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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신흥제분 노동조합 결성
신흥제분 노동조합 결성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우리 얘기가 신문에 나왔네!" "뭐? 나도 좀 보세"

구멍가게에서 김치에 막걸리를 들이켜던 이들은 서로 신문을 보겠다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청주시 내덕동에 거주하면서 신흥제분에 다니고 있던 이들은 기사 내용이 자기들 이야기라서 잔뜩 흥분했다.

노동청 청주사무소에 따르면 (회사대표) 장씨는 창설 당시(1958년 2월 10일)부터 근무하다가 퇴직한 청원군 북일면 원통리 민병권(42)씨, 이복열씨, 한오란씨 등에게 지급할 퇴직금 57만8천여 원을 지난 30일 노동청의 지급명령을 받고도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충청일보> 1974.12.14.)

 퇴직금 안준 신흥기업(신흥제분 하도급업체) 업주를 고발했다는 기사. 1974.12.14
퇴직금 안준 신흥기업(신흥제분 하도급업체) 업주를 고발했다는 기사. 1974.12.14 ⓒ 충청일보

"이 양반들 퇴직금 받으면 앞으로 우리도 받을 수 있겠네." "글쎄 말여." 구멍가게에서 막걸리를 주고받던 이들은 마치 금방이라도 퇴직금을 받을 것처럼 한껏 기분을 냈다. 하지만 이들의 기쁨은 '김칫국부터 마신 격'이었다.

쌀 한 가마 값

1974년 연말에 터진 신흥기업 퇴직금 문제는 해를 넘기고도 해결되지 않았다. 1974년 연말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충북노회 교역자들이 퇴직금 지급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신흥제분에 제출했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이완우와 동료들은 사직동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찾았다. 정진동 목사의 도움으로 청주시청 청소부 문제가 해결됐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봤기 때문이다.

이완우는 정진동과의 첫 만남에서 자신의 속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퇴직금만 문제가 아니유." "그러면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정진동의 물음에 이완우는 한숨부터 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흥제분의 하도급업체인 신흥기업의 노동조건은 상상외였다.

종업원 80명의 신흥기업은 하루 13시간 노동에 연중무휴였다. 그런데 고작 임금은 쌀 한 가마 값의 저임금이었다. 더군다나 퇴직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사실 이번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퇴직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사장 집에 가서 일주일간 단식을 하기도 했다.

신흥기업은 1960, 1970년대 제분 업계의 관행이었던 불법 하도급업체였다. 신흥제분은 형식적으로 신흥기업이라는 하청회사와 도급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신흥기업의 실질적 소유주는 신흥제분이었고, 사장 역시 신흥제분의 관리자였다. 이런 연유로 신흥기업의 노사관계는 단순하지 않았다.

묵묵히 이완우의 이야기를 들은 정진동은 "문제 해결은 노동자 스스로의 노력으로만 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정진동의 권유를 받은 신흥기업 노동자 12명은 근로조건개선대책위원회(아래 대책위)를 구성했다. 이완우가 대책위 위원장으로 선출된 날은 1975년 3월 25일이었다.

그러자 사측은 대책위원 12명을 즉각 파면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동자들이 웅성거렸다. 자칫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격'이 될 것을 우려한 회사가 파면한 노동자 전원을 4월 10일 복직시켰다. 파면시킨 지 불과 보름 만이었다.

여인숙에서 치른 노동조합 창립식

자신들의 신분보장과 지속적인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굳이 정진동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1958년 설립한 신흥제분은 한국전쟁 후 미국의 농업정책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미국이 자국의 농산물가격을 유지하고 수출을 진흥하기 위해 저개발 국가에 PL480호를 적용해 밀가루, 설탕 등을 원조한 것이다. 충북의 대표적인 향토기업가 민철기는 1958년 신흥제분을 설립했다. 양곡정미업으로 출발한 신흥제분은 메주장사, 엿장사부터 중도석유, 속리산고속, 속리산관광호텔, 음료사업(대전의 당근넥타공장)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 결과 한때 종합소득이 전국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굴지의 대기업인 신흥제분의 노무관리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65년도에 1차로 노동조합이 설립되자 노동자 40명을 해고시켰다. 이런 전력으로 인해 1975년도의 2차 노동조합 설립은 신중히 진행되었다.

 신흥제분 노동자들에게 교육하는 정진동
신흥제분 노동자들에게 교육하는 정진동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노동조합 설립 6개월 전부터 정진동과 신흥기업 노동자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정진동은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조합원의 자세, 일상 활동에 관한 교육을 했다. 노동조합이 산별 체계였기에 한국노총 화학노조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노총은 도시산업선교회를 '불순 세력'으로 규정하고 적대시했다.

정진동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이완우, 김태안과 함께 화학노조 본조로 올라갔다. 노동조합 설립과 관련해 실랑이가 있었지만 본조에서는 작업복을 입은 정진동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본조로부터 노동조합 설립 권한 위임장을 받고 내려온 이완우는 사측과 창립식 장소를 교섭했다. 하지만 신흥기업(신흥제분)이 어떤 곳인가? 절대 불가였다. 할 수 없이 창립식 장소를 청주산선으로 정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본조 간부들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펄쩍 뛰었다. "왜 하필 산업선교회요!" "회사에서 장소를 빌려주지 않는데, 여기 목사님이 빌려준다고 해서 그랬습니다"

본조 임원들은 장소를 옮길 것을 강력히 주문했다. 그렇게 해서 옮긴 곳이 평화여인숙이었다.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식은 원만히 이뤄졌다. 1975년 4월 19일의 일이었다. 이완우가 분회장으로 선출되고 임원 회의를 할 때였다. 본조 임원이 "정진동 목사님을 모셔 오라"고 했다.

