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3월 허위는 김산(경북 김천)에서 군사를 일으켰지만 고종의 의병 해산령에 따라 군대를 흩고 귀향한다. 그 후 1907년 9월 재차 의병을 일으킨다. 서울을 함락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한 허위는 경상도를 떠나 경기도에 주둔한다.
허위 의진(의병 부대)은 창의 직후인 9월, 연천군 우편취급소장 등 다수의 일본인을 포살하고, 철원군을 점령했다. 또 포천군 외북면에서 일본군 70명을 소탕했다. (관련 기사:
순국 116주기에 돌이켜 보는 허위의 생애)
창의 후 당당한 기세를 떨쳤던 허위 의병군
10월, 약 300명의 병력을 보내 안현읍을 점령하고 일진회 회원들을 포살했다. 11월, 병력 약 300명을 투입하여 포천군 고자촌에서 일본군 1개 소대를 소탕했다.
허위가 포천 소요산 흥국사에 머물고 있을 때 이인영 의병부대에서 사람이 왔다. 그가 안내를 받아 요사채 안으로 들어서는데, 허위가 보니 아는 얼굴일 뿐만 아니라 반가운 사람이다.
"이게 누구냐? 이은찬 동지를 이렇게 만나다니!"
"참모장님, 오랜만에 뵈옵습니다."
이은찬이다. 12년 전 경상도 김산에서 을미의병을 일으켜 함께 성주로 진격하다가 대구진위대에 대패했을 때 잡혀간 후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청년이다. 그 무렵 스물이 채 안 된 앳된 젊은이였으니 이제 겨우 서른한 살쯤 되었을 것이다.
이은찬이 허위를 김산의병 당시의 직함인 '참모장님'이라 부른다. 1 896년에 허위는 마흔둘, 이은찬은 열아홉이었다. 이은찬에게 허위는 아버지 연배의 까마득한 어른이었다. 이은찬이 그동안 살아온 이력을 보고삼아 허위에게 아뢴다.
"원주에서 동지 이구재와 함께 500명의 의병을 모았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군인 출신이 80여 명 되는데, 이는 모두 강원진위대에 소속되었던 이구재의 동료들이고, 저는 향민들을 소모했습니다. 저와 이구재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한 마을에서 자란 막역지우입니다."
허위가 기쁜 표정으로 이은찬을 격려한다.
"대단하군! 대단해! 역시 저네는 뛰어난 인잴세!"
허위의 격려가 이어진다. 이은찬이 '별말씀이십니다!' 하고 고개를 숙인 후 계속 말한다.
"그 후 문경으로 이인영 선비를 여러 번 찾아가 의병대장을 맡아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처음과 두 번째는 부친께서 노환 중이시라 집을 떠날 수 없다 하셨는데, 세 번째 찾아뵈었을 때에 나흘 동안 엎드려 식음을 전폐한 채 울부짖었더니 마침내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소인은 의병부대에서 중군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애! 그 또한 대단하군! 대단해!"
"재주에 비해 직분이 너무 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공을 세워 이미 능력을 보였는데 그 무슨 말인가? 이인영 의병대장이 자네를 오늘 나에게 보낸 것만 보아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일이지!"
이윽고 이은찬이 '여기 대장의 서신이 있습니다' 하며 품속에 숨겨온 문서를 꺼내 허위 앞에 내놓는다. 요지는, 전국 의병들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 모여 한꺼번에 서울로 진격하자는 것이다. 이은찬은 이인영이 집필한 격문까지 내놓았는데 핵심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용병(군사를 부리는)의 요결(최고의 방법)은 고독을 피하고(홀로 있지 않고) 일치단결하는 데 있은즉, 각도 의병을 통일하여 궤제지세(강둑을 무너뜨리는 기세)로 경기에 범입(쳐들어가면) 하면 온 천하는 우리의 물건이 안 되는 것이 없고, 한국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유리할 것이라!
