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알고 나를 아는 '지피지기'(知彼知己)도 좋지만 때로는 나를 알고 적을 아는 '지기지피'(知己知彼)라도 필요할 때가 있다. 'K컬처'로도 불리한 '한류'(韓流)는 세계적인 트렌드가 됐지만 정작 국내에서 한류 연구학자는 많지 않고, 전문가들도 많지 않다.
특히 학문적 연구의 기초를 만들어갈 수 있는 대학에서의 활동은 극히 한정되어 있는데, 지난 1일 동국대가 '한류융합학술원(DUHA)'를 개원 세미나를 열고 본격적인 한류 아카데미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블랙핑크 로제와 세계적인 팝스타 브르노 마스가 협업한 '아파트'가 1일(현지시간) 영국 싱글차트서 2위를 차지하는 등 돌풍을 시작한 시점이라 현장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비영어권 1위를 차지한 <흑백 요리사>를 연출한 김학민 PD와 한국 예능의 개척자 김태호 PD 등 현장 전문가는 물론이고, 홍석경(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한류연구센터장), 정종은(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 등 국내 한류 전문가들이 같이 했다.
한류에 대한 정확한 파악부터 서둘러야
'지금은 한류학 시대, 한류의 재인식과 지속 가능성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는 지금 한류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데는 대부분 의견을 같이했다. 일반적으로 한류라는 표현은 1999년 11월 <북경청년보>가 <질투>, <사랑이 뭐길래> 등 드라마나 'HOT' 등 보이그룹이나 걸그룹이 인기를 끄는 현상을 '한류'(韓流)로 지칭하면서 생겨났다는 게 일반적이다.
이후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나 BTS 등이 K-팝의 인기를 연장했고,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이나 <오징어 게임> 등으로 인기를 끌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Hallyu'가 등재되고, <가디언>이나 <뉴욕타임스>도 인정하면서, 현상 자체는 인정받는 단계를 넘었다.
정종은, 홍석경 교수 등 외국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한 학자들도 쉽게 체감한 한류의 성장을 증언했고, 브라질 출신 방송인 카를로스 고리토씨도 마찬가지였다. 고리토씨는 "2008년 제가 한국에 올 때 만 해도 한국에 관심이 전무했다. BTS, 기생충, 흑백요리사 등 단계별로 인식이 넓어졌고, 즐기는 대상도 중산층에서 하이엔드층으로 확산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려의 이야기도 있었다. 방송사 PD 출신인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이훈희 대표는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북미시장에서 K팝의 비중은 5% 정도다. 15% 정도 되어야 주류라 할 수 있는데, 좀 멀다. 진짜로 큰 힘이 되기 위해서는 팬덤을 잘 만들어야 하고, 콘텐츠를 더 다양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SK브로드밴드 조영신 경영전략그룹은 넷플릭스에서 글로벌 1위는 <오징어 게임> 정도인데, 비영어권 1위가 세계를 제패하는 것처럼 선전하기도 한다. 한류지상주의를 경계하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더 깊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류의 발전 과정에서 정부 정책 등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정종은 교수는 "문체부는 너무 과하지도 약하지도 문화산업을 제어하는 '팔길이 원칙'과 '문화산업의 국가 기간산업화'의 관점에서 봤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서구 등에서 한류를 바라보는 시선 중 하나는 '한국 정부가 문화산업을 적극 육성해 한류가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본다'는 관점이 많아졌고, 외국의 한류 연구도 이런 관점이 많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내 학자나 현장에서는 정부의 역할에 부정적인 시선이 많았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으로 정부가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많다고 판단했는데,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진행한 정보 고속도로 건설이나 일본 등 해외문화 개방에만 긍정적인 점수를 주었다.
한류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도 있었다. 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김윤지 박사는 "문화산업이 국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2% 남짓이고, 한류와 산업을 연결하는 전문가도 부족하다. 학문적 정립을 통해 산업별 방향이나 이론화 연구가 더 실행되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에 한국의 대외 이미지나 기업 브랜드 가치 상승에서 한류의 역할은 경제적 가치로 쉽게 설명될 수 없다는 의견도 많았다.
이제라도 한류에 대한 학문적 연구 늘려야
만시지탄(晚時之歎)의 우려는 있지만 지금이라도 한류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하는데는 의견이 일치했다. 동국대 윤재웅 총장은 "예일대 특강 등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대학이 가진 인문학이나 예술적 역량을 모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학술원을 개원했는데, 대학원 등으로 확장해 한국 인문학이 헤쳐 모이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한류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은 다양한 분야에서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김태호 피디는 정길화 원장과의 대담에서 "현업 피디로 브로드웨이 등 다양한 학습을 통해 역량을 키워왔다. 그러다가 2000년대 중반 <나는 가수다>, <무한도전> 등의 방송 포맷이 수출되는 것을 봤다. 그간 한국 피디들은 외국에서 상당할 수 없는 '6개월에 120편' 같은 제작 경험이 있다. 한국 PD나 작가들은 충분한 경쟁력이 있는 만큼 이 자체로 한류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작비 등 한국의 제작 여건은 녹록지 않다. 김피디는 "홍콩 누아르의 단명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성과에 안주한 결과이기도 하다. 자체 제작 역량을 키우고, 제작 자본을 제공하는 금융이 협력해 이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발제자로 나선 홍석경 서울대 교수는 "서울대도 올해 다양한 인문분야가 결합해 '현대한국종합연구단'을 발족해 한류, 현대성, 가치와 정체성을 연구하고, 한류연구센터를 통해 한류연구 플랫폼 작업 및 이론적 탐색을 시작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과정에서 번역의 중요성이 확인됐는데, 문학 뿐만 아니라 한류 문화 이론도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동국대 등 국내대학은 물론이고 외국 대학 등과 협업을 통해 한류를 더 넓게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류융합학술원의 초대 원장은 방송인 출신 정길화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원장이 맡았다. <PD수첩>,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굵직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정원장은 <오징어 게임과 콘텐츠 혁명>(공저) 등의 저작을 내고, 중국 연수, 중남미 지사장 등을 통해 한류가 확산하는 현장을 지켜봤다. 현장과 정책을 통해 한류를 만난 통찰을 바탕으로 한류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흐름으로 건실하게 성장하는데 역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