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3월 5일, 두만강 국경 연추(크리스키노)에서 단지동맹이 결성되었다. 손가락[指]을 끊어[斷] 함께[同] 약속한다[盟]는 뜻의 단지동맹(斷指同盟)은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 유지를 활동 목표로 내건 결사체였다. 조직원으로는 안중근 ․ 김기룡 ․ 강순기 ․ 정원주 ․ 박봉석 ․ 유치홍 ․ 김백춘 ․ 백규삼 ․ 황영길 ․ 조응순 ․ 김천화 ․ 강창두 등 30대 초반 12명이 가입했다.
이날 12명은 당장 의병을 크게 일으키기는 어려운 만큼 장기적 계획을 추진하여 일제와 일전을 벌이자고 결의하면서 서로를 격려했다(미주1). 그런데 불과 일곱 달 뒤인 10월 26일 안중근은 이토를 사살했다. 장기적 계획 아래 군사적 힘을 기르자고 맹세했던 단지동맹 동지들과 약속을 홀로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동맹 동지들과의 장기전 약속을 어기기로 결심
사실 안중근은 단지동맹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다른 동지들과 정세분석이 크게 달랐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더 이상 대규모 의병을 모집하고, 또 항일전을 벌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의열 투쟁으로 전환해야 옳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안중근의 결심에 부채질을 한 소식까지 들려왔다. 이토의 만주 방문 예정 기사가 현지 신문에 실렸다. 보도를 보면서 안중근은 '의병들이 첫 번째 암살 대상으로 꼽는 원흉이 이토 히로부미다! 그 자가 러시아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고? 하늘이 우리 조국을 돕는구나!' 하고 남몰래 쾌재를 불렀다.
이토가 온다는데 그 자를 처단해야지 무슨 장기전?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이 '어찌 장기 계획에 연연할 것인가? 그 어떤 일도 그 자를 처단하는 거사에 견주면 급한 것도 중요한 것도 있을 수 없어! 그렇지 않은가?" 묻고는 "그렇지! 그렇고 말고!' 하며 자문자답했다. 그러면서 이토가 저지른 죄악들을 열거해 보았다.
하나, 한국의 민 황후를 시해한 죄
둘,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셋, 5조약(1905년, 을사늑약,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과 7조약(1907년, 군대해산, 일본인 차관 임명)을 강제로 체결한 죄
넷,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다섯,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여섯,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일곱,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여덟, 군대를 해산시킨 죄
아홉, 교육을 방해한 죄
열, 한국인의 해외 유학을 금지시킨 죄
열하나,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운 죄
열둘,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자청한다고 세계를 속인 죄
열셋, 한국과 일본 사이에 싸움이 그치지 않아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도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천황을 속인 죄
열넷,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미주2)
안중근은 곧바로 이토 처단 준비에 들어갔다. 무엇보다도 먼저 거사를 함께 실행할 동지부터 규합했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 교민들 중에서 자신과 가장 친한 최재형, 유진률, 이강, 우덕순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들 블라디보스토크 교민 신문인 대동공보사의 임직원들이었는데, 안중근도 한때 그곳에서 기자로 일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마침내 만주 침략의 본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지요. 국권회복을 위해서도 그렇고,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이 자를 반드시 처단하고 말 작정이오."
안중근은 본래 명사수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즉 이토를 사살할 자신감이 넘친 것도 당연했다.
"모든 독립지사들이 처단 대상 1호로 지목하고 있는 자가 바로 이토요!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은 일본의 압력을 두려워하는 러시아가 우리의 독립운동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탄압하고 있습니다. 이토만 처단하면 우리의 독립 열망이 얼마나 강력한지 세계만방은 물론 러시아 당국과 러시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어요.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왔다, 그 말씀입니다!"
안중근이 결의를 보이자 최재형 등이 한결같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호응했다.
"옳은 말씀이요! 원흉 이토를 처단할 수 있다면 우리 민족의 앞날에는 서광이 비칠 게요! 우리가 힘을 보태리다!"
그뿐이 아니었다. 대동공보사의 집금 회계원 우덕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이토를 저격하겠소. 하얼빈 역에서 기필코 이토의 숨을 끊어버리겠소!"
그렇게 의기는 높았지만 총을 구입할 자금은커녕 하얼빈으로 이동할 여비조차 없었다. 모두의 얼굴에 짙게 그림자가 드리워졌지만 안중근만은 쾌활한 음성으로 장담했다.
"자금은 내가 마련할 테니 염려들 않으셔도 됩니다."
안중근은 황해도 출신 의병장 이진룡을 만났다. 그 무렵 이진룡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 중인 것은 무기 구입 때문이었다. 즉 이진룡은 현재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내가 이토를 처단하려 하오. 그 일로 기천(이진룡)에게 특별히 부탁할 것이 있어서 찾아왔소."
이진룡이 반색을 하면서 되물었다.
"이토를 죽인다? 그렇게만 된다면 동북아 정세의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큰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좋은 계획이오. 그래,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소?"
"하얼빈에서 이토를 처단하려면 무기를 갖춰야 하고, 실행을 맡을 동지들의 여비와 숙식 경비가 필요하오."
안중근은 류인석을 연해주 의병대장으로 모시고 참모중장으로서 의병 활동을 했는데, 이진룡 또한 본래가 류인석의 문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과 이진룡은 1879년생으로 동갑이었다. 이진룡은 1915년 12월 광복회 만주 지부, 즉 길림 광복회가 창립될 때 초대 지부장을 맡게 되는 인물답게 성격이 호방하고 활기찼다(그의 순국 후 2대 지부장은 김좌진).
