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許蔿)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위 인용문은 안중근 의사가 허위 의병장에 대해 내린 평가입니다. 허위라는 분이 도대체 어떤 양반이기에 안중근 의사가 저토록 좋은 평가를 하셨을까?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히 여길 듯합니다.
물론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매우 이름 높은 분인 허위 의병장을 새삼 소개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다만 우리 국민들이 독립운동에 대해 기대 또는 생각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면, 허위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설명은 중언부언 실시되어야 합니다. 이 글은 후자의 견해를 따른 결과물입니다.
그런 탓에, 딱딱한 설명문 형식이 아니라 소설 기법을 동원하려 합니다. 이해도와 흥미를 북돋우기 위한 시도인데, 쓰기는 어렵지만 독자들에게는 괜찮은 '서비스'가 아닐까 필자 스스로 자부해 봅니다. 물론 숫자, 사건, 인명 등은 모두 역사적 사실 그대로라는 점을 밝혀둡니다.
허위 선생께서 1908년 10월 21일 타계하셨으니 오늘(2024년 10월 21일)은 허위 선생 순국 116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을미의병 때 붓 대신 무기를 든 허위
허위가 붓 대신 무기를 든 것은 을미의병으로였다. 1895년 10월 8일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게다가 이듬해 1월 1일 단발령이 떨어졌다. 고종부터 앞서서 머리카락을 잘랐다.
성리학 외의 다른 사상을 거부하며 위정척사(衛正斥邪: 옳은 것을 지키고 나쁜 것을 물리침) 운동에 매달려 있던 선비들은 분기탱천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허위도 1896년 3월 이은찬, 조동호, 이기하 등의 동지들과 더불어 김산(경북 김천)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허위는 김산의진의 대장으로 이기찬을 모셨고, 자신은 참모장을 맡았다. 장날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창의를 선포하자 농사꾼, 장사꾼, 사냥꾼 등이 신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열렬히 호응했다.
"싸움을 하려면 먼저 무기부터 갖춰야 하오."
김산의 무기고부터 급습했다. 무기고를 탈취할 때에도 의병들의 용맹 돌진은 대단해서, 서로 앞을 다투듯이 공격 일선에 섰다.
김산에 의진이 일어나 무기고를 탈취한 후 성주와 대구를 잇달아 도모하려 든다는 소문이 번지자, 대구에 주둔 중이던 진위대 3연대 1대대 병력이 부랴부랴 출동했다. 총을 갖춘 정규군 500명이 들이닥치자 산의진은 불가항력이었다.
이은찬과 조동호가 체포되었고, 허위는 간신히 몸을 빼냈다. 허위는 중군장 양제안과 함께 흩어진 의병을 모아 북진했다.
'어차피 근왕창의(勤王倡義: 임금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일으킴) 아닌가? 서울을 유지해야 나라를 본래대로 세울 수 있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으니, 지방에서 관군과 싸울 것이 아니라 서울로 가서 왜놈들을 몰아내야 한다!'
허위가 충청도 진천에 이르렀을 때 황제의 칙령이 내려왔다. 의병을 해산하라는 명령이었다.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시킨 친러파는 단발령을 철회하고, 친일파를 숙청하며, 백성들을 힘들게 했던 세금 체납을 탕감해준다고 발표했다.
국모 명성황후의 원수를 당장 갚지는 못했지만, 창의의 명분을 반쯤은 없애는 조치였다. 게다가 임금을 잘 모시자며 군사를 일으켰는데, 임금이 그 군사를 해체하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때 전국의 선비들도 모두 의병을 흩어지고 말았다.
임금의 명령으로 의병을 자진 해산한 허위
그 후 허위는 청송에 머물렀다. 청송에는 자신보다 19세 연상의 맏형 방산 허훈이 살고 있었다. 방산은 당시 환갑 나이로 이미 성리학계의 최고 큰선비로 인정받고 있었다.
