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대교. 행담도 휴게소. 행담도 하면 주로 떠올리는 단어다. 하지만 고속도로와 휴게소가 들어서기 직전인 2000년까지 이 섬에 사람이 살았다. 우리 역사도 담겨 있다. 개발에 밀려 끊어진 행담도 사람들이 역사와 이야기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당진시에서 최근 펴낸 <그 섬에 사람이 살았네>를 주로 참고하고, 추가 취재한 내용을 보탰다.[편집자말] |
행담도 주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포구는 음섬포구, 맷돌포구, 복운리 포구(구래 포구, 아래 복운리 포구)순이었다.
음섬포구(행담포구 기준 약 2km)는 행담도 주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포구였다. 행담도행 모든 우편물의 종점은 음성포구에 있는 구멍가게 옆에 주민들이 만든 자체 우편함이었다. 행담도 주민들은 음성포구로 일을 보러 나갔다가 돌아올 때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행담도 전용 우편함을 살폈다. 우편물이 있으면 행담도로 들고 온 사람이 가정마다 배달했다.
기계배(엔진 배)가 생기자, 맷돌포구의 한 가게 앞에도 행담도 전용 우편함이 설치됐다. 역시 마지막 배달부는 행담도 주민들이었다. 맷돌포구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1970년대 말까지 인천으로 가는 정기 연락선이 운행됐고, 이후에는 행담도를 오가는 행정선(도선)이 운행됐다.
복운리 포구(행담포구 기준 약 1km)에는 당시 해바라기 농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많아 행담도 주민들이 굴이나 바지락, 생선 등을 판매하러 오갔다.
1983년 12월 어느 날. 영하 20℃를 넘어서는 혹한의 추위에 전국이 얼어붙었다. 아산만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은 행담도 구석구석까지 몰아쳤다. 한파에 아산만 바닷물 표면도 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씩 얼어 작은 얼음조각을 만든다. 기온이 더 떨어지면 작은 얼음조각이 바람과 조수에 밀려 합쳐져 좀 더 두껍고 큰 덩어리 얼음으로 변한다. 그럴 때면 주민들은 배를 타고 얼음조각 사이를 헤치며 포구를 오갔다.
행담도 주민들에게 겨울 바다 유빙은 낯설지 않았다. 어느 땐 아예 큰 얼음조각을 타고 장대를 노 삼아 음섬포구까지 오가기도 했다.
그날 오후도 주민들은 나비 배(합판을 덧대 만든 배, 노를 젓는 모습이 나비가 날개짓을 하는 것 같아 붙인 이름)를 타고 얼음 조각 사이를 헤쳐 복운리 포구로 향했다. 두꺼운 얼음조각이 떠다녔지만 배가 지날 때마다 얼음조각이 밀려나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당진경찰서 신평지서 행담도경찰관출장소(1977년 설치,순경 1명 근무) 순경도 주민들의 출항을 승인했다.
"조각배에 나하고 우리 식구 김영애 그리고 마을주민인 김진복, 이달호, 이익주, 이정자 등 모두 8명을 싣고 보글리(복운리)로 나갔어." - 한정만
복운리 포구에서 사람들을 내려주자, 그곳에서 기다리던 행담분교 김명중 교사와 강관구 교사 2명이 배에 올랐다. 교사들을 마중한 이익주, 이달호는 내리지 않았다. 4명이 탄 배는 곧바로 행담도로 향했다. 노를 저으며 얼음조각을 헤치고 중간쯤 왔을 때였다.
"어, 배가 움직이지 않아요..."
"그럴 리가... 좀 더 노를 세게 저어봐!" - 이익주, 김명중
"네 명이 바다에 갇혔어요, 이대로 두면 다 죽어요"
아무리 힘을 줘도 나비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강풍에 얼음조각이 얼음조각을 업으면서 얼음이 두꺼워졌고 해가 지면서 기온이 더 떨어지자, 얼음조각이 서로 엉겨붙어 얼음 바다로 돌변한 것이다. 행담도 주변 바다가 꽁꽁 얼어 마을에서 얼음이 풀릴 때까지 고립될 때는 있었지만 이처럼 바다 한복판에서 얼음에 갇히기는 처음이었다.
복운리 포구에서 행담포구는 1km 정도로 맨눈으로도 서로 가늠할 수 있었다. 배가 중간에 멈춰서자, 양쪽 포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리를 질러 배가 얼음에 갇혔다고 상황을 전했지만 발을 동동 구를 뿐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같은 시각 복운리 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행담도 주민 한정만과 김진복이 복운리에 있는 이장 집으로 달려갔다. 이장 집에 도착한 이들은 전화로 당진경찰서에 상황을 알렸다.
"사람 네 명이 바다에 갇혀있어요. 이대로 두면 모두 죽어요. 도와주세요!" - 한정만
당진경찰서는 충남도경으로 긴급상황이라며 대응을 요청했다. 당시 행담도 포구에서 3.5km 거리에 있는 한진포구에 경찰 경비정이 상주 중이었다. 하지만 유빙이 꽉 차고 얼음이 언 바다에서 경비정은 움직일 수 없었다.
두세 시간쯤 지났을까. '우지끈' 배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얼음조각이 조류와 바람에 밀리면서 얼음 사이에 낀 배가 압력으로 찌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조각배는 합판을 덧대 만들어 견고하지 않았다. 얼음조각에 눌려 배가 부서지기 직전으로 상황은 긴박했다.
