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아나키즘을 접하게 된 곳은 주로 중국 베이징(북경)에서였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정화암의 증언이다.
북경에 있을 때지. 러시아인으로 장님인 에로셍코(Eroshenko)라는 시인이 있었지. 아주 유명한 시인인데, 그 사람이 일본으로 갔다가 일본에 더 있지 못하게 되니까 북경으로 왔던 것입니다.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지요. 이때 북경대학에는 아큐정전으로 유명한 노신이 역시 교수로 있지 않았습니까?
이 두 교수가 무정부주의자 즉 아나키스트(anarchist)의 영향을 주었는데, 우리도 그들과 교류하다가 거기에 젖었지요. 특히 에로셍코는 볼세비키혁명 이후의 러시아 현실에 대해 많이 말해 주었어요.
볼셰비키혁명 이후에 크론스타트(Kronstadt)라는 곳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실, 수병들의 반란을 레닌이 무자비하게 진압해 수많은 수병들을 죽인 사실, 또 우크라이나에서 농민들의 반란을 탄압하고 학살한 사실을 자세히 들었어요.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구나"하고 새삼 깨달았지요. 그래 자연히 아나(的)인 사고방식에 하루하루 깊이 젖어들게 되었지요. (주석 1)
신채호로부터 아나키즘의 '세례'를 받은 유림은 조국의 해방과 미래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갖고 수학의 길을 찾았다.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그가 학문적 성숙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고, 여기에 단재의 동의도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학교를 내륙 깊숙한 곳인 사천성의 성도인 성도에 자리한 성도대학(成都大學)으로 정했다. 왜 그가 당시로서는 한인 학생들이 거의 선택하지 않았던 오지의 대학을 선택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곳에 아나키즘이 발달한 것인지, 아니면 변호인의 주장처럼 "무정부주의를 가진 이래 종전의 지우들과의 관계를 끊고", "학문연구에 전념하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떤 경우이든 그가 단재의 동의와 중국인의 협조를 받아 유학길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주석 2)
유림이 성도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적잖은 학자금이 필요했다. 국립대학이어서 외국인에게는 다소 까다로운 절차가 요구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관비생으로 입학하기 위해 이름을 고상진(高尙眞)으로 개명하였다.
졸업 뒤에는 프랑스 유학을 목표로 프랑스어를 배우고 영어도 열심히 공부하여 에스파냐어 에도 능숙하여, 당시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많은 외국어를 구사하였다.
유림은 1922년부터 국립 성도대학 사범부 문과에서 4년 동안 공부하고 아나키즘에 빠져들었다. 이때는 그가 망명기간 중 가장 여유 있는 시기였다. 아나키즘을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정립한 것이다. 한인들이 중국에서 최초로 조직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이 1924년 결성되었다.
1924년 4월 말 이윽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우당 이회영, 해관 이을규, 우관 이정규, 구파 백정기, 우근 유흥식(자명), 화암 정현섭 등이 창립맹원이었다. 단재는 이때 가족을 귀국시키고 북경 순치문내의 석등암에 우거하면서 사고전서를 섭렵하고 역사편찬에 몰두하고 있었다. 유림은 이때 성도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그들이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음은 그 때문이다. (주석 3)
유림은 비록 창립대회에 참여하진 않았으나 이후 이 단체에 가입하여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조국해방의 이데올로기로, 그리고 해방 후에는 통일정부 수립과 사회개혁의 이념으로 추진하였다.
한편 유림이 뒤늦게 유학을 떠난 후 가족은 큰 어려움에 빠졌다. 아들 유원식의 기록이다.
가산 일체를 졸지에 인도하고 난 후 우리 집은 하루 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었다. 적수공권으로 이곳을 떠나게 된 할머니와 어머니는 할 수 없이 우리 남매를 데리고 걸식을 하면서 봉천으로 갔다.
조모님과 모친은 언어도 통하지 아니하는 중국에서 걸식으로 식구들의 모진 목숨을 이어나가면서, 봉천으로 가시면서도 확실히 남다른 부덕을 지니셔서 철저하게도 불고가사하는 아들과 남편에 대하여 원망스런 말씀은 한 마디도 입에 올리는 일이 없었다.
그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가장인 아버님에 대한 원성이나 신세 한탄을 하시는 것은 우리로서는 듣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나는 독립운동을 하러 가신 아버지에 대한 긍지로 가득차 있었다. (주석 4)
성도대학을 졸업한 유림은 1926년 초 가족이 있는 봉천으로 돌아왔다. 부인이 여기서 여관을 경영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얼마동안 휴식을 취한 후 독립운동 진영을 파악하고자, 대륙정세의 변화에 따른 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한 의견을 듣고자, 광동·상해·남경·무한을 두루 순방하였다.
일종의 모색기랄 수 있는 이 기간 동안 국민당 좌파의 여러 지도적 인물들과 진독수(陳獨秀)·진형명(陳炯明) 등 진보적인 인물들을 찾아가 당면한 문제들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북경대학 총장인 채원배(蔡元培)도 만났다. 중국인 아나키스트 그룹의 핵심멤버인 채 총장으로부터 유림은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주석 5)
주석
1> 이정식 면담, 김학준 편집해설, <정화암>,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272쪽, 민음사, 1988.
2> 김희곤, 앞의 책, 76쪽.
3>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288쪽, 형설출판사, 1989.
4> 유원식, 앞의 책, 30쪽.
5> 김재명, 앞의 책.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