허위는 어릴 적부터 맏형에게 학문을 배웠다. 박상진의 생부 박시규와 양부 박시룡도 박상진을 제자로 받아달라며 청송으로 보냈다. 1897년, 이때 박상진의 나이 열넷이었다.
이듬해인 1898년, 허위는 나라의 기운이 점점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의분을 참을 수 없어 이건석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고종이 허위의 건의를 보고 크게 감동하자, 1904년 보안회 회장으로 항일 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되기도 하는 신기선이 '허위를 중용함이 어떠하십니까?' 하고 임금에게 천거했다.
허위는 마흔다섯이던 1899년 이래 5년여 관직 생활을 하면서 성균관 박사·중추원 의관·의정부 참찬·칙임 비서원승(내각 서기관장)·평리원 수반판사(대법원장) 등 중요 직책을 역임했다.
허위가 고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자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의정부의 정2품 참찬으로 재직할 때에는 고위 관리 임명에 관한 동의권이 있어 더욱 그랬다. 허위의 고향 선산과 바로 이웃 고장인 칠곡 출신 장승원도 방문자 중 한 명이었다.
뒷날 친일 거두가 되는 부호 장승원의 방문
장승원은 허위가 청송에 은거하다가 서울로 올라온 1899년 당시 청송 군수였다. 이래저래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 아는 사이였다. 장승원은 1853년생으로 허위보다 2년 연상이었다. 33세인 1885년(고종 22) 문과에 급제했고, 1903년에는 왕실 부속기관 통할 관청인 궁내부의 종2품 칙임관으로 있었다.
그가 허위를 찾아와 말했다.
"여보시오, 왕산! 내가 다른 곳에는 다 이야기를 해두었으니 이제 의정부에서만 동의를 해주면 경상도 관찰사로 나갈 수 있소. 좀 도와주오. 20만 원(현재 시세 대략 80억)을 드리겠소."
허위는, '당장 이 방에서 나가시오.' 하기에는 오랜 세교 탓에 인정상 지나치게 야박한 듯싶고, 그렇다고 '알겠소이다.' 할 수도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번거로우시겠지만 며칠 뒤에 다시 발걸음을 하실 수 있겠는지요? 좋은 방안이 없나 궁리를 해보겠소."
하는 궁색한 답변으로 그를 일단 돌려보냈다. 그 며칠 사이에 박상진이 왔다. 허위가 제자에게 전말을 이야기하면서,
"정말 좋은 방안이 뭐 없겠느냐? 너의 젊고 뛰어난 머리면 쾌도난마처럼 이 숙제를 풀 수 있을 텐데…."
하였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던 박상진이 이윽고 스승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어차피 저 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관철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겠다는 20만 원을 받을 수도 없고, 까닭 없이 저 자를 출세시켜 줄 일도 없으니, 뒷날 필요할 때 의연을 하겠노라 약조하라시면 어떻겠습니까?"
며칠 후 허위가 장승원의 호를 부르면서 말했다.
"운정께서도 헤아리고 계시겠지만, 장차 이 나라는 외세에 곤욕을 치르게 될 듯합니다. 그와 같은 국난의 시기를 맞게 되면 무릇 뜻있는 지사들은 창의를 하게 될 터이고, 사재를 쏟아부어 군사 운용에 소요되는 엄청난 비용을 부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운정께서 관찰사로 나아가기 위해 금전을 쓰는 것은 일산상의 명예에도 손상을 끼치는 일인즉, 시기가 도래했을 때 비로소 실행을 하심이 어떠하실는지요?"
지금 당장은 돈을 내놓지 않아도 된다는 허위의 제안이 장승원에게 어떻게 들렸을지는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장승원이 대뜸 대답했다.
"그야 여부가 있겠소? 이 일이 아니라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지요. 그저 고마울 따름이외다."
장승원은 나라에 의병이 일어나는 날이 오면 그때 20만 원을 군자금으로 의연하겠노라 약속했고, 1904년 봄 경상도 관찰사로 의기양양하게 부임했다.
