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이 사회적 '인물'로 성장하기에는 본인의 됨됨이는 물론이지만, 부모를 비롯한 가족, 스승과 벗 그리고 시대상황이 씨줄과 날줄의 역할을 하게 된다.
유림은 지주의 아들이지만 곡절이 깊었던 것 같다. 당시의 관행과는 달리 장남과 차남이 친척에 출계하고 그는 사실상 호주가 되었으나 문중에서 양자를 받아들여 대를 잇게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심리적 갈등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성장에는 문중의 어른인 유인식의 영향이 컸다.
"유인식은 유씨의 문중의 어른으로서 유림이 한낫 부잡집 도련님으로서 나약하게 글만 파거나, 아니면 기방에 출입하면서 '소년행락'에 자칫 젖어들기 쉬운 연령의 그에게 건전한 민족의식을 불어 넣어준 인물이다." (주석 1)
다음은 시대상황이다.
"인간은 부모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더 닮는다."는 아라비아의 격언이 있듯이, 그가 성장하는 시대상황은 일진회를 비롯 친일매국노 집단, 항일의병, 국치, 지사들의 잇따른 단식과 순절 등 쌍곡선으로 전개되었다. 이전 시기에 그는 유인식과 김동삼 등 걸쭉한 스승들과 벗들을 협동학교(協同學校)에서 만나게 되었다. 국운이 갈리는 전환기에 10대 소년기를 보낸 것이다.
서울에서 이동녕·이회영·안창호 등이 신민회에서 이관직을 안동에 파견하였고, 이어 김기수·안상덕·김하정·김철훈 같은 우수한 교사도 파견되어 협동학교는 전국적인 명문사학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협동학교가 표방하는 바가 무엇이었느냐는 그의 설립 <취지문>과 <권면문>에 잘 나타나 있다. 먼저 <취지문>을 보면, 서양의 과학문명이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때, 옛날부터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고장인 안동이 새 시대를 방관하고 있어야 되겠는가? 늦었지만 이러나 학교를 세워 새로 또 인재를 길러 새 시대를 맞자는 요지였다.
다음에 <권면문>은 먼저 동양철학에 근거하여 경도(徑道)와 권도(權道)를 이야기하고 서양의 과학문명을 찬양하면서 경쟁시대라는 사회진화론적 시국관을 언급한 다음 "나의 도(道)는 도로 알고 저 사람의 기술도 기술로 알 수 있다면 어찌 불가한 것이 있을까"라고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협동학교의 건학정신을 밝히고 있다. (주석 2)
유림이 협동학교 3학년 때에 '충군애국'의 혈서를 쓰는 등 사회의식에 눈이 트일 즈음 안동에서는 국치에 통분한 유지들이 속속 고국을 떠났다. 조국의 독립을 되찾고자 만주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단주가 계몽 교육을 받고서 졸업하기 직전에 다수의 스승들이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자신이 살던 집을 학교에 기부하였던 백하 김대락과 그의 아들 형식, 조카 김동삼형제 등 의성 김씨 집안, 석주 이상룡이 이끄는 고성 이씨 집안 등이 먼저 출발하고, 유인식도 뒤를 따랐다.
이 상황에서 그는 국내에서 투쟁의 길을 찾았다. 자료가 자세하지 않아 확실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일단 1911년 협동학교 졸업 이후 1919년 3.1운동에 이르기까지 그가 대구와 안동을 오가면서 계몽운동과 비밀결사 조직에 나선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그 이름이 전해지는 조직으로는 안동 혹은 대구에서 정진택과 조직했다는 부흥회와 대구에서 김용하와 함께 조직한 자강회 등이 있다. (주석 3)
대한제국을 강탈한 일제는 서울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중등본국 역사>를 비롯한 중고등 학생용 역사·지리·국어책의 출판을 금지하고, <을지문덕>을 비롯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서적 일체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범죄 '즉결례'를 공포하여 경찰서장과 헌병분대장에게 즉결권을 부여하였다.
청소년들이 읽고자 하는 책은 모조리 수거되고, 각지에서 항일운동에 나섰던 지사들은 재판도 없이 현장에서 사살당하는 등 야만 행위가 거침없이 자행되었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전국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안동에서는 3월 15일부터 시작되어 장날인 3월 21일에서 22일 새벽까지 1,000~1,500명이 임종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로 인하여 58명이나 되는 인원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주석 4)
그가 참여했다는 시위는 경북에서도 강력한 투쟁양상을 보인 안동의 임동면 편함장터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이 시위는 시작되자마자 바로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부수고 일제 경찰로부터 무기를 빼앗아 우물에 처박아 버리는 격렬한 양상을 보였고, 그래서 이 시위 주동자들은 7년형과 6년형을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시위는 단주가 졸업했던 협동학교 생도들이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는데, 단주도 이 시위에 동참하였다. (주석 5)
26세의 청년 유림은 향리에서 일어난 3.1혁명에 망설이지 않고 참여하였다. 1915년 부흥회와 자강회를 통한 항일운동으로 한때 구금된 일이 있었기에 이번에 다시 구속되면 쉽게 풀려나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피신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 은밀히 망명을 준비했다.
주석
1> 김재명, 앞의 책.
2> 조동걸, <한국근현대사의 탐구>, 255~256쪽, 경인문화사, 2003.
3> 김희곤, 앞의 책, 72~73쪽.
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3)>, 405~410쪽, 1971.
5> 김희곤, 앞의 책, 7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