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말 |
청진기는 우리 몸 안에 심장과 호흡 소리를 듣고 몸 상태를 진단하는 도구다. 이처럼 기획 연재 <청진기>는 청년의 시각으로 다양한 사회 문제를 조명하고,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찾는다. 이를 위해 당신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개개인의 삶마다 사회에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곧, 당신이 필요하다. |
자살은 한국인의 주요 사망원인 중 하나다. 1992년에는 자살로 인한 사망률이 10위였으나, 2000년에는 8위, 2013년에는 4위로 상승했다. 이후 십 년이 지난 2023년에도 암, 심장질환, 폐렴, 뇌혈관질환 다음으로 5위를 차지하며 여전히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자살 문제는 한국 사회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제이며, 특히 제주 지역의 자살률은 전국에서 높은 수준이다.
제주의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다. 지난달 4일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3년 사망원인통계 결과>에 따르면, 작년 제주 지역의 연령표준화 자살률은 27.3명으로 전년 대비 3.8명 늘었다. 지역별로는 충남(29.4명), 충북(28.6명), 울산(28.3명)에 이어 네 번째로 높은 수치다.
사실 제주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전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자살률을 기록했으며, 2021년에 잠시 14위로 내려갔다가 현재 다시 증가하고 있다. 제주의 자살률이 높은 배경에 지역적 특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제주자살예방센터을 찾아, 제주 지역의 자살 특징과 그에 따른 자살예방책을 조사했다.
지역별 자살 특성에 맞춰 대응하는 자살예방센터
"자살예방센터는 지역의 '자살예방 시행계획' 수립을 지원하며, 지역의 자살 특성에 맞춘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관련기관과 연계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 자살 고위험군을 발굴하고 개입해 자살예방을 도모하지요." - 한꽃다운 제주자살예방센터 자살예방팀장
센터는 크게 '범사회적 자살예방 환경조성사업'과 '맞춤형 자살예방서비스 제공사업', '자살예방정책 추진기반 강화사업', '이용자 만족도 조사' 등을 운영하고 있다. 우선 자살예방 환경조성사업에서는 생명 존중 문화를 확산하고, 자살예방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홍보자료를 제작한다. 또 '자살예방의 날' 기념식을 주최하고, '자살보도 권고기준'에 따라 기사를 모니터링한다.
맞춤형 자살예방서비스 제공사업은 청소년, 중장년, 구직자, 실직자, 1인 가구 등 생애주기별로 특화한 자살대응체계를 구축한다. 자살예방정책 추진기반 강화사업에서는 '자살예방강사'를 양성하고, 사후대응사업 및 자살예방과 관련한 연구체계를 마련한다. 이용자 만족도 조사에서는 우울증 선별검사(Screening) 등 자살시도자 및 유가족의 사후관리를 위해 지역기초센터와 연계해 운영하고 있다.
제주에 추락사보다 가스중독사가 많은 이유
자살을 막기 위해서는 자살 수단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살 시도를 지연시켜 충동을 지나가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살 시도 후 생존한 사람 중 약 90%가 그 이후 자살로 사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통계청 <2022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전국 자살 수단은 목맴(49.7%) 추락(19.5%) 가스중독(14.5%) 순이다. 반면 제주는 목맴(47.4%) 가스중독(26.3%) 추락(8.0%) 순으로, 전국에 비해 추락사가 2배 이상 낮다. 이에 한 팀장은 "추락사는 지역의 지리·공간적 특성이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제주는 다른 지역과 비교해 고층 건물의 수가 적기 때문에 추락사도 적다. 또한 센터는 고층 건물 옥상에 '자살예방 현판'을 부착하는 사업을 통해 자살을 방지하고 있다.
제주에서는 추락사보다 일산화탄소 등 가스중독에 의한 자살이 훨씬 많다. 센터는 일산화탄소 판매 업체 및 '생명사랑실천가게'와 협약해 번개탄 포장지에 자살예방 스티커를 부착하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으며, 상시 모니터링 시스템과 판매 업체 자살예방교육 이수 등을 통해 자살 위험에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자살자는 타인에게 짐이 된다는 착각에 빠진다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원인은 매우 복합적이라 하나로 정의할 수 없지만, 전문가들은 자살로 이어지는 심리를 몇 가지 유형화했다. 심리학자 토머스 조이너는 '타인에게 짐이 된다는 느낌'과 '좌절된 소속감'을 자살의 가장 중요한 주관적 요인으로 보았다. 책 <심리부검>의 저자 서종한 교수도 이와 비슷하게 설명한다. 서 교수는 "가족에게 짐이 된다고 믿는 사람은 내가 없으면 가족이 더 자유로워지리라 믿어 자살을 택한다"며 "자신이 생각하기에 자살이 가져오는 부정적 결과를 살펴보고, 그 결과가 감수할 만하다고 판단할 때 실행에 옮긴다"고 밝혔다.