하지만 1908년 9월 허위가 경기도 연천에서 두 번째 의병을 일으키면서 연락을 하자 장승원은 '무슨 소리?' 하는 낯빛을 지으며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1913년 허위의 형 허겸이 군자금 지원을 요청했을 때에는 일제에 고발하기까지 했다.
결국 배신하는 장승원
장승원의 지원이 없다고 창의를 못할 허위는 아니었다. 허위의 창의를 재정적으로 도와준 사람은 형들이었다. 맏형 허훈은 고향의 토지를 팔아 동생들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주면서 청송으로 이주했다.
둘째형 허신은 허위가 아주 어릴 때에 이승을 떴고, 네 살 많은 셋째형 허겸은 허위의 의병부대에서 함께 항일 투쟁을 했다. 허겸은 맏형 방산의 토지 3000여 두락(200만㎡)을 팔아 그것으로 의병 군량을 충당했는데, 아우 허위가 피체된 후에는 동생의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허위 형제들이 나라를 위해 내놓은 돈은 장승원이 약조한 20만 원의 대략 50배나 되는 엄청난 거액(약 4000억 원)이었다.
형제들의 엄청난 지원, 우국지사들의 지지
허위가 서울 동북쪽의 연천과 적성 일대를 근거로 대규모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번지자, 작은 부대를 이끌고 지역에서 용맹하게 싸워오던 의병장들이 군사를 이끌고 찾아왔다.
"연기우 동지가 우리에게 힘을 보태니 천군만마를 얻는 기분이구료. 참으로 고맙소."
작은 키에 상투를 틀었고, 수염은 성긴 편이며, 왼뺨부터 왼팔까지 화상을 입은 다부진 모습의 연기우를 맞으며 허위가 말했다. 이제 막 의진을 꾸려 서울로 진격하려는 차에, 강화진위대가 해산될 때 무기를 놓지 않고 일본군과 싸운 이래 임진강 일원에서 의병 투쟁을 해온 연기우가 찾아온 것은 실로 반가운 일이었다.
강원진위대 부위(중위)로 근무하던 중 군대해산을 맞아 철원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해오던 김규식이 찾아온 것도 이때였다. 이 김규식은 1920년 10월 20일 청산리 전투 때 2연대 1대대장으로 참전하여 왜적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우게 되는 바로 그 김규식이었다.
약 2000명의 큰 군사로 조직된 데다가 연기우와 김규식 같은 용장들의 가세로 허위 의병부대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장졸들은 허위를 보면,
"싸웁시다!"
"왜적을 척살합시다!"
하며,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조르듯이 보챘다. 허위인들 마다할 리 없었다.
"그래! 그래야 하고말고! 하루빨리 왜놈들을 몰아내어 국태안민의 편안한 나라를 세워야지! 성군의 은혜 아래 부모와 처자식 더불고 격앙가(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며 부르는 노래, 중국 요순시대 전설) 를 부르며 살아야지!"
제자 박상진도 스승을 도우려고 노력
그 무렵, 허위는 마땅찮아 했지만 그의 부하 장졸들은 좋아할 만한 일이 있었다. 제자 박상진이 의병진을 찾아 5만 원(대략 20억 원)의 군자금을 내놓고 갔다.
이전에도 박상진은 스승을 찾아 의병진에 온 적이 있었는데, 허위로부터 '네가 의병이 되려고 왔느냐? 너는 훗날을 대비해 큰 꿈을 꾸어라. 지금은 너의 때가 아니다'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스승에게 말하지 않고 의진을 찾아가 군자금만 전달했다.
거금을 받은 장졸들이 그 사실을 대장에게 보고하지 않을 리 만무했고, 허위는 제자에게 '고맙구나. 그러나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라'는 말을 전했다.
그해 9월, 허위 의병부대는 철원을 점령하고 연천군 우편취급소장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인을 포살했다. 포천군 외북면에서도 일본군 70명과 마주쳐 소탕했다. 10월에는 일본군 포천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 다음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