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가슴에 유방암 의심됩니다. 외래 진료받으시길 바랍니다.
건강검진 결과지에 적혀있던 문구다. 딱 한 줄인데 한참을 반복해서 읽었다. 마침 함께 있던 딸아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결과지를 챙겨 서둘러 침실로 들어갔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인터넷으로 유방암 관련 글을 찾아 읽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첫 문장을 던져주면 각자 소설을 써 보는 글쓰기 수업처럼, "만약"으로 출발하는 온갖 종류의 시나리오가 밤새 펼쳐지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맨 먼저 떠올랐던 건 5년 전 세상을 떠난 A다. 해마다 건강검진을 받았음에도 발병 후 3년을 넘기지 못했다. '내게 남은 시간이 3년이라면'으로 시작되는 사고 실험이 이어졌다. 당연히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들이었다. 죽기 전에 가봐야 할, 해야 할, 등으로 시작하는 책의 제목이 뇌리를 스쳤다.
의사를 만나기까지 2주가 걸렸고, 그 사이 시간의 속도는 0에 가까워졌다. 그 속도의 삶 속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때마침 한국의 7월은 역대급 더위로 밤에도 뜨거웠다. 내 삶 중 2024년 7월이 불타오르는 지구에서 삶아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책 보기, 영화 관람, 글쓰기, 걷기 모두 불가능했다. 눈을 뜨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24시간이 떠억 버티고 있었고, 그 하루를 인지하는 매일은 공포에 가까웠다. 그저 숨 쉬고 살아 있으면서 시간이 소진되기만을 기다렸다.
지옥 같은 2주의 시간을 지나 의사를 만났고 2주 뒤 수술했다. 조직검사 결과 다행히 악성이 아니어서 2박 3일 입원 후 퇴원했다. 환자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으며 생각했다. '수술은 끝났고, 별일 없었어.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거야.' 무기력했던 지난 한 달은 떠올리기도 싫었다. 그 기간을 통째로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기대와 달리, 내 몸은 수술 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에 걸렸다. 코로나는 몸의 가장 약한 고리를 건드린다고 하는데, 내 코로나 후유증은 감당할 수 없는 무기력증과 피로감이다. 아침부터 눈 아래 다크 서클이 걸린다. 하루 종일 피곤하고 졸리고 우울하다. 바닥에 붙어 버린 내 몸을 겨우 끌고 다니는 느낌이다. 당연히 심리적, 정신적으로도 가라앉는다. 보는 사람마다 얼굴이 상했다, 어디 아프냐는 말을 건넨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뒤늦은 갱년기일까,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일까?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끌고 가 체육관을 등록하고, 트레이너와 약속을 잡고, 공진단, 발포 비타민, 홍삼을 챙겨 먹으며 회복과 극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내 몸은 수술 전, 코로나 확진 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건강한 것도 아픈 것도 아닌 낯설고 불편하고 짜증 나고 힘든 시간이 이어졌다.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잉여의 시간'이 한 달에서 두 달, 두 달에서 석 달로 늘어났다.
힘이 된 이야기, 위로의 언어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 도서관 북토크에서 K 작가를 만났다. 강연의 제목은 <삶을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글쓰기>. K 작가는 독자들 앞에서 자신의 유방암 수술과 투병의 경험을 나눴다. 수술 전, 누우면 사라지는 A컵의 가슴이 복원 수술 후 B컵이 되었다고 말했다. 글쓰기가 커다란 슬픔이나 고통에서 벗어날 힘, 세상을 훨씬 재미있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준다면서. 그 말에 나는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터트렸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난 3개월 동안 나는 글을 쓸 수 없었다. 타인에 의해 읽히고자 하는 글에는 반드시 공적인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데, 나의 경험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올해 안에 마무리해야 할 원고가 줄을 서 있는데, "유방암 의심 사건"의 경험이 "나부터 해결하시지"라며 끊임없이 방해했다. "상대적으로" 덜 치명적일지라도, 오픈하기 어려운 사적인 것일지라도, 그 경험이 나의 일상을 무너트린다면 "그 경험"부터 글로 마주해야 했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내면의 감정들이 몸 구석구석에서 썩어 문드러졌다. 쿨 한 적, 별일 아닌 척 행동했지만 꽤 힘들었다고 얘기하고 싶었고, 없던 일처럼 지웠다고 했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를 원했다. 혹시 우울증 아닐까, 수십 번 생각하면서도 그런 내가 더 한심하고 나약해 보여 아닌 척했다. 그러는 사이 내 심신은 철저히 왜곡되었다.
