않아도 맛있는 떡은 훌륭한 떡이 될 수 있지만, 보기 좋은데 맛이 별로인 떡은 훌륭한 떡이 될 수 없다.
음식의 모양을 보지 않고 심사를 진행하는 것에는 또 다른 장점이 있다. 음식을 만든 사람을 추측하는 것이 조금 더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훌륭한 '요리사'를 뽑는 예능이면 조금 달랐겠지만 <흑백요리사>는 훌륭한 '요리'를 만든 사람을 뽑는 예능이다. 요리를 만든 인물에 대한 역사, 혹은 편견, 개인적 감상, 사회적 명망이 안대와 함께 가려지며 음식 자체에 대한 평가가 더욱 선명해졌다. 비록 음식 자체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이 이 평가 방식을 매 회마다 고수한 것은 아니다. 하나의 기준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에는 세상은 원래 변수의 집합이고, 모든 것의 흥망성쇠는 정해진 기준보다는 때로 변수들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손님의 입장에서 음식을 평가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맛 외에 가격과 홍보 전략이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게 만들었고, 그 이전에는 팀전이라는 방식을 사용하여 리더쉽과 팀워크가 변수로 떠오르게 만들기도 했다. 매 회차마다 출연자들 간의 호흡과 인생 이야기, 성격과 태도는 크게 논란이 되거나 감동을 준다.
우리는 음식뿐만이 아니라 많은 것들을 때때로 평가하며 산다. 삶은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고, 무엇을 선택하기 위해서 평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것을 기준으로 두고 평가할 것인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하지만 수많은 변수 앞에 하나의 기준만 영원히 고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연함이다. '음식은 맛있으면 장땡'이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심사위원들에게 안대를 씌웠다면, 아마 쇼는 무척이나 재미없어졌을 것이다.
경제와 환경에 대한 연재 글에서 <흑백요리사>에 대해 이렇게나 길게 이야기한 것은 사실, 영국이 마지막 석탄화력발전소의 문을 닫은 사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사건은 '기후위기'라는 인류와 세상을 위협하는 변수가 밀려 들어올 때, 어떤 기준을 변경해야 할지를 잘 보여준다. 영국은 최근 석탄화력발전소의 문을 닫으며 굳게 믿고 있었던 몇 가지 것들을 폐기했다. 이제부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자.
석탄과 울타리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석탄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산업혁명은 '혁명'이라는 이름답게 인류의 생활 중 많은 부분을 바꾸었고, 정규 교육과정에서도 빼놓지 않고 소개하는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석탄으로 돌아가는 증기기관은 모든 분야에서 삶의 속도를 증가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산업혁명은 지금 시기의 사람들이 믿는 룰 '더 많이, 그리고 더 빠르게'를 만들어낸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빠른 속도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공유지에서 농사를 짓고 먹고살던 사람들이 지주들이 친 울타리 너머의 도시로 내쫓기지 않았다면, 도시의 공장들은 값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산업혁명의 룰이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에 우리가 쌓아 올린 많은 것들이 이 룰에 따라 만들어졌다. 많은 종류의 개발과 풍요라는 것은 자연에 울타리를 만들어 그 속에 있는 많은 삶들을 추방하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지금의 풍요가 자연에게 빚을 지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유도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울타리가 결국 울타리를 친 인간들의 삶까지도 위협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자연이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표현은 진실이지만, 때론 낭만적인 수사로만 여겨진다. 현실에서는 화석연료 사용도, 생물다양성 훼손도, 미래가 없는 것처럼 찍어내는 플라스틱도 인류의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으로 포장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더 많이 무엇인가를 만들어야 한다, 편리함만이 장땡이다, 위험은 시장 내부에서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다. 석탄과 산업혁명이 만든 좋은 경제의 기준이라는 것은 다 이런 식이다. 우리는 빨라졌지만, 그 대가로 장기적인 관점 대신 눈앞의 것들만 볼 수 있는 좁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영국이 석탄을 버렸다
