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카범'들에 대한 공포가 여성 대중들 사이를 한창 파고들던 때였다. SNS상에 올린 지인의 글을 읽다가 눈살이 그만 찌푸려지고 말았다. '도대체 몰카범이 어디 있다고, 행정력 낭비를 하느냐'는 식의 문장을 보고서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진료실에서 만난 이들은 과연 누구였단 말인가?
필자 역시 일상에서 수많은 성폭력 가해자를 알고 지내왔다. 그들은 '아이들을 예뻐하는' 교사들이었고, '성적 엄숙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또래들이었으며, '분위기 띄우려 했을 뿐인' 선후배들이었다. 심지어 환자를 살리는 데 열심이었던 교수님도 있었고, 나름 존경받던 활동가도 있었다.
이들 중 누군가는 단지 무지가 죄로 이어졌던 경우였지만, 자신의 언행이 뭐가 문제인지 굳이 알고자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누군가는 다분히 자아도취적이기도 했고, 반대로 누군가는 열등감에 시달리는 듯 보였으나 그렇다고 이들 대부분이 '성격 장애'라고까지 일컬을 만한 인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맥락에 따라서는 성폭력에 대한 엄벌주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달갑지 않을 때도 있다. 특히나 '다수의 선량한 남성들'과 '소수의 나쁜 가해자들'을 구분 짓기 위한 것이라면.
생각보다 평범한 성폭력 가해자들
그렇다면 법적인 문제에 연루되어 진료실을 방문하게 된 가해자들은 어떨까? 당연히 이들은 치료감호소에서나 볼 수 있는 '그들'과는 같지 않다. 필자가 만난 성추행범, 몰카범, 딥페이크범 등 몇몇 가해자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특이점이 있던 이들은 지금껏 두 명이었는데 '훔쳐보는 충동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다'고 호소하던 이와 아동학대 피해자였던 지적장애인이었다.
오히려 대부분은 평범한 회사원, 학원강사, 운전기사였으며 성장 과정에서 성적인 트라우마가 있거나 발달력상 특이 사항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부인이나 애인과도 '정상적인' 성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토록 자신들의 괴로움을 호소하다가도 재판이 끝나면 다시는 내원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긴 했지만.
이제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전형적인 사례 둘을 소개할까 한다. 아래의 사례들은 약간의 각색을 거친 것들이다.
평범한 회사원 A
A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직장에서는 좋은 평을 받고 있었으며, 결혼을 고려하는 여자 친구도 있었다. 그가 소위 몰카를 시작한 것은 수년 전부터였다. 그는 그것이 옳지 않은 행동임을 머릿속 한편에서는 알고 있었으나, '나만 본다면 아무런 피해자가 없을 것'이라 합리화했다고 한다. 그래도 들킬 것이 염려되기도 해 두 해 넘게 '끊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친한 형 역시 같은 '취미'가 있음을 알게 된 후, 서로 경쟁하다시피 찍어서 공유하였다는 것이다. A는 이로써, 자신만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다시 시도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자책하고 반성하노라고 했다.
'나는 형편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야.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야.'
환자와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인 터라 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반성이라는 것은 피해를 본 상대방 처지에 깊이 공감하는 것인데, 자기 모습에만 관심이 있기에, 반성보다는 나르시시즘에 가까워 보인다고. 그는 흠칫 놀라며, 피해자들의 심정에 회피 없이 공감해 보겠노라 하였으나, 그 역시 재판 후 내원을 중단하였다.
평범한 고등학생 B
B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그는 아는 여학생들의 얼굴에 나체 사진을 합성하여 친구들끼리 돌려본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었다. 당시는 '딥페이크'라는 단어를 필자가 모를 정도로 현재처럼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지 않았다. 환아의 아버지는 "아이가 너무 외로워 그런 건지 아니면 무슨 트라우마라도 있는 건지 알아봐 주세요"라고 필자에게 당부했으나 B도 특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피해자들 외의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능력도 없지 않았다!
B는 단지 "호기심에 재미있을 것 같아서 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결국 아버지께 "아이는 치료보다 교육이 필요해 보입니다"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쓸만한 교육 자료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는 것 또한 아버지의 거듭된 하소연이었다.
필자는 '아이가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봐 달라'는 환아 아버지의 말에 씁쓸함을 느꼈다. 이것이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21세기의 흔한 대중적 오해 같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성폭력 가해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 '남자는 원래 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였다면, 21세기에는 '가해자는 일반 남성과 구분되는 특별한 사람이다'로 변화하였다. 이 '특별한'의 의미에는 외상과 결핍을 비롯한 '특별한 사연', '특별한 심리', '특별한 인성' 등이 포함된다.
물론 이는 강간·살인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 등 일부 사례에는 해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폭력이 불쾌한 성적 농담부터 집단 성폭행에 이르기까지의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것처럼, 폭력적인 성문화에 (특히) 이성애 남성이 가담하는 정도에도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다양한 사회적 장치들- 또래 문화, 연애 각본, 성별화된 고정관념, 성폭력에 대한 각종 신화들-이 이를 발현케 하는 조건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이 아닌 집단에 대한 조치가 필요
아울러, 최근 급부상한 딥페이크물에 대한 쟁점에 대해서도 우려하는 바가 있는데, '일부 철없는 청소년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인식이 그중 하나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딥페이크 범죄는 윗세대들이 당사자 동의 없이 신체를 촬영하고 섹스 동영상을 유출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다시 말해 기성세대 중에서도 같은 기술력을 가진다면, 얼마든지 딥페이크 가해를 할 수 있고, 현재의 청소년들 역시 언젠가는 기성세대가 저지르는 가해를 저지를 수 있는 어른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떠한 집단적 개입도 하지 않고 문제를 개인화시키는 한 말이다.
요컨대, 그들 개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가 아닌 교육 또는 교정이었으며, 주변의 동료 집단에 대한 예방적인 조치들이었다. 집단에 대한 조치가 가능한 곳이 바로 학교와 직장이 아니던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10월호에도 실립니다. 이 글을 쓴 정여진 님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젠더와노동건강권센터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