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목사. 청주 OO교회로 가시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도시산업선교회를 그만두고 OO교회로 가서 목회 활동을 하란 말이오."
"..."
충북노회 아무개 목사의 통보에 정진동은 황당했다.
1974년 3월 16일 충북노회가 열렸다. 이날의 모임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 정진동 목사 성토 자리였다. 지난 연말 충북노회가 청주시장을 만나 청소부 문제를 합의한 것에 대해 정진동이 공개적으로 반박했기 때문이다. 사실 충북노회로서는 청소부 문제 합의를 지역의 현안 문제에 대해 적극 발언해 소기의 성과까지 얻은 것이라고 자평했었다.
결국 선교회를 없애버리는 노회
그런데 정진동은 충북노회가 임금 몇 푼과 휴일 문제만 합의해 놓고 청소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선언한 것에 분개했다. 사실 노동자 정운탁의 경우 19년을 근무하고도 퇴직금제도가 없어서 돈 한 푼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수년부터 십수 년 근무한 다른 이들도 퇴직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해고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해고자들의 복직 여부가 전혀 명시되지 않아, 충북노회 목사들과 청주시장이 합의했다는 내용은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청소부 문제를 청소 노동자 없이 합의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정진동의 공개적인 항의에 충북노회는 뻘쭘했다. 사실 반박할 명분과 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1974년 2~3월에 해고자들이 복직되고 퇴직금제도가 도입됐다. 청소 노동자들에게는 무척이나 환영할 일이었지만 충북노회는 얼굴이 구겨지는 일이었다.
충북노회는 청주산선 실무자를 갈아치우지 않으면 이후에는 더 크게 망신살이 뻗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 이유로 정진동에게 '실무자를 그만두라'고 한 것이다. 충북노회의 제안에 정진동은 "내가 진짜 예수를 봤다. 그게 노동자들이다. 나는 그 예수를 떠날 수 없다"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무리 경찰의 압력이 있었다지만 정진동은 노회의 입장을 순순히 따를 수 없었다.
정진동의 반박에 충북노회로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다시 한번 정 목사한테 청주산선 실무자를 그만두라고 권고하는 게 어떨까요?" "그건 안 돼요!" "그 양반 고집이 황소 저리 가라입니다." 정진동 목사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자는 발언에 대다수 목사들이 고개를 저었다.
"자 그러면 원래의 안건 심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폐쇄하는 건(件)입니다. 다른 의견이 없으면 거수로 표결하겠습니다."
표결 결과 원안 통과였다. 즉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폐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74년 4월 18일 벌어진 일이다. 충북노회가 청주에 도시산업선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한 지 채 2년도 안 돼서였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다.
이러한 황당한 결정에 정진동은 승복할 수 없었다. 그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때 충북노회 몇몇 목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5월 26일 정진동이 그 목사들을 만났을 때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정 목사. 교회(충북노회) 말 들어. 안 들으면 구속한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해서 해주는 이 말에 정진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폭탄 발언이 이어졌다. "정 목사. 노동자는 버려도 교회는 버리면 안 돼."
정진동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자기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긴 하지만, 목사라는 이들이 '노동자를 버려도 된다'는 말을 하다니 기가 막혔다. 자신에게 예수를 버리라는 말과 같았다. 당시 정진동은 '노동자가 예수다'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공과 형사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폐쇄라는 소리에 속이 터진 이들은 청주시 청소 노동자들이었다. 정진동 목사의 도움으로 임금인상과 퇴직금 도입을 맛본 이들이다. 그들은 단순히 임금 몇 푼 오른 것에 기뻤던 것이 아니다. 난생처음 자신들이 '인간 대접'을 받은 것에 기쁨과 환희를 경험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쁨을 준 도시산업선교회를 폐쇄한다니, 쇠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들은 '산업선교위원회 대책위원회(아래 대책위)'를 조직했다. 유재향이 위원장을, 최명식이 부위원장을 맡았다. 둘 다 청소부 투쟁의 맨 앞자리에 섰던 이들이다. 총무는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회원 구덕희가 맡았다. 대책위는 청소부 주축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충북노회와 전국의 기독교단체에 여러 차례 탄원을 냈다. '청주도시산업선교는 재개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대책위의 이러한 활동으로 전국 각지에서 청주도시산업선교회와 정진동 목사를 후원했다(크리스챤신문 1974년 5월 18일자).
이런 흐름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다. 충청북도 경찰국(현재의 충청북도경찰청) 대공과에서 대책위 임원을 연행한 것이다. 정진동은 충청북도 경찰국에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이유로 청소부를 연행했느냐, 차라리 나를 연행하라고 소리쳤다.
대공과는 정진동을 연행했다. 정진동이 대공과 조사실에 들어가자마자 욕설이 쏟아졌다. "야 이 XX야. 네가 노동자들을 선동했냐!" 대공과 주임의 욕설에 정진동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당신이 반말하고 욕설을 하니 나도 반말을 하겠소"라고 입을 연 정진동은 "나는 죄가 없다. 설령 죄가 있으면 법정에서 옥석을 가리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무슨 권리로 욕을 하냐!"며 퍼부었다. 정진동의 대찬 대꾸에 대공과 주임의 입은 얼어붙었다. 대공과 주임이 선 자리의 뒤 벽면에는 '남의 인격을 내 인격'처럼 이라는 문구의 표어가 붙어 있었다.