그런데, 영국에서 지난 9월 30일, 마지막 석탄화력발전소가 문을 닫았다. 영국은 가장 먼저 석탄화력발전소를 만든 국가이자, G7 국가들 중 최초로 석탄화력발전소의 문을 닫은 나라가 되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인류 역사의 새로운 챕터를 연 후, 그 챕터를 닫고 새로운 챕터를 여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물론 영국이 석탄화력발전소의 문을 닫았다는 것만으로 완벽한 전환을 선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전히 영국은 30% 이상의 에너지를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하는 LNG에 의존하고 있고, 안전 이슈가 따라붙는 원자력 발전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석탄과 함께 인류의 속도를 대폭 증가시켰던 영국이 석탄을 포기한 것은 큰 상징성을 남긴다. 문을 닫은 석탄화력발전소가 청정에너지 센터이자 에너지 신사업 연구를 위한 비즈니스 센터로 변모한다는 점은 더욱 그렇다.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영국은 꽤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였다. 우선 탄소 가격의 하한을 정부 통제하에 두어 재생에너지가 가격 경쟁률을 높였다. 화석연료를 판매하는 것이 점점 효율적이지 못한 선택으로 바뀐 것이다. 석탄화력발전소를 닫는 과정도 여러 측면을 고려했다. 하루 아침에 모든 노동자들을 퇴출시킨 것이 아니라 10년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4년 전부터는 노조와 함께 전환 계획을 논의했다.
발전소가 문을 닫는 날에는 에너지안보탄소중립부 차관이 직접 노동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한 시대를 여는 일에 동참했던 노동자들은 사회의 과오를 과도하게 떠안고 사라지는 대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 앞장설 수 있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발전소를 닫는 과정을 함께 논의했고, 회사는 노동자들의 일자리 전환을 책임졌다.
석탄의 룰을 따르는 동안 인류는 끊임없이 울타리를 쳐서 무엇인가를 내쫓았지만, 막상 그 시대를 연 영국이 울타리를 열어 모두를 포용하는 방식으로 석탄의 시대를 종료한 사실은 꽤나 아름다운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영국은 울타리와 석탄을 없애는 방법으로 '더 많이, 그리고 빠르게'의 역사 대신 '더 정의롭게, 그리고 더 좋게"를 선택하는 경로를 선택했다.
석탄은 더 이상 '이븐'하지 않아
다시 <흑백요리사>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경제라는 요리를 평가할 때 '더 많이, 그리고 빠르게'를 기준으로 지정했다.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채택한 것은 화석연료와 울타리 치기였다. 산업혁명 시대부터 200년가량, 그 평가 기준은 변경된 적 없다. 문제는 우리가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변수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변수는 증기기관으로 달리는 기차의 속도만큼, 혹은 그보다 더 빠르게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것들에 치여서 죽지 않으려면 우리가 세운 경제의 기준 자체에 대해 생각해야 되는 처지에 놓였다.
영국과 다르게 우리나라는 새롭게 석탄화력발전소를 짓고, 전 세계 60개국이 참여한 탈석탄동맹에도 가입하지 않은 나라이다. 정의로운 전환에 관련된 정책적 상상력도 아직 부족하다. 전체 에너지에서의 재생에너지 비율이나 원전 이슈는 말할 것도 없다. 갈 길은 멀지만, 시간이 많이 허락된 것은 또 아니다.
우리나라도 우리가 선택한 것이 충분히 '이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가 왔다. 석탄도, 울타리도, 더 빠른 속도도 '이븐'할 수 없다. 그것들은 이제 인생의 드라마도, 반전의 묘미도, 삶의 재미도 가져올 수 없다.
오히려 의미 있는 이야기는 가장 먼저 석탄을 사용한 나라가 석탄을 폐기했다는 소식에 가깝지 않을까. 더불어 그들이 석탄을 폐기하며, 추방의 방식이 아니라 포용의 방식을 고민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변수 앞에서 선택한 용감한 유연함만이 감동적인 스토리가 된다. 우리도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