7월 이후 내 삶에 "유방암"이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나처럼 태생적 공감 능력이 취약한 사람에게, 그 능력이 살면서 키워질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다행인가. 예전보다 천배는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그 단어를 인지한다. 덕분에 유방암이 관련된 사연에 눈곱만큼은 더 예민한 감수성과 공감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믿고 싶다). 잘 모르는 사람이든, 조금만 아는 사람이든, 때론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누군가가 유방암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된 한 선배가 40대에 겪었던 유방암 경험을 털어놓자, 그와의 관계가 와락 가까워졌다. 나는 먹던 베이글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가 "위로의 언어"에 특별히 서툴다는 것도 깨달았다. 잘 다가가지 못하고, 다가갔다가도 엉뚱한 말만 내뱉고 길게 후회한다. 그 후회 때문에 또 잘 다가가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오래전 유방암으로 고통받고 다행히 잘 치료했던, 유학 중 만난 미국 친구에게 보냈던 내 위로와 응원은 충분했을까? 그저 예의 바른 친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나의 영혼 없는 모습에 친구는 더 외롭고 아프지 않았을까? 평소 불편했던 동료 교수의 투병 소식을 들었을 때,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 결국 보내지 못했던 문자도 후회된다.
감사하고 다행인 것은, 공감 능력과 위로의 언어가 간접경험을 통해서도 키워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화 <카모메 식당>(감독:오기가미 나오코)의 사치에가 눈물을 터뜨리는 미도리에게 섣부른 질문이나 위로 대신 식탁에 휴지를 내려놓는 장면, <나의 올드 오크>(감독:켄 로치)에서 가족 같은 강아지 마라를 잃은 슬픔에 두문불출하는 TJ에게 찾아가 "때론 위로보다 밥이 더 필요한 순간이 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 화들짝 반갑다. 상황에 너무나 적절한, 닮고 싶고 따라 하고 싶은 위로의 언어다. 그들의 사례를 보고 배우며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한글날에서 하루가 지난 10월 10일, 스톡홀름에서 날아온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모처럼 웃었다. 한강의 소설에는 위로의 언어가 넘친다. 그가 가진 공감 능력과 건드리면 찢어질 것 같은 섬세함으로 잡아낸 문장들 덕분이다. 때론 너무 심하게 가슴을 후벼 파서 읽기가 두렵지만, 책을 덮고 나면 내 언어의 집이 풍요로워졌음을 느낀다.
"가슴 한편은 조여들며 불안한데, 머리 위로 계속 얼음물이 끼얹어지는 것처럼 정신이 또렷했어. 이런 느낌을 자유라고 부르는 건가, 생각했던 기억이 나(작별하지 않는다, 80쪽)" 같은 문장이나, "한 번에 수천 개의 불꽃을 쏘아 올리는 것 같은 폭약 소리. 먼 비명 소리. 한꺼번에 숨들이 끊어지는 소리. 놀란 혼들이 한꺼번에 몸들에서 뛰쳐나오는 기척(소년이 온다, 64쪽)" 같은 문장은, 읽는 이들을 4.3이나 5.18 현장으로 데리고 간다. 직접 경험할 수 없고,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도 공감의 문을 열어준다.
그가 넓고 깊게 확장해 놓은 언어의 감수성 때문에 위로받는 사람이 생긴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한 번쯤,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게 되니까. 그럴 때는 다른 사람의 문장을 빌어서라도 내 감정을 인지하고 위로받아야 하니까. 문학이, 예술가가 왜 필요한지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아프고 약한 몸도, 그런 삶도 내 것이다
K 덕분에 이 글을 썼고,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이해했다. 원래 병은 소문내는 것이라는 말, 그래야 좀 더 좋은 정보, 응원, 위로를 얻을 수 있다는 말에 대체로 동의하는데, 나는 꼭 필요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수술에 대해 함구했다. 마침 방학 중이라 공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었다. '별 일 아니니까 괜히 호들갑 떨고 싶지 않아서'라는 게 이유였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아픈 몸', '약해진 몸'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했고, 타인에게 들키기 싫었다. '생산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은 몸'을 견딜 수 없었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수 없고 낮 시간에도 소파에 기댈 수밖에 없는 나의 몸과 그 시간을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마음은 분노, 절망, 답답함으로 부글거렸다. 어서 빨리 극복해 '정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픈 상태를 그대로 봐 달라고 절규하는 몸에게, 어서 일어나 움직이라고, 새 책을 쓰고, 논문을 완성하고, 새로 맡은 직책에 최선을 다하라며 몰아붙였다. 이제 알겠다. 내 병의 뿌리는 가슴속에서 자라고 있던 석회나 코로나 확진이 아닌, 비생산적인 내 몸에 대한 거부였다.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없는 것의 쓸모 있음'이 떠오른다. 걸어가는 데 발을 딛는 땅만이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발을 딛는 만큼만 땅이 있고, 나머지 땅이 정말 없다면, 즉 디딜 자리만 땅이고 나머지가 완전 허공이라면 과연 사람이 걸을 수 있겠는가? (장자의 무용지용을 생각함, 고현숙의 학부모 코칭, 한겨레신문, 2008년 3월 23일에서 재인용)
아픈 몸도, 약해진 몸도 내 몸이고, 그 몸으로 살아야 할 삶도 내 삶이다. 아서 프랭크의 책 제목처럼 우리는 때로 "아픈 몸을 살아야" 한다.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지난 몇 달의 경험 덕분에, 내가 조금은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른 누구보다 특히 나 자신에게.
*제목은 동명의 책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봄날의책, 2017>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