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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도시'로 불리는 로스앤젤레스(LA)에 대한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처음 그 도시에 간 것은 1990년대 초반, LA 폭동이 일어난 직후였기 때문이다. LA 폭동은 과속운전으로 체포된 흑인 청년을 백인 경찰관들이 집단 구타한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로 촉발된 인종 폭동이었다. 당시 일부 시위대가 한인타운으로 몰려가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며 한인 사회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폭동은 LA에 잠재해 있던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표면화하며, 1980년대부터 논의되어 오던 도시 재정비의 시급성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LA 시 정부는 다운타운의 안전을 개선하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재개발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사업을 통해 민간 기업과 투자자들이 참여하면서 상업 시설과 문화공간이 들어서게 되었고, 새로운 일자리와 경제적 기회가 창출되면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특히, 월트 디즈니의 부인인 릴리언 디즈니가 남편을 기리기 위해 기부한 자금으로 시작된 디즈니 뮤직홀 건설은 다운타운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를 계기로 LA 다운타운은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예술가와 창조계층의 유입을 촉진하여, 그들의 활동이 지역의 문화적 풍요로움을 더하는 데 기여하면서 LA는 '핫한 예술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LA 다운타운의 랜드마크인 디즈니 뮤직홀(프랭크 게리 설계)
LA 다운타운의 랜드마크인 디즈니 뮤직홀(프랭크 게리 설계) ⓒ 경신원

LA 아트 디스트릭트

LA에서 나타난 변화 중 나의 가장 큰 관심을 끌었던 곳은 바로 '아트 디스트릭트(Art District)였다. LA 동부에 위치한 아트 디스트릭트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제조업 공장, 창고, 물류 시설 등이 밀집된 산업 지대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에 탈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제조업이 쇠퇴하고 공장과 창고들이 문을 닫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산업 기반이 무너지게 되었다. 또한 자동차 문화의 확산으로 인해 사람들은 도심을 떠나 교외로 이주하면서 인구가 감소하고, 지역은 점차 황폐해졌다. 이로 인해 빈 건물과 창고들이 방치되거나 불법 활동의 온상이 되었다.

우범지대였던 이 지역을 새로운 공간으로 변화시킨 건 바로 예술가들이었다. 1980년대부터 저렴한 임대료를 이유로 예술가들이 빈 창고나 공장을 스튜디오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아트 디스트릭트'라는 정체성이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기본적인 생활 여건이 부족하여 생활이 불편했기 때문에 상업적 접근이 어려웠다. 이로 인해 아트 디스트릭트는 예술가들이 저렴하게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비주류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LA 아트 디스트릭트 거리
LA 아트 디스트릭트 거리 ⓒ 경신원

조엘 블룸과 창조적인 커뮤니티의 형성

조엘 블룸(Joel Bloom)은 아트 디스트릭트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배우이자 예술가인 그는 아트 디스트릭트가 예술과 창의성의 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에 이곳에 정착했다.

1990년대 초반, 조엘은 지역 내 부족했던 식료품과 필수품을 판매하는 슈퍼마켓을 오픈하면서, 단순한 쇼핑공간이 아니라, 주민들이 모여 소통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장소로서 기능하도록 했다. 일반 슈퍼마켓과는 달리, 예술가들과 지역 주민들이 선호하는 독특한 상품을 갖추고 있었으며, 슈퍼마켓에서 예술 행사나 지역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비록 경제적인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그의 슈퍼마켓 운영은 지역 사회와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트 디스트릭트의 잠재력을 일찍부터 발견한 조엘은 예술과 문화가 지역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아트 디스트릭트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창작할 수 있는 공간이 될 뿐만 아니라 상점, 음식점, 그리고 기타 비즈니스들이 성장할 수 있는 지역이 되기를 원했다.

