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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중러 3국 국경이 맞닿은 훈춘 용호각 전망대에서 기념촬영한 일행들. 가운데 3국 국기가 보인다.
조중러 3국 국경이 맞닿은 훈춘 용호각 전망대에서 기념촬영한 일행들. 가운데 3국 국기가 보인다. ⓒ 오문수

중국 동북 3성 2일 차 여행은 호텔 모닝콜로 시작됐다. 아침 6시 모닝콜을 듣고 창문 커튼을 여니, 새벽인데도 해가 중천이다. 룸메이트인 동아지도 대표 안동립씨가 경도를 확인한 후 해가 중천에 뜬 이유를 설명해줬다.

"우리가 있는 연길의 경도가 129° 30'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포항 정도입니다. 북경 시각을 이용하면 한 시간 늦어졌는데도, 경도를 보면 우리나라 동해안이니 해가 빨리 뜰 수밖에 없어요. 물론 저녁 5시면 해가 집니다."

나는 지도 전문가인 안동립 대표와 함께 여행하는 게 좋다. 몇 년 전 그와 함께 몽골 여행 갔을 때 가이드가 방향을 잃는 일이 있었는데, 그가 방위각을 계산해 일행이 갈 방향을 찾아주기도 해서 몽골 가이드들이 탄복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그는 중국 동북 3성에 생긴 산지와 평야, 늪지대의 배경과 이유도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해줬다.

두만강이 이렇게나 얕았나

 훈춘에 있는 용호각 전망대 모습으로 중국과 러시아 관광객이 많이 방문해 있었다
훈춘에 있는 용호각 전망대 모습으로 중국과 러시아 관광객이 많이 방문해 있었다 ⓒ 오문수

둘째 날 목적지는 조-중-러 3국이 국경을 접하고 있는 훈춘이다. 연길에서 훈춘까지 가려면 152km를 달려야 한다.

한국보다 추운 날씨라 도로변엔 이미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있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을하늘이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어째 가슴속이 싸해온다.

두만강을 따라 펼쳐진 북한 쪽 마을이 눈에 밟혀서다. 채널 A, 북한 이탈주민들이 다수 출연하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 줄여서 '이만갑' TV프로그램을 나는 자주 본다.

거기서 탈북자들이 자주 "강폭이 좁은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는 얘기를 하곤 했지만, 실제로 보니 정말 얕았다. 한국 지도로 치면 오른쪽 북한 머리 위치에 있는 두만강이 이렇게나 강폭이 좁고 강물이 얕은지는 몰랐다.

어떤 곳은 무릎까지 옷을 걷어 올리면 강을 건널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얕았다.

 훈춘 용호각에서 촬영한 북한측 마을 모습으로 군인감시 초소와 마을이 보인다. 거리가 멀어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훈춘 용호각에서 촬영한 북한측 마을 모습으로 군인감시 초소와 마을이 보인다. 거리가 멀어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 안동립

그러나 북한을 마주 보고 있는 두만강 변 곳곳마다 고성능 감시카메라가 보이고 철조망에는 전기가 흐른다는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아예 두만강 주변의 지정된 곳을 제외한 곳에서는 차를 세울 수도 없단다. 버스에서 북한 쪽을 바라보니 소를 끌고 가는 농부의 모습도 보이고 김일성 김정은 부자의 초상화도 보인다.

조-중-러 3국 국경을 마주한 훈춘

연길을 떠난 버스가 세 시간쯤 달려 도착한 곳은 조중러 3국 국경이 접해 있기로 유명한 훈춘이다. 가이드는 말했다.

"훈춘에서 아침에 닭이 울면, 여기 3국 국경 마을에 울린다고 합니다."

총 12층으로 된 용호각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러시아 하산역이 보이고 두만강 건너 남쪽에는 나진이 보인다. 그러니까 한쪽은 러시아, 한쪽은 중국, 한쪽은 북한인 셈이다. 전망대에는 러시아와 중국 관광객이 보이고 한국인은 우리 일행뿐이었다.