자살시도자는 또한 지속적인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현재 상황이 미래에도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비관적 신념을 갖는다. 서 교수는 "맞닥뜨린 문제를 숙명처럼 여기게 되면서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점점 '이것 아니면 저것'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변질된다"고 밝혔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죽음을 택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자살 사회학 연구의 시초인 에밀 뒤르켐은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고 느낄 때 선택하는 죽음을 '운명론적 자살'이라 정의했다.
이를 제주 지역에 대입해 보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제주 지역 자살자 중에는 서비스직 및 판매직, 단순노무 종사자의 비율이 높으며, 자살 요인으로는 '경제생활 문제(31.7%)'가 가장 많다. 이는 대체로 정신적·정신과적 문제가 1순위를 차지한 다른 지역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이러한 차이는 관광업과 자영업 종사자가 많은 지역 특성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단순히 경제적 빈곤 문제 때문이라기보다, 관광업 불황이나 제주에 대한 사회 인식 변화 등 불확실한 미래의 외부 요인에 무력감을 느낀 탓이다.
자살자는 주변에 자살 신호를 보낸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를 암암리에 드러낸다.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어, 정서, 행동상에 변화가 나타나는 데, 그중에는 주변 가족이나 친구가 알아챌 수 있는 형태도 있다. 이를 '자살 위험 징후' 또는 '자살 위험 신호'라고 한다. 흔히 죽음에 대한 언급을 반복하거나, 최근 심각한 대인관계 좌절을 겪거나, 감추고 싶었던 사실이 드러나 수치심·죄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높은 자살 위험성을 가지는 요인에는 '정신과적 징후'가 있다.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며 우울과 혼란을 드러내거나, 망상·환청을 호소하는 경우 등이 포함된다. 특히 자살을 위한 도구를 구하려 하거나, 최근 1년 안에 자살 의도를 가지고 자살을 시도했다면 전문기관에 연락하는 등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이 밖에도 유서나 이별의 글을 작성하거나, 금전 문제를 정리하는 등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보이면 자살 위험성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자살을 막기 위해서는 서로 '게이트키퍼'가 돼야 한다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고, 자신을 도와주려 하고, 그로 인해 조금이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자살을 막을 수 있다. - 이홍식 외 공저. <자살의 이해와 예방> 157p
자살 동기가 있더라도 문제 해결의 희망이나 변화된 관점이 제시된다면 자살 위험성을 줄일 수 있다. 한 팀장은 자살을 예방하려면 "평소 본인의 마음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자살 생각이 들었다면 주변에 도움을 청하고, 전문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조성에 관한 법률' 개정에 따라 학교, 공공기관, 사회복지시설 등에서 매년 1회 자살예방 교육을 의무화하고 있다. 각 지자체의 자살예방센터 또한 자살위험 없는 지역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생명지킴이 양성' 교육을 시행 중이다. 이 교육의 정식명칭은 '게이트키퍼 훈련(Gatekeeper Training)'이라 불리며, 일상생활에서 누군가의 자살 징후를 발견했을 때 이를 신속히 돕고 적절한 전문기관으로 연결하는 과정을 배운다. 실제로 2013년부터 2022년까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에서 개발한 '보고듣고말하기' 및 '이어줌인' 교육 프로그램을 활용해, 전국에 200만 명이 넘는 생명지킴이를 양성했다.
여기서 게이트키퍼는 특정 직업이나 자격이 아닌, 자살을 감지하고 예방할 수 있는 '모든 주변 사람'을 의미한다. 이 훈련이 중요한 이유는 자살 위험자가 단번에 자살 생각에서 자살까지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살 위험자는 보통 자살 의도나 동기가 구체화되기 전에 반복적으로 자살 생각을 하는 시기를 거치는데, 그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다. 자살 위험자들이 자살을 통해 무엇을 해결하고자 하는지 들어주고, 이해하는 과정만으로도 자살률을 크게 낮출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아픈 점을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닌 '도움'이 필요한 상태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살아갈 희망을 새롭게 제시할 수 있다. 결국, 자살을 예방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타인의 작은 관심에서 시작하는 '사회적 안전망'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