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은 1894년 5월 23일 아버지 유교흥과 후처인 어머니 김성옥 사이에서 만영·돈영에 이어 3남으로 경북 안동군 월곡면 계곡동 542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고 선대는 조선조 집현전 학자였던 의손(義孫)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학행을 겸비한 지주였다. 두 형이 양자로 출계하여 그는 사실상 외아들이 되어었다.
부친은 그 지방 일대에서 꽤나 행세하는 대지주로서 부인 의성 김씨 사이에 아들 셋을 두었다. 그런데 맏아들 만영·차남 돈영이 가까운 인척의 양자로 갔기에 막내 유림(당시 이름은 화영(華永)은 자연히 대지주로서 글줄이나 읽는 전주 유씨 집안의 장남이 되었다. (주석 1)
그리고 아버지가 사망한 다음 해인 1900년 그는 호주(戶主)를 승계하였다. 호주를 승계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적자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비록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었지만 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같은 문중에서 희영을 양자로 받아들여 대를 잇게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유림의 인생 길에 중요한 문제로 자리잡게 된다. (주석 2)
태어나던 해 3월 호남에서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의 깃발을 올리고 직전인 2월에는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되었다. 4월, 청국의 초토사 홍계훈이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경군 800명을 이끌고 아산만에 들어오고, 5월 일본군 400명이 인천으로 들어왔다. 6월, 갑오개혁이 추진되었다.
그가 태어나던 해부터 나라 안팎에 험난한 파고가 일고 있어서 파란만장의 생애를 예고하고 있었다. 아직 그가 어렸을 적이지만, 동학농민군 2차봉기, 전봉준 등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들 처형, 조정에서 홍범14조 제정, 일본인들 명성황후 살해, 단발령 실시, 태양력 사용, 을미의병, 아관파천,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발족,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 흥선대원군 사망, 열강의 이권 침탈 등 외세의 침략과 정부의 무능한 대처로 국가는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유림은 5세 때에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 마을 서당에 다니며 한문공부를 하였다. 그의 어린시절 이름은 화종(花宗)이었다. 그리고 1919년 3월 항렬에 맞추어 화영(華永)으로 개명하였다.
호는여러가지를 썼다. 월파(越坡·月坡·旦洲) 등이고, 이명은 유림(柳林), 고상진(高尙眞)이었으며, 또 고장성이라 쓰기도 했다.
"1933년의 경성고등법원 판결문이나 중국에서 함께 활동한 인사들은 그를 월파(月波)라 부르지만, 해방 직후 단주 아래에서 활동했던 정인식(한국자주연맹)을 첫 호가 월파(越坡)였다는 사실을 유림에게 직접 들었으며, 단주라는 호가 부산 정치파동 이후에 사용되었다고 전하고 있다."(<해방공간에서의 단주 유림의 정치활동과 독립노동당>)단주 유림선생 제40주기 추모 공훈 선양 대학학술강연회. 2001. 4. 20. 세종문화회관) (주석 3)
유림은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고 이후 서당에 들어가 서당교육을 받았다. 9세에 사서삼경을 배울 만큼 총명하였다.
경북북부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신식중등학교인 협동학교를 다녔다. 그가 이 학교를 언제 다녔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이 학교가 1907년에 개교하여 1회생이 1911년 3월에 졸업했고, 유림이 다닌 시기가 1910년 무렵으로 전해지는 만큼, 그가 1회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인식·김동삼을 비롯한 설립 주역들과 신민회의 이관식이 핵심을 이루었던 시기에 이 학교를 다닌 것이다. (주석 4)
주석
1> 김재명, <유림 선생의 우국혼>, <정경문화>, 1964년 1월호.
2> 김희곤, <단주 유림의 독립운동>, 69~70쪽, <한국근현대사 연구>, 2001년 가을호.
3> 김희곤, 앞의 책, 주석 5.
4> 앞의 책, 7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