저 멀리 두만강을 가로질러 러시아 하산으로 가는 철교가 보이고 철교 부근에는 배 몇척이 보인다. 감시선인지 낚싯배인지 모르지만 천천히 유람하고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노랫말이 떠오르며 시야가 흐려졌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

 훈춘 용호각에서 촬영한 두만강 하류 모습. 북한 나진에서 러시아 하산으로 가는 철교 모습으로 두만강을 따라 조금만 더내려 가면 동해바다인데 중국측 안내간판에는 일본해라고 적혀 있었다.
훈춘 용호각에서 촬영한 두만강 하류 모습. 북한 나진에서 러시아 하산으로 가는 철교 모습으로 두만강을 따라 조금만 더내려 가면 동해바다인데 중국측 안내간판에는 일본해라고 적혀 있었다. ⓒ 오문수

통일이 됐더라면 두만강도 우리 땅이었을 텐데, 새삼 가슴이 아프다. 망원경으로 북한 나진 마을을 살펴보니 커다란 간판에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라는 현수막과 글씨가 보인다.

밤이면 화려한 불빛을 비추며 잘사는 중국쪽 마을, 그럼에도 그걸 부러워하지 말자는 북한 측 안간힘처럼 보였다.

국경선은 인간이 설정한 인위적 분단선이다. 그런데 우리 땅은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선을 그었다. 일행과 함께 중국 동북 지방 끝에 있는 '밀산'까지 다녀오는 동안 한강만큼 넓은 목단강도 보았다. 만약 옛 고구려 땅이었을지도 모를 흑룡강까지 우리 땅이었다면 어땠을까?

전망대 꼭대기 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보면 중국에서 전시해 놓은 역사 자료와 두만강에서 채취한 수석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하던 조선인들에 관한 기록도 있었다.

훈춘 관광을 마치고 연길로 돌아오는 길에는 경신평야가 있다. 가이드가 경신대학살에 대해 설명해줬다.

청산리전투(1920.10.21.~1920.10.26)에서 패한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학살된 조선인은 3469명에 달했다. 이 숫자는 확인된 숫자이고, 미확인된 숫자를 포함하면 1만명은 될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수몰되어 들어갈 수 없는 홍범도 장군 봉오동 전적지

중국 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일행이 방문한 곳은 봉오동 전적지다. 1919년 3월 1일 한반도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에 영향받은 중국 동포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연변 각지에 흩어져 살던 3만여 동포들이 12일 후인 3월 13일 용정시에 모여 비무장 독립만세운동을 벌였지만, 일본 경찰의 발포로 인해 그 즉시 14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 중국동포들은 무장 항일 투쟁으로 방향 전환했다.

무장 항일 투쟁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홍범도는 일본군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일본군은 1920년 6월 7일 홍범도를 잡으러 봉오동으로 들어왔고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포위망에 걸려 157명이 사살되고 200여명이 부상당했단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무찔렀던 봉오동 전적지는 현재 저수지로 변모해 출입금지 구역이 됐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무찔렀던 봉오동 전적지는 현재 저수지로 변모해 출입금지 구역이 됐다. ⓒ 오문수

봉오동 전적지는 현재 저수지가 되어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다. 지명도 봉오동에서 '수남촌'으로 변경되었다.

할 수 없이 일행은 10여분을 달려 봉오동 전적지 뒤편에 있는 고려인 마을을 방문했다. 풍경을 보니, 촌로 몇 명이 집 앞에서 담소를 하기도 하고 들판에서는 옥수수 수확이 한창이었다.

몇 채 되지 않은 마을이었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마을 길을 지나다 한 기와집을 발견했다. 사람이 살지 않아 잡초 우거진 마당 한 켠에 세워진 안내 간판에는 연형묵이 태어난 집으로, 그의 아버지 연희상이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1990년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렸을 때 북한측 수석대표로 서울을 방문했던 연형묵 총리가 태어났던 집 모습. 안내간판에는 그의 부친 연희상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1990년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렸을 때 북한측 수석대표로 서울을 방문했던 연형묵 총리가 태어났던 집 모습. 안내간판에는 그의 부친 연희상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 오문수

연형묵은 1990년대 초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렸을 때 북한측 수석대표로 서울을 방문했던 북한 측 총리였다.

