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으로 물들어가야 할 수확철 논 곳곳에 병해충과 도복 피해로 생채기가 남았을 뿐만 아니라 20년 전 수준으로 쌀값이 하락하면서 농민들의 허탈감과 분노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쌀 생산량을 줄이기 위해 '전략작물'이라는 명칭을 붙이며 논콩 등 대체작물 생산을 유도했지만, 정작 올해 논콩조차 폭염·가뭄 등의 여파로 평년 대비 절반 가량 수확량이 줄어들거라 예상되고, 쌀값 하락세는 여전하다보니 사실상 정부의 '쌀 수급 정책 실패'라는 날 선 비판까지 나온다. 일부 농민들은 애써 농사지은 논까지 갈아엎으며 현실적인 지원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9월까지 이어진 고온현상으로 올해 벼농사가 '풍년'이라는 예상이 나왔지만, 막상 수확기가 다가오자 농민들은 평년 대비 수확량이 줄어들 거라 우려하고 있다. 벼 잎에 흑갈색 깨 모양의 작은 반점이 생기면서 잎을 말리는 '깨씨무늬병', 볏대 아랫부분 즙액을 빨아먹어 생육장해와 벼 품질하락 등을 일으키는 '벼멸구', 벼 잎이 말라죽는 '입마름병' 등 병해충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벼 대체작물 장려했지만 기후 탓에 논콩도 흉년
게다가 추석 직후 갑작스럽게 내린 폭우로 논 곳곳에 도복 피해도 발생했는데, 일부 도복 피해 논의 경우 벼 낱알에 싹이 올라오는 '수발아' 현상까지 확인됐다. 피해는 충북 옥천 내 벼 주산지인 청산·청성뿐만 아니라 지역 내 논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병해충 및 도복피해로 미질 하락, 수율 감소 등은 물론 수확이 불가능할거란 전망도 제기된다. 통상 '황금들녘'이라고 불리는 논은 금색과 녹색이 섞여 빛깔이 나오는데, 병해충이 번진 논의 경우 모래빛깔을 띄며 시든 모습을 보인다.
박태수(89, 청성면 산계1리)씨는 "1500평 정도 논에 80% 이상 깨씨무늬병이 번진 걸로 보인다. 평생 농사를 지어왔는데 올해가 유독 심하다. 쌀값이 떨어져서 걱정도 많은데, 날씨도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친환경농업협회 이선우 회장은 "기후변화로 인해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세계는 이미 영향을 많이 받았을거라 보인다. 겨울이 추워야 세균이나 벌레가 죽는데, 지난 겨울은 상대적으로 따뜻한 편이었다보니 병해충이 심할거라 예상이 됐다. 게다가 폭염도 심했다. 병해충이 활발하게 활동할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라고 말했다.
"통상 벼멸구는 태풍을 따라서 온다고 하는데, 올해는 태풍의 영향이 없었음에도 벼멸구가 많다. 정말 식량문제가 머지 않았다. 농업군인 옥천군이 민관 거버넌스 대책기구를 마련해 생산·소비 전반을 살피는 등 제대로 된 농업정책을 갖고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병해충·도복만으로도 이미 농가의 피해가 큰데, 쌀값까지 하락세를 면치 못하면서 농민들의 시름은 더욱 커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산지 쌀값(80kg 기준)은 2023년 10월 5일 약 21만7500원을 기록한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세를 면치 못하며 올해 9월 25일 기준 약 17만4900원을 기록하고 있다.
올해 정부는 쌀값 하락세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고, '초과생산량 약 10만 톤을 사료로 활용하겠다'는 수급안정 대책을 발표했지만, 쌀값은 여전이 떨어지고 있다. 쌀값 하락으로 인해 생산비도 건지지 못할거라는 우려가 커지자 농민들은 집회를 벌이며 정부 대책을 요구하는 한편, 애써 농사지은 논을 트랙터로 뒤엎는 상황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후계농업인경영인 옥천군연합회(아래 한농연) 김상태 회장은 "농민도 국민인데 정부는 농업을 외면하고 있다. 9월 정부가 내놓은 벼 매입 정책은 실효성이 떨어진다. 올해 지은 벼 추가 생산량 매입해봤자, 지난해 수확한 벼는 아직 창고에 쌓여있다. 전국적인 쌀 작황이 좋지 않을거라 예상되는 만큼 농민들의 고충도 클 것이다. 관행농도 힘들지만, 친환경 농가는 비싼 자재값과 추가로 투입되는 노동력을 감수하고도 환경농업을 했는데, 피해가 크다. 정부의 대책은 물론, 지자체와 농협이 판로확보와 쌀값 보전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쌀 생산 줄여 쌀값 잡겠다던 정부 정책 무용론 나와
정부는 쌀값 하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략작물 직불제' 정책을 추진하며 수년 전부터 논콩, 밀, 옥수수 등 대체작물 생산을 장려해왔다. 그런데 논콩 조차 여름철 폭염 및 가뭄으로 인해 제대로 크지 못하면서 농민들의 피해 또한 높아지는 형국이다.
청성면에서 2만 평가량 논콩 농사를 짓고 있는 서평리 유지인 이장은 지난해 대비 올해 논콩 수확량이 반토막 날거라 예상했다. 유지인 이장은 "논콩은 벼보다 재배 기간이 한 달 가량 더 길고 농사도 어렵다. 장비도 새로 구매해야 하는 만큼 초기비용도 들였다. 정부와 옥천군에서 장려해서 논콩을 키웠는데, 올해 가뭄과 더위가 심했다보니 생산량이 절반 가량 떨어질거라 본다. 피해가 크다"고 말했다.
정부가 쌀 생산량을 줄이기 위해 추진한 대체작물 정책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농민들의 비판 또한 제기되고 있다. 안남면에서 논콩을 심은 안남면이장협의회 제판권 회장은 "벼 대신 논 콩을 심으면 전략직불금을 주기는 하지만, 정부가 콩값을 보전할 대책은 없다. 벼 대신 다른 작물을 심으면, 정부에서 수매를 책임지든지 해야 하는데, 정작 판로확보에는 손을 놓고 있다. 이런식으로 해서는 대체작물 정책이 통할 리가 없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쌀 소비처 확대 및 지역 기후에 맞고 소득을 보전할 수 있는 대체작물을 개발하고 대체작물 생산 시 지원금을 추가 확대하는 등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충북연구원 김미옥 연구위원은 "쌀 생산보다는 결국 소비가 문제다. 쌀 소비처를 확대하고 과자, 술 등 가공에도 쌀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대체작물을 보다 다양하게 개발하고 지원을 확대하는 정책적 노력도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옥천군의 경우 올해 옥천성모병원, 옥천군장애인보호작업장, 옥천군군립치매전담노인요양원과 공공급식용 친환경 쌀 공급 협약을 맺고 총 21톤가량의 지역산 쌀 판로 확보를 한 바 있다. 황규철 군수는 쌀 문제 대응을 위해 판로확보 및 농가 지원 방안을 고민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회 농해수위 소속 박덕흠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다가오는 국정감사를 통해 농업 정책을 살펴보겠다는 입장이다. 박 의원은 "농림부와 회의할 때마다 쌀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농가소득 보전을 위해 농작물재해보험 등의 정책보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고 판단한다. 쌀 대체작물 정책 실효성 문제에 대해서도 확인해보겠다"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옥천신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