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의 택배일기> 제목을 보고 묘한 느낌을 받았다. '신도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30년 동안 가르쳐온 목사가 가리봉동 일대에서 택배 노동하는 이야기'라는 주제에서 문득 낯설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다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된 냉전의 갈등은 한반도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교회들도 전쟁을 피해 피난길에 오르면서 맞이했던 것은 폐허가 된 국토와 뼈아프게 서러웠던 가난이었다.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권의 경제 원조와 군사독재 정권의 경제 개발 계획에 맞물려 교회들은 '지독한 가난에서 탈출해 다시는 굶주리지 않겠다'는 사람들에게 '가난이란 죄악을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면 영혼이 잘 되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며 건강해질 수 있다'는 등 자본‧성장 친화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당시 정부들은 국민들이 정치에 눈을 돌리지 않도록 정부에 협조적이던 교회들에 자본‧부동산 등을 표면적으로 또는 물밑에서 지원했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들은 당시 정권과 국가조찬기도회 등 유착관계를 맺다 보니 정의‧공의와 같은 담론이 사라지고 자본과 권력에 한편이 되었다.
'개구리들의 우물'이 돼버린 한국교회
1987년 6‧29 선언 이후 들어선 민주 정부와 함께 세상은 바뀌기 시작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활용한 기술 선진화는 세계에서도 주목받았고, 지역 사회에서는 '풀뿌리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지방자치와 시민사회단체들이 활성화되는 등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이면에 부정적인 변화 역시도 존재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민영을 넘어 공공기관에까지 도입됐으며,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또한 길어진 경제 침체 현상과 개인주의가 맞물리면서 날이 갈수록 혼인율과 출생률이 곤두박질쳤다.
한국 개신교회도 사회적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매년 거듭된 인구 감소는 신자의 감소와 예비 목회자인 신학생의 감소로 이어졌고, 목회자들 간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심해졌다. 특히 지방의 대‧중형 교회를 제외한 농‧어촌 및 소형 교회 목회자들은 도저히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다고 우려하고 있다.
오늘날 고물가‧고금리 상황 속에서 간신히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 중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목회 업무를 하지 않는 시간에 다른 사회적 노동을 하며 소득을 마련하는 소위 '이중직' 목회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이중직 목회자 발생 초기에 한국 개신교회의 상황은 이러한 현실을 역행하는 행보를 보였다.
매년 개최되는 교단 총회에서 새롭게 총회장 자리에 오른 목회자 중 과반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는 중‧대형급 교회 출신이고, 당장 이중직 목회 인정과 생계 지원이 시급하다고 건의를 올려도 정작 'n년 동안 연구'이거나 '허용 거부'라는 답답한 결정이 반복돼 왔다.
이런 행보 속에 목회자들은 '각자도생'으로 내몰렸다. 갈수록 심해지는 구직난과 경제난 때문에 목회를 포기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사태가 심해지자 주요 교단들도 부랴부랴 이중직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교단 제도 마련과 지원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회의적이거나 이미 늦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진흙' 같은 노동에서 깨달음 얻은 목사
<목사님의 택배일기> 저자 구교형 목사는 한국 개신교계에서 개혁 운동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소위 국내 보수 신학의 아성(牙城)이라 할 수 있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출신이란 이력과 정반대로 교회개혁실천연대‧성서한국‧평화누리‧하나누리 등 개신교계 내 개혁‧평화운동 단체에서 중요 직책들을 역임한 그의 말과 행동은 한국 개신교계에 질려버린 사람들도 공감하며 존경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개신교계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던 구 목사도 나이 50인 지난 2015년부터 택배기사라는 '이중직'에 한 걸음을 내딛게 됐다. 그 역시 개척교회 목회자로 살면서 부족한 생계비를 보태기 위해 여느 이중직 목회자들처럼 택배 전선에 뛰어들었다. 2021년 택배 노동자 과로방지 대책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의 2차 합의문이 발표되기 전 택배 노동자들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으로 과로사에 끊임없이 시달렸으니, 구 목사의 택배 노동도 여간 고된 것이 아니다.
그가 담당했던 가리봉동은 옛 서울 구로공단 시절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애환이 어린 곳이다. 저렴한 주거 장소를 찾아온 조선족‧중국인 및 일용직 노동자들로 가득 찬 좁고도 가파른 골목길을 무거운 짐을 지며 누비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기도 했다.
성경의 표현을 빌려 상호 존중 속에서 공동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실현하자고 하는 것이 사회 참여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주장이다. 구교형 목사도 많은 주민들과 택배 노동자들을 만나고 겪으면서 얻은 교훈으로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젠트리피케이션·기후위기·노동문제·인종 및 지역 차별 등 오늘날 사회 문제에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목사가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과 사회에서 '평범한' 무엇인가를 함께하면 이상해 보이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마치 땀 흘리지 않고 무임승차로 먹고사는 불한당처럼 말이다. 본래 종교인의 존재가 단지 자신만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의 구제로 향해야 함에도 지나치게 특별해지면 높은 성을 쌓고 홀로 자족하는 것이 되기 쉽다.
구교형 목사는 책 말미에 이렇게 썼다. 담담한 성찰에 '역시'라는 감동도 받았지만, 적지 않은 답답함도 함께 느꼈다. 한국 개신교계가 구 목사와 같은 깊은 안목을 과연 갖고 있을지. 아니, 그 이전에 아직도 빙산처럼 깊이 자리하고 있는 노동 혐오 등 반민주사회적 행보를 회개하고 당장의 생계를 이어가기도 어려운 목사들의 이중직 수용 등 현장의 목소리를 신속히 받아들여 처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