"허허, 내가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현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찾아 왔으니, 어찌 내놓지 않고 버티겠소."
"허허허."
"비록 내 수중에 돈이 없다 한들 이토를 죽이는 데 쓰일 군자금이라면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장만해 드릴 터인즉, 흔쾌히 지원을 해 드리겠소. 다만 이 돈이 나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 황해도 의병들이 무기를 사오라고 모아준 군비(軍費)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오. 반드시 이토를 처단해야 한다, 그 말이오!"
"물론이지요. 내 기필코 이토를 처단할 것이니 기쁜 소식을 기다리시오."
그렇게 하여 드디어 10월 21일, 안중근과 우덕순은 하얼빈으로 출발했다. 두 사람은 10월 22일 밤 9시경 하얼빈에 도착했다. 혹 수상하게 보여 일이 틀어질까 봐 두 사람은 기차 안에서도 다른 좌석에 따로 떨어져 앉아 서로 모르는 사이인 양 행세했다.
하얼빈에서 조도선도 거사에 동참했다. 대동공보사 하얼빈 지국장 김형재가 그를 소개했다. 세 사람은 열차가 정차하는 채가구와 하얼빈 역에서 거사를 감행하기로 하였다. 채가구 역은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 역은 안중근이 맡았다.
이토가 어디서 하차할지 몰라 세 역을 나눠서 저격 준비
하지만 채가구에 배치된 우덕순과 조도선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투숙한 여인숙의 주변 일대를 러시아 경비병들이 철통같이 에워싸버렸다.
이제 안중근밖에 없었다.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먼저 이토를 저격하고, 만약 실패하면 우덕순이 채가구역에서 2차 저격을 감행하기로 했었는데, 그런 기대는 버려야 했다. 그래도 하늘이 도왔는지, 안중근은 하얼빈 역의 이토 환영식장 안으로 아무런 제재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애당초 러시아는 동양인들에 대해 검문을 실시할 방침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일본인의 출입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며 거절했다. 덕분에 안중근까지 자유롭게 식장 안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일본의 방침이 이토의 목숨을 끊는 데 크게 기여한 셈이었다.
일제의 일본인 우대 정책이 이토 처단에 도움
9시 15분, 시간이 되자 기차에서 내린 이토가 군악대의 음악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환영 인파의 만세에 짓눌려 다른 소리들은 모두가 묻혀 버렸다. 이윽고 일본 측 거물들이 앞으로 다가왔다.
때를 기다리던 안중근이 권총을 꺼내 맨 앞에 선 자의 가슴을 향해 통렬하게 세 발 쏘았다. 바로 이토였다. 안중근은 '혹 이 자가 이토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은 걱정에 그 옆의 인물들에게도 총격을 가했다.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토뿐만이 아니라 그들 셋도 모두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명사수 안중근, 동양평화파괴범 이토를 정확히 저격
안중근은 적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바로 '코레아 우라!'를 우렁차게 세 번 연호했다. 사반 천지가 온통 러시아 군인들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대한 만세!'를 러시아말로 외친 것이었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안중근이 현장을 벗어나지 않은 것은 이토 처단이 한국 독립운동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당당히 알리기 위함이었다. 환영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이토는 그것조차 알지 못했다. 이토는 피격 30분 만인 10시경에 숨졌다.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 둔 어머니의 말씀
1910년 2월 14일 일제 관동도독부 형사법정은 사형을 선고했다. 안중근의 두 동생은 진남포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달려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 조마리아는 두 아들에게 '여순으로 가서 형에게 전하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근은 큰일을 했다. 만인을 죽인 원수를 갚고 의를 세웠으니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큰일을 하였으니 목숨을 아끼지 말라. 일본 사람들이 너를 살려줄 까닭이 없으니 비겁하게 항소 같은 것은 하지 말라. 깨끗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어미의 희망이다. 이제는 평화스러운 천당에서 만나자."
3월 26일, 안중근은 여순 감옥 묘지에 묻혔다. 그 이후 안중근의 묘는 묻힌 자리가 멸실되어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는 나라가 회복이 되면 자신을 고국땅으로 가져가 반장(타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고향으로 가져가 장례를 치름)해달고 유언했다.
그러나 독립된 지 8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가 두 동생에게 남긴 유언은 오늘도 여순 감옥 위 허공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미주1) 김삼웅, 《안중근 평전》(시대의 창, 2009), 189∽193쪽.
미주2) 안중근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이토의 열다섯 가지 죄상이 실려 있다. 그런데 '열다섯, 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인 태황제를 시해한 죄'는 사실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생략했다.
미주3) 《안응칠 역사》에는 '100원만 꾸어달라고 사정을 했으나 그(이진룡)는 끝내 거절하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위협을 가하여 강제로 100원을 빼앗았다. 자금이 생기니 일이 반은 이루어진 것 같았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에 대해 김삼웅은 《안중근 평전》 203쪽에 '일제의 신문을 받을 때 의병장 이석산(이진룡)을 보호하기 위하여 빼앗은 것으로 진술(기술)한 것은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한다. 이 글에서는 김삼웅의 추정을 따른다. (관련기사:
"죽어서 천년 가리"... '큰 손 펼친 젊은이' 안중근)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