의병부대 간의 연합작전이나 연합의진 구상은 창의 초기부터 제기되어온 것이었다. 산남의진 정환직과 정용기 부자도 창의 초부터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하기 위한 북상 계획 실현을 목표로 삼았었다. 당연히 이인영의 제안은 허위의 생각과 한 치 어긋남 없이 일치했다.
13도 연합 의병군, 서울로 진격하다
이윽고 13도 연합 의병군이 아래와 같이 편성되었다.
13도창의대장 이인영(李麟榮)
군 사 장 허위(許 蔿)
황해진동의병대장 권중희(權重熙)
관서의병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동의병대장 민긍호(閔肯鎬)
관북의병대장 정봉준(鄭鳳俊)
교남의병대장 박정빈(朴正斌)
호서의병대장 이강년(李康秊)
호남의병대장 문태수(文泰洙)
13도 연합 의병군은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1908년 1월 15일, 허위와 그 예하의 연기우·김규식이 이끄는 정예군 300여 명이 동대문 앞 30리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정해진 시각까지 후속 부대는 오지 않고, 일본군의 선제 공격이 개시되었다.
화력과 병력이 부족한 상태라 선봉군은 밀릴 수밖에 없었다. 연기우와 김규식까지 총상을 당해 상황은 설상가상이 되었다. 결국 망우리고개에서 1차 타격을 입은 선봉군은 동두천까지 후퇴했고, 그 과정에서 80여 명이 전사했다.
13도 창의군 본대는 1월 28일이 되어서야 동대문 앞까지 왔다. 의병장들은 군세를 추슬러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이때 이인영 총대장의 부친 별세 소식이 날아들었다. 군심이 술렁였다.
"이 싸움이 장차 우리에게 매우 나쁘게 전개된다는 조짐이야. 하늘의 계시야!"
"그렇고말고! 몇 해를 앓으시던 총대장의 부친께서 왜 하필이면 지금 별세를 하셨을까! 자식의 안위를 생각하고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신 게지."
실제로도 연합의진은 총탄 부족과 병사들의 피로 탓에 일본군을 돌파해낼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다. 장졸들 대다수가 내심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총대장의 부친 별세는 장졸들의 그런 마음을 더욱 얼어 붙게 만드는 악재로 작용했다.
더욱이 문제는 이인영 본인의 귀가 결심이었다. '임종을 못 지킨 불효자가 되었으니 장례라도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3년상 후 다시 의병 전쟁에 나오겠다!'고 선언했다.
부친 별세 소식에 총대장 이인영 귀가
이인영은 허위에게 지휘권을 인계하면서 단서를 붙였다. 핵심은, 이번의 서울 총공격은 일단 중지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이인영은 1만 명이나 되는 아군 장졸들이 허무하게 죽도록 해서는 안 된다면서, 허위 이하 의병장들이 그 결정을 내리도록 위임했던 것이다.
사실, 이인영이 귀향할 때 그를 말리거나 반대한 의병장은 아무도 없었다. 이인영의 그같은 언행은 그 당대의 '시대정신'이었다. 결국 전국 각지에서 모였던 의병장들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본래의 근거지로 복귀하는 사태가 빚어지고 말았다.
허위는 처음부터 경기 일원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귀대가 가장 손쉬웠다. 임진강 유역의 농촌과 산마을로 돌아온 허위 부대는 계속 유격전을 펼쳤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제2의 서울 탈환 작전을 추진했다. 허위는 4월 21일 전국의 의병대장들에게 다시 총궐기하자는 격문을 보냈다.
서울에 있던 일본군 13사단 참모부는 한반도 북방에 주둔 중인 군사들을 모두 서울 교외로 이동시켰다. 일본 국내에 있던 제6사단 보병 23연대와 제7사단 보병 27연대가 5월 7일 서울 근교에 배치됐다. 5월과 6월 사이에 서울 주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