지역사회 활동가(community activist)로 활발히 활동하면서, 약 30년 동안 LA 시정부와의 갈등과 협력을 통해서 지역사회와 예술가들 간의 소통을 촉진하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창작자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중교통이 부족했던 아트 디스트릭트에 LA 메트로의 일환으로 운영되는 LA 시내의 소형 셔틀 버스 시스템인 DASH(Downton Area Short Hop) 버스 노선 운행이 운행되도록 하였다. DASH 버스는 다운타운 내 다양한 구역, 관광지, 상업지역을 순환하는 노선으로 지역 주민과 방문객들이 교통 체증이나 주차 문제없이 다운타운의 다른 지역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를 했다.

또한 지역 예술가들과 함께 협력하여 '아트 인 레지던스(Art in Residence, AIR)' 조례가 아트 디스트릭트에 적용될 수 있도록 했다. AIR은 예술과 문화를 촉진하기 위해 공공 공간에 예술 작품을 설치하고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1981년 LA시가 제정한 조례이다. 이 조례는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증진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예술이 대중과 더욱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예술가들이 지역사회와 상호작용하고, 작품을 통해 지역 문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양한 벽화로 유명한 LA 아트 디스트릭트 거리
다양한 벽화로 유명한 LA 아트 디스트릭트 거리 ⓒ 경신원

아트 디스트릭트의 열기는 어디에?

오랫동안 LA 다운타운의 재개발 사업에서 소외되었던 아트 디스트릭트는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LA시의 정책적 관심을 받게 되었다. 아트 디스트릭트는 다운타운 재개발과 활성화의 일환으로 시작되었고, 정부와 민간 부문의 다양한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재개발 사업은 지역의 예술적 특성을 살리면서도 상업적 공간을 추가하고, 창의적인 산업을 유치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로 인해 새로운 비즈니스가 생겨나고,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었으며,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되었다. 특히, 주거공간의 개발과 함께 세계적인 갤러리인 하우저 앤 워스(Hauser & Wirth)와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커리큘럼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건축학교인 남캘리포니아 건축연구소(The Southern California Institute of Architecture, SCI-Arc) 등과 같은 예술 및 문화의 허브공간이 생겨나면서 아트 디스트릭트가 더욱 다채롭고 창의적인 지역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부동산 가치의 급격한 상승을 가져와 기존 주민들과 예술가들이 거주하고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상실되게 되었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많은 저소득층 주민들이 경제적인 부담으로 인해 지역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우려로 아트 디스트릭트를 보호하기 위해 재개발 사업에 대해 반발하기도 했다. 그들은 재개발로 인해 기존의 문화와 정체성이 약화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기 때문이다. LA 시 정부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소득층 주민과 예술가들을 위한 주택 지원정책이나 임대료 통제 등의 조치를 고려하고 있지만, 이러한 정책의 실제 효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활기가 넘칠 것으로 기대했던 아트 디스트릭트의 거리는 뜻밖에도 너무나 조용했다. 금요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리틀 도쿄역에서 아트 디스트릭트를 찾아 걷는 동안에도 제대로 된 이정표도 발견하기 어려웠고, 보행환경이 안전하다는 느낌도 받지 못했다. LA 다운타운은 재개발 사업으로 물리적인 환경은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치안문제와 노숙자 문제로 인해 지역 경제와 주거환경, 그리고 문화 발전을 저해하고 있으며, 아트 디스트릭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트 디스트릭트는 지역에 대한 비전을 가진 사회 활동가와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노력 덕분에 우범지역에서 창의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역의 활성화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커뮤니티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며, 지자체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지역 주민들과 예술가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관광객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아트 디스트릭트를 방문할 수 있도록 보행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지자체의 책임이다. 시민들이 살고 싶은 매력적인 도시를 만드는 일은 커뮤니티, 지자체, 그리고 민간 기업의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로스엔젤레스#정부의역할#지속가능한도시재생#매력적인도시만들기#커뮤니티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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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서울의 골목길>, <엄마 말대로 그때 아파트를 샀어야 했다> 출간, 주택, 도시, 그리고 커뮤니티를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다소 낯설지만 익숙해지고 있는 한국의 여러 도시들을 탐색 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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