"유빙이 양쪽에서 밀고 들어오니 배가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죠. 무서웠죠." -김명중, 이익주
그때였다. 멀리서 헬기 소리가 들렸다. 충남도청에서 운영하던 헬기를 보낸 것. 헬기에서 밧줄에 매단 인명 구조용 바구니를 내려보냈다. 1명 밖에 탈 수 없는 크기였다. 가장 먼저 바구니에 오른 사람은 김명중 교사였다. 이어 강관구 교사, 이달호 주민, 이익주 주민 순으로 구조됐다.
"제가 마지막으로 구조바구니에 올랐죠. 참 무섭고 아슬아슬했죠." - 이익주
이들이 탔던 조각배는 구조 작업이 끝난 직후 부서져 가라앉았다. 헬기가 조금만 늦었어도 구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바다에 갇혀 생각했어요. 만약 살아나면 그건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그런데 살아난 거지. 그래서 행담도 사람들을, 행담도 주민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김명중
지독하게 추웠던 1983년 겨울
다음해 2월이었다. 연이어 지독한 한파가 몰아쳤다. 행담도가 위치한 아산만은 겨울에는 대륙성 기후, 여름에는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겨울철 북서 계절풍이 매우 심하게 분다.
기상청 자료를 보면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1983년 12월 23일부터 전국이 영하 10℃ 이하인 날이 잦았다. 성탄절에는 영하 13.5℃를 기록하며 12월 최저 기온으로 떨어졌다. 추위는 이듬해인 1984년 2월까지 이어졌다.
특히 2월 들어 한파가 더욱 강해졌다. 2월 6일에는 영하 15.1℃로 곤두박질쳤고 장기화했다. 기상청은 당시 "서울의 2월 상순 평균 기온이 영하 8.2℃로 하위 3위를 기록, 2위인 1945년을 제외하고 일제강점기 한파를 압도하는 기록"이라고 밝혔다.
강추위에 행담도 앞바다도 얼어 붙였다. 처음에는 조각 형태로 얼음이 떠밀려오다 서로 엉겨 붙어 바다를 덮였다. 18가구 64명의 주민이 섬 안에 갇힌 건 같은 달 중순께였다. 행담도 주민들이 얼음 바다에 갇혀 고립되는 일은 간혹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개 며칠 정도만 버티면 얼음이 풀렸다. 1963년 2월 5일 <동아일보>에는 '양도(糧道, 식량길) 끊긴 행담도에 미군이 식량을 공수'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평택에서 약 20마일 떨어진 서해의 작은 섬 충남 당진군 행담도민들은 혹한으로 교통이 두절, 이틀 동안 절량상태에 있었는데 4일, 미 제 71 수송대대 19 수송대에서 출동, 당진서에서 거둔 식량을 CH=37형 헬리콥터 편으로 공수, 이날부터 주민들에게 분배하였다.' (기사 전문)
일부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전후에도 지독한 혹한으로 주민들이 한참동안 고립되던 때가 있었단다.
이때도 일주일이 지나도 얼음이 풀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활필수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기발전기를 돌리는 데 필요한 석유도 동이 났다. 며칠 뒤에는 양초도, 성냥도 켤 수 없게 됐다. 안 그래도 깜깜한 행담도에 밤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담배마저 떨어져 담배를 피우던 주민들은 금단현상까지 겪었다.
이런 때에 병이라도 나면 정말 큰 일이었다. 행담도에서는 뱃길이 막히지 않은 때에도 병원이 멀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은 경우가 있었다. 김진성씨의 작은 아버지가 그런 경우였다.
"밤새 복통이 심해 아침 일찍 행담도에서 나비 배를 타고 음섬 포구로 나갔지. 택시를 잡아타고 신평보건소로 갔는데 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거야. 다시 택시 타고 합덕제일병원으로 갔는데. 의사 양반이 '너무 늦었다'고 했대. 무슨 병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 그때 행담도가 아니라 육지에서 살았으면 죽지는 않았겠지." - 김진성
다행히 시간을 다투는 환자는 없었지만, 주민들의 불안과 불편은 컸다. 얼음에 갇힌 지 약 일주일쯤이 지날 때였다.
날아온 충남도 헬기에는 위문품이 가득
2월 24일 오전. 행담도 하늘로 헬기가 날아왔다. 헬기는 행담분교 운동장에 내려앉았다. 충남도에서 운행하는 헬기였다. 마을주민들이 섬에 갇힌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얼음이 풀리지 않는다는 소식에 당진군이 충남도에 헬기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충남도는 헬기에 위문품을 실어 보냈다. 당진군은 충남도의 위문품에 생활필수품을 더했다. 모두 50만 원 상당이었다. 당시 충남도지사는 유흥수였다.
행담분교 운동장으로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운동장 한복판에 성냥, 라면, 양초, 비누, 담배, 석유, 가정상비약 등이 쌓였다. 주민들은 모처럼 활짝 웃으며 생활필수품을 내리고 떠나는 헬기를 향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 동안 손을 흔들었다.
당시 마을 반장은 김진영(당시 35세)씨였다. 당시 <대전일보>는 주민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당국에서 이같이 생활필수품을 해주어 감사한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앞으로 선박이 왕래 될 때까지 주민들이 서로 협조해 불편함을 극복해 나가겠습니다."
행담도 주민들에게 얼음 바다 한복판에서 조난됐다가 구조된 일과 앞바다가 얼어붙어 일주일 넘게 고립돼 위문품으로 버틴 유독 추웠던 겨울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