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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 자기역사쓰기'는 여성노동자들이 자기 삶과 노동의 경험을 젠더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여성’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경험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이 사업을 통해 10여 명의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은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역사적 배경 속에 딸로서, 아내로서의 경험한 것을 돌아보고 여성 노동자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성장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며 고통스러웠던 기억, 신나게 투쟁했던 경험, 조합원에서 간부로 성장한 경험을 모두 담아냈습니다. 왜 노조가 필요했는지, 노조활동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 개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2024년 현재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기자말]
나는 어릴 적 무진장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부유했던 서울 토박이다. 서울 중구 중림동에서 4녀 2남 중 넷째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 살았던 우리 집은 방 하나, 다락 하나, 부엌에 툇마루가 붙어있는 구조였다. 똑같은 집 9채가 주르륵 붙어있었고 공동화장실 3개가 바깥에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집을 '아홉가구집'이라 불렀다.

부모님과 어린 남동생 둘은 방에서 잤고, 딸 넷은 차가운 다락방에서 추위에도 몸을 붙이지도 못하고 떨며 잤다. 아버지는 가장 노릇을 해야 했지만 생활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새벽 4시부터 생활전선인 남대문 시장으로 나가셨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으셔서 청과시장에서 닭장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가끔 하셨고, 그 일당으로 남들은 없어서 못 먹는 제철 과일을 사오곤 했다. 어머님 또한 시장에서 돌아오실 땐 우리에게 미안한 마음에 항상 까만 봉지 안에 간식을 챙겨 오셨다.

어린 마음에 입이 즐거우니 가난함의 불편함은 뒤로 사라졌다. 주말엔 온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남산으로 올라가 뛰어놀았고, 그럴 때마다 우리 집 언니들이 대장 노릇도 하게 되어 나는 철없는 마음에 우리 집이 가난해도 제일 좋은 집이라 생각하며 자랐다.

가정 형편상 졸업 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1979년 상업계 학교인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에도 남들은 다 들고 다니는 용돈도 없어서 친구들과 어울려 떡볶이 한번 먹어보지 못했다. 겨울에는 교복 말고는 입을 코트가 없었고 발가락은 3년 내내 동상이 걸렸다. 귓불 또한 붉게 동상이 걸렸다.

어른아이

 결혼하고 다니던 직장을 나오고, 내가 모은 돈으로 그동안 꿈이었던 퀼트공방을 열어 열심히 했다.
결혼하고 다니던 직장을 나오고, 내가 모은 돈으로 그동안 꿈이었던 퀼트공방을 열어 열심히 했다. ⓒ 픽사베이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생활 형편이 나아져서 무사히 졸업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아주 좋아해서 자칭 문학소녀였다. 고등학교 시절엔 국어 과목을 특히 잘했다. 그래서 국어 선생님이 되기를 꿈꾸었으나 집안 형편만 비관했을 뿐, 취업 후 야간대학을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1982년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을 하자, 부모님은 나를 무척 대견하게 생각하셨다. 월급으로 적금을 부어 만기가 되면 드렸고, 또 몇 년을 모아 적금이 만기 되면 돈이 들어갈 상황이 벌어지기를 반복했다. 내가 상상한 것과는 다르게 현실은 버거웠지만 불평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라도 졸업해서 취업하게 됐으니 어머니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그 일이 경제적으로 완전한 독립의 자유를 주지는 못했지만 나를 세울 수는 있었다. 지금까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머니가 매일 아침을 당연한 듯 따뜻한 밥을 차려주셨다는 점이다. 그게 지금까지 건강함의 기초가 되었고, 나는 그걸 당연한 듯 얻어먹으며 직장을 다녔기에 건강과 성실을 챙길 수 있었다.

흔들리는 청춘

나는 1982년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조기 취업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성실하게 일 잘하고, 반듯한 글씨체로 장부 정리도 잘하고 똑 부러지게 일한다며 칭찬받는 귀여운 막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비 오는 날 퇴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넘어져 팔꿈치 뼈가 으스러졌고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또 앞니 두 개는 신경 손상을 입어 치아가 변색됐다. 8주 이상 진단이 나와 수술 후 두 달 넘게 병원 생활하다 직장에 복귀했는데, 회사에서 입원 당시 찍었던 엑스레이 사진에 어릴 적 앓았던 폐결핵 흔적이 보인다며 퇴사를 강요했다. 갓 스무 살이던 어린 나는 누구에게 의논해야 할지도, 항의할 방법도 알지 못했다. 억울했지만 강제적으로 첫 직장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여의도의 서점, 종로5가의 건설사무실, 충무로의 화방, 동네 빵집 알바, 종로3가의 제조업체, 종로5가의 케이블회사, 종로1가 보험회사를 거쳐 2019년 은평성모병원에 이어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미화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난 40년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무난한 직장생활을 꾸려나갔다.

이 또한 지나간다

어린 시절 내 눈에 비친 어머님의 모습은 새벽같이 일어나 남대문 시장으로 돈 벌러 나가시는 등 참으로 고단한 모습이었다. 울 아버지는 아이들을 건사하는 살림하는 남편으로 안팎이 바뀐 그런 환경이었다. 어머니의 어깨는 항상 무거웠고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언니들도 아버지 같은 남자를 만날까 결혼을 안 하고 있었다. 나 또한 그런 영향으로 아주 늦은 나이인 마흔아홉에 직장 거래처 지인에게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우리집과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시댁의 모습에 오히려 가벼운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신혼 초부터 시어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고 시어머니의 무시를 견뎌야 했다.

결혼하고 다니던 직장을 나오고, 내가 모은 돈으로 그동안 꿈이었던 퀼트공방을 열어 열심히 했다. 그러나 그곳 또한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남편은 다니던 회사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서울을 떠났다. 결국 나는 혼자 남겨진 상황이 되었다.

내 편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일단 간단한 짐만 싸서 친정엄마에게 데리러 와 달라고 하였고, 떨리던 발걸음에 힘을 실어 3년 만에 결혼을 끝냈다. 나에게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준 아끼던 공방도 접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결혼도 나의 선택, 이혼도 나의 선택이었다. 아니라고 생각될 땐 얼른 미련 없이 털고 나와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내가 결혼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늦은 나이지만 아이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은 아이를 바라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게 내 문제려니 생각하시며 미워했고 그 상황에 다행히 자녀가 없었기에 빠른 이혼을 할 수 있었다.

그런 결혼 생활이었지만 나에겐 나름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남에 대한 배려심도 생기고 철도 많이 들었다. 세상살이 너무 나쁘게만 보면 더욱 안 될 일만 생긴다. 이 또한 지나간다. 지나고 보면 더 좋은 날을 만들 수도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연재2-2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지부 연세세브란스빌딩분회 조합원입니다


#공공운수노조#여성노동자#생애사#자기역사#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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