 홍범도의 봉오동전적지 뒤편에 있는 고려인촌 모습. 뒤에 보이는 산봉우리만 넘으면 봉오동이 있다. 한국의 시골농촌 마을을 닮았다
홍범도의 봉오동전적지 뒤편에 있는 고려인촌 모습. 뒤에 보이는 산봉우리만 넘으면 봉오동이 있다. 한국의 시골농촌 마을을 닮았다 ⓒ 오문수

고려인 마을 뒤편 나지막한 고개만 넘으면 봉오동 전적지가 있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은 봉오동 지형을 잘 아는 중국 동포들의 안내로 매복 작전을 펼쳐 승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들었다.

마을회관으로 보이는 집 앞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장승이 서있고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자'가 세워져 있어 여기가 고려인 마을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다음 일정이 있어 서둘러 나오느라 사진 촬영을 못한 게 아쉽기만 하다.

 두만강변 도문시에 설치된 안내간판으로 조선족들이 사는 지역과 간단한 설명문이 적혀 있었다. 지도 상단 오른쪽 끝에 노랗게 보이는 곳이 중국동포들이 많이 사는 동북3성이다. 일행은 동북 3성 2천킬로미터를 돌아보았다. 뒤편에 보이는 산은 북한쪽 산이다.
두만강변 도문시에 설치된 안내간판으로 조선족들이 사는 지역과 간단한 설명문이 적혀 있었다. 지도 상단 오른쪽 끝에 노랗게 보이는 곳이 중국동포들이 많이 사는 동북3성이다. 일행은 동북 3성 2천킬로미터를 돌아보았다. 뒤편에 보이는 산은 북한쪽 산이다. ⓒ 오문수

두만강 인근 '도문시'에 들러 구경하려는데, 가이드가 말하길 "단속반원이 있는 곳에서 북한쪽 사진을 찍으면 벌금 낸다"며 '사진 촬영 금지'를 말한다.

실제 일행 중 몇몇이 카메라를 꺼내들자, 가이드는 사진 촬영을 단속(?)했다. 노란조끼 입은 이들이 단속반원이니 조심하라는 얘기였다(아마도 중국 측 관계자일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아예 멀리 떨어져 단속반이 안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저멀리 북한 쪽 강변 곳곳에는 군인 초소가 보이고, 소 몇 마리가 느릿느릿 걸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가슴이 아렸다. 왜 북한 쪽만 보면 가슴이 아프고 아릴까? 대한민국이 여전히 통일이 안 된, 앞으로도 '분단국가'일 것이라는 데 속이 상해서일 것이다.

나는 6.25 전쟁이 끝나던 해 1953년에 태어났고, 군인 시절에도 최전방에 근무하면서 눈 앞에서 분단된 조국을 목격해야 했다. 한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따로 나뉘어 살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팠었다.

그 뒤 교사일 땐 금강산 관광이 허락된 시기에 중학생들을 인솔하고 수학여행을 갔다가, 방문증에 물이 튀었다는 등 별 이상한 이유로 북한 당국에 한 시간 정도 잡혀있다 풀려난 황당한 경험도 있다(관련 기사: "공화국 서류를 더럽혔다" 북한에 한 시간 억류되다 https://omn.kr/o0vp ).

거기 서 있자니 온갖 관련한 기억들이 일순간 몰려와 감정이 복잡해졌다. 그런 그때 내 귀에 들리는 소리.

"나는야~ 당신의~ 사랑의 나무꾼~"

광장 조형물 아래에서는 중국 동포들로 보이는 노인들이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 소리에 맞춰 손을 잡고 춤추고 있었다.

 도문시 광장에서 우리말 노래에 맞춰 흥겹게 춤추는 사람들.
도문시 광장에서 우리말 노래에 맞춰 흥겹게 춤추는 사람들. ⓒ 오문수

광장 중앙에 서서 묘한 양가감정에 빠져 들었다.

강 건너 북한 쪽을 바라보면 가슴이 아팠는데, 도문 광장 북쪽 조형물 아래에서 우리말 노래를 들으며 손잡고 춤추는 중국 동포들을 보면 웃음이 났다.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나는, 정말이지 묘한 상황이었다.

 연길 야시장 모습. 꼬치구이를 파는 아저씨한테 사진 찍겠다고 했더니 활짝 웃어줬다
연길 야시장 모습. 꼬치구이를 파는 아저씨한테 사진 찍겠다고 했더니 활짝 웃어줬다 ⓒ 오문수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립니다.


#중국동북3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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