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미국의 가수 밥 딜런(Bob Dylan)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가수에게 노벨문학상을?' 이런 반응이 많았지만, 문학과 음악의 전통적 경계가 허물어질 때가 되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 '사건'은 시(詩)는 대중 앞에서 공연될 때 더 큰 울림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소설가 한강은 싱어송라이터로 나선 적이 있었다. 그녀는 2007년 펴낸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의 부록 음반에 실린 10곡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 산문집 발매 이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나를 숨기고 싶었다. 소설을 쓸 때도 나를 지우고 이야기 뒤로 숨었다. 그런데 숨을 수 없는 일, 목소리는 굉장히 육체적인 자기다. 그런 일을 하다 보니까 그런 경계가 사라진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노벨문학상은 '문학적 풍요'의 결과?
한편, 김명인 문학평론가는 지난 14일에 실린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한강은 두말할 것 없이 뛰어난 작가이지만 그의 성취는 한국 근현대 문학이라는 풍요로운 토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적었다. 그는 여기서 '한국 문학의 풍요로움'이란 "식민지-전쟁-분단-냉전-군사독재-압축성장-민주화-극한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관통한 완강한 가부장주의"라고 풀이했다. 즉 다시 말해서, 고통스러운 한국의 근현대사가 노벨상 탄생의 토양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얼마 전 타계한 김민기는 어땠을까. '만약 그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왕성한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면, 한강보다 앞서 혹은 그녀와 더불어 노벨문학상 후보가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해본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전업 작가는 아니었지만, 김민기는 시대의 부조리와 폭력에 저항하고 쉴 새 없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 작사가이자 가수, 극단 연출가였기 때문이다.
양희은의 <아침 이슬>과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이 그를 통해 세상에 나왔고, 1973년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노동자들과 함께 공연한 것도 그였다. 어디 그뿐인가. 김민기는 유신정권 말기인 1978년에 비밀리에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만들어 세상에 발표하였다. 1991년에는 '학전(學田)' 소극장을 개관했고, 이후 뮤지컬 <개똥이>와 <지하철 1호선> 등 연출 활동을 왕성하게 벌였다. 그는 탁월한 싱어송라이터이자 천재적 아티스트로서 제2의 밥 딜런이 되지 말란 법이 없었다.
같이 잘 사는 '문학적 빈곤'이 낫다
사실, 한강과 김민기의 사례를 통해 볼 때,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문학적 풍요'보다 '문학적 빈곤'이 나을 수 있다. 다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다 한들, 온갖 폭력과 혐오, 반인권, 비민주로 점철된 역사를 극심한 고통 속에 사느니 국민 다수가 지금보다 훨씬 정의로운 사회에서 인간답게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게 낫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우리 교육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직도 우리는 창의성을 억압하는 지식 위주의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상상력이고, 미래인재에게 요구되는 것은 창의적인 융합 능력인데도, 우리나라 교육은 그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소수점까지 점수를 산출해 아이들을 줄 세우느라 여념이 없고, 아이들에게 끝없이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외우게 한다. '개별 학생의 인간적 성장'은 교과서에 박제되어 있을 뿐이다.
15일 치러진 고3 서울교육청 전국연합 학력평가에 복효근의 '대숲에서 뉘우치다' 시가 출제되었다. 이 시를 읽으며, 대한민국의 교육이 아이들을 더 이상 대나무에 귀를 대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정답만 잘 찾으면 되는 그런 교육 말이다.
대숲에서 뉘우치다 / 복효근
바람 부는 대숲에 가서
대나무에 귀를 대보라
둘째딸 인혜는 그 소리를 대나무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라 했다
언젠가 청진기를 대고 들었더니 정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우긴다
나는 저 위 댓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는 소리가
대나무 텅 빈 속을 울려 물소리처럼 들리는 거라고 설명했다
그 뒤로 아이는 대나무에 귀를 대지 않는다
내가 대숲에 흐르는 수천 개의 작은 강물들을
아이에게서 빼앗아버렸다
저 지하 깊은 곳에서 하늘 푸른 곳으로 다시
아이의 작은 실핏줄에까지 이어져 흐르는
세상에 다시없는 가장 길고 맑은 실개천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바람 부는 대숲에 가서
대나무에 귀를 대고 들어 보라
그 푸른 물소리에 귀를 씻고 입을 헹구고
푸른 댓가지가 후려치는 회초리도 몇 대 아프게 맞으며
이 시를 읽고, 교사로서 회초리로 맞은 듯 찔끔 눈물이 나왔다. 아이들에게 모르는 걸 설명하는 게 가르침의 전부는 아니지 않을까. 수학이나 과학은 '0 아니면 1'이 중요하겠지만, 문학이나 음악은 함부로 ○와 ×를 가르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가 더 이상 대나무에 귀를 대지 않으면, 똑똑해졌다고 기뻐할 게 아니라 상상력이 작아졌다고 슬퍼할 일이다.
드디어 한국에서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탄생했다고 열광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대나무에 귀를 대게 하는 교육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2년 전 국가의 백년지대계를 세우겠다며 대통령 직속의 독립기구로 출범한 국가교육위원회가 청사진을 마련해야 마땅하다. 지금처럼 공정하고 효율적인 경쟁을 재생산하는 방식에 골몰하지 말고 100년 아니, 30년이라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