한국노총과 도시산업선교회가 불편한 관계인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지역에서 노동조합의 운영과 관련해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나타난 정진동을 보고 본조 임원들은 깜짝 놀랐다. 얼마 전 서울 본조로 올라온 허름한 작업복을 입었던 이였기 때문이다. "목사님.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당신 같은 남자들 때문에...

노동조합이 설립된 지 두 달 정도 됐을 때였다. 아침 일찍 출근한 이완우 분회장은 기절초풍했다. 생면부지의 회사 간판 때문이었다. 형식적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소속 회사인 신흥기업이라는 간판은 온데간데없고, '삼진기업'이라는 낯선 간판이 붙어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도급 계약기간이 끝나서 삼진기업과 새로 계약을 맺었소." 이완우의 질문에 신흥제분 관리자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려는 사측의 행태였다.

이완우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전국화학노조 삼진기업분회'로 노조 명칭을 변경했다. 이어서 사측에 8시간 노동에 임금 1000원, 잔업수당 실시, 유급휴일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는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그러자 회사는 회유 전술로 나왔다. 금전 공세로 노동조합 와해를 기도한 것이다. 당시 집에 쌀 살 돈이 없던 이완우는 20만 원을 받고 사측에 약정서(각서)를 써줬다.

"본인은 삼진기업 분회장으로써 운영상의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로 인해 분회를 해체코자 하오니..." - 1975.9.12. (<노동현장과 증언>, 1984, 풀빛)

분회장 이완우와 삼진기업 홍열표 대표 간에 이뤄진 약정서였다. 사측에 약정서를 건넨 이완우는 점퍼 안주머니에 20만 원을 넣고 내덕동 집에 왔다. 동네 구멍가게로 쌀을 사러 갔다. 그런데 막상 쌀을 사려고 하니 정진동 목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결국 쌀을 사지 못했다.

삼진기업 노동조합이 현판식을 하기로 한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아무런 기미가 없음을 이상하게 여긴 건 조합원뿐만이 아니었다. 정진동이 내덕동 달동네로 갔다. 정진동이 사정을 묻자 이완우가 울음을 터뜨렸다. 속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며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그의 아내가 쏘아붙였다. "당신 같은 남자들 때문에 신흥제분 부인들이 고생하는 거예요. 차라리 칼을 물고 죽어요" 이완우의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정진동은 그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내일 출근하자마자 돈을 돌려주세요. 그리고 각서를 꼭 돌려받으세요."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던가.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이완우는 노동조합 지킴이 활동을 더욱 헌신적으로 했다.

폭망

정신을 차린 이완우는 사측과 1975년 단체교섭을 체결했다. 그런 후에 기본급 인상,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준법투쟁에 들어갔다. 사측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75년 11월 15일 노조 간부 12명을 전원 해고했다. 사측은 이 조치 후 열흘도 채 안 돼 이완우를 포함한 노조 간부 6명을 선별 복직시켰다.

정진동과 기독교계는 신흥제분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규탄 활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이완우와 노동조합 간부가 복직되자 '복직 환영 예배'를 드렸다. 1976년 1월 24일 청주산선에서 열린 환영 예배에는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구호가 넘쳤다.

 복직 기념예배에서 연설하는 함석헌
복직 기념예배에서 연설하는 함석헌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씨알의 소리> 대표 함석헌은 "깨어있는 노동자라야 나라가 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후일 성공회대 총장과 경기도지사를 하게 되는 이재정 신부도 덕담을 해줬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승리의 나팔을 부르기는 일렀다. 1976년 4월에 신흥제분은 삼진기업 명의의 도급계약을 종료시켰다. 노동자들은 신흥제분 직영으로 고용 형태가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취업규칙 위반, 무단결근 등의 이유로 이완우, 조종록, 변갑수 등이 해고됐다.

노동조합이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지만 모두 기각당했다. 이때의 노동위원회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편이 아니라 대기업 편이었다.

노조 측은 복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청주산선과 복직대책위가 각계에 진정서, 고발장, 성명서를 제출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정진동은 이 일로 인해 신흥제분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당했다. 대법원까지 간 재판 결과는 정진동의 유죄였다.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신흥제분의 위장도급업체 삼진기업이 노조간부 12명을 해고했다는 기사1975.11.13
신흥제분의 위장도급업체 삼진기업이 노조간부 12명을 해고했다는 기사1975.11.13 ⓒ 충청일보

사측의 노조 탄압은 집요했다. 노조가 부분회장 김병모를 분회장 직무대리로 선출하자, 그제야 이완우가 더이상 위협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해 1977년 1월 그를 복직시켰다. "과격한 노동쟁의 등으로 국가와 사회에 물의가 야기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각서에 서명한 후였다.

이 각서의 보증인은 정진동이었다. 부분회장 김병모가 직무대행을 맡았기에 이완우가 복직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정진동의 판단은 순진한 것이었음이 훗날 밝혀졌다. 사측은 이완우를 인천의 방계회사로 전출시켰다. 노동조합은 사측의 집요한 와해 공작으로 인해 1978년 3월 끝내 해산됐다.

사회 발전에는 윈윈(win-win)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데 신흥제분은 폭망(lose-lose) 전략을 택했다.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은 신흥제분의 말로는 '짙은 구름'이었다. 무리한 사업확장과 1970년대 오일쇼크 등의 여파로 1970년대 말 제분사업을 매각해야 했다. 1984년에는 경제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신흥제분#퇴직금#이완우#노동조합창립식#명예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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