사실 정보기관이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운영과 폐쇄에 관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충북노회에서 청주산선 폐쇄 결정을 내리기 며칠 전 청주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도시산업선교회 위원들을 만났다. 단순히 접촉한 것이 아니라 점심을 샀다. 그 속에서 오고 간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식사 자리 며칠 후에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폐쇄 결정이 났다. 결국 경찰의 개입과 탄압으로 대책위는 흐지부지됐다.
망태를 메고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재개하라는 대책위의 탄원과 활동, 전국 기독교계의 관심은 충북노회의 골머리를 아프게 했다. 여론에 떠밀린 충북노회는 7월 8일 산업선교회 부활을 결정했다. 해가 바뀐 1975년 2월 10일 임시노회에서는 그해 4월 정기노회 때 산업선교회 예산을 청구하기로 했다.
당시 실무자 인건비와 활동비는 1년 예산이 42만 원이었다. 하지만 4월 8일 열린 정기노회에서 도시산업선교회 예산안은 부결됐다. 예산 없는 활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청주산선은 다시 한번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고, 정진동의 일자리도 없어졌다.
아내를 비롯한 3남 2녀의 생계가 막막했다. 그는 넝마주이로 변신했다. 대나무로 만든 망태를 등에 메고 재활용 쓰레기를 주웠다. 그렇다면 정진동은 왜 넝마주이를 했을까? 단순히 생계의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절대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쫓겨난(?) 후 사회의 제일 밑바닥을 체험하기로 마음먹었다. 민중의 삶을 온몸으로 체험하기로 한 것이다. 충북노회가 정진동에게 '노동자-민중을 멀리하라'고 강권했다면 정진동은 민중의 삶에 더 가까이 가기로 마음먹은 것.
그렇게 대나무 망태를 메고 재활용 쓰레기를 줍는 일에 동반자가 생겼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인명진 목사와 대학생 2명이었다. 서울에서 온 대학생 중 한 명은 차관영 목사의 아들이었다. 당시 신학교를 다니고 있던 조순형은 방학 때 넝마주이 정진동 일행의 모습을 사진 촬영했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정진동이 시내를 혼자 거닐고 있었다. 인명진은 토요일 오후면 서울로 올라갔다. 교회 예배를 보기 위해서다. 넝마주이를 하던 대학생들은 방학이 끝나 서울로 올라갔을 때이다. 정진동은 담당 정보과 형사를 만나 북문로 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다. 형사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돼 험상궂은 불청객 5~6명과 마주쳤다.
불청객들은 "같이 갑시다"라며 정진동을 막무가내로 택시에 태웠다. 납치되다시피 끌려간 곳은 서문동에 있던 현양원이었다. 현양원은 넝마주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이들의 대다수는 전과자들이었다. 그들은 정진동을 가운데 놓고 금방이라도 테러를 가할 기세였다. 정진동은 그때 살기(殺氣)를 느꼈다.
하지만 그럴수록 침착해야 했다. "내가 왜 맞아야 하는지 알고나 맞읍시다" 그러자 험상궂은 무리의 뒤에 서 있던 이가 나섰다. 현양원 원장 박아무개였다. "왜 남의 일을 방해하는 거요?" 즉 넝마주이 일에 왜 영업방해를 하냐는 거였다.
정진동은 그의 항의에 "가난한 이들의 아픈 가슴을 만져주고, 그들의 삶을 배우기 위해 넝마를 잠시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박 원장은 정진동의 진심을 이해했다. 심지어 같이 넝마주이 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양복과 넥타이
현양원장의 오해를 풀은 정진동은 넝마주이들과 자주 머리를 맞댔다. 청소 노동자들을 조직한 경험이 생각나서다. 결국 이해당사자가 직접 나서야 자신들의 노동조건과 환경을 개선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20명의 넝마주이들로 청사클럽을 조직했다. 서로의 어려운 삶을 공유하고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자는 취지였다. 이들이 실천한 첫 번째 문제는 의복 문제의 개선이었다. 그들이 작업하면서 입는 옷은 누더기였다. 일하는 중에 옷이 더러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일상복도 똑같은 옷을 입었다.
정진동은 의복이 입는 이의 자존감과 관련된다고 생각했다. 평상시에 깔끔한 옷을 입어야지 스스로 자존감도 높아지고, 넝마주이를 바라보는 남들의 시선도 달라질 것이라고 봤다.
정진동은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넝마주이를 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고 의류 수집에 협조를 구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났다. 선교사 린다였다. 린다는 정진동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청주로 왔다.
실태를 확인한 그는 서울로 올라가 양복과 넥타이, 의류 100여 점을 모아 청주로 보냈다. 새 옷을 입은 넝마주이들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현양원 원장은 잔뜩 뿔이 나서 넝마주이들에게 호통을 쳤다.
"정 목사는 너희들을 이용해 살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속으면 모두 너희 신세 망친다. 누가 너희들에게 옷을 거져 주겠냐? 그를 따라가면 현양원에서 모두 쫓아 버리겠다. 당장 그 옷 모두 벗어 서문시장에 나가 팔아버려라"(정진동, <저 평등의 땅에>, 1992)
청사클럽은 이후 지지부진하다가 소멸됐다. 청사클럽이 해체된 이유는 비단 현양원 원장 때문만은 아니다. 청주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그들에게 협박을 했기 때문이다. "까불면 죽을 줄 알아!" 넝마주이들의 인권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유신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