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은 깨달음의 계기가 되다
박씨 부인은 입을 꼭 다물고 서러움을 애써 참았다. 흐르는 눈물을 연신 훔쳐냈다. 수운 선생은 옷감과 생활용품 등 짐 꾸러미를 묶어 등에 지고 세상만사 다 잊고 출가한다는 비장한 심정으로 집을 나섰다. 한편으로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도 컸지만, 구도의 뜻을 단념할 수 없었다.
수운 선생은 금강산을 비롯하여 이름난 산과 큰 절을 찾아 도가 높은 스님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때로는 역학(易學)에 이름난 선생도 찾아가 배우고 예언서들도 읽으면서 주유천하(周遊天下) 즉 온 세상 곳곳을 두루 돌아다닌다.
또한 마음이 답답하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실망이라도 하면 말 타기와 활쏘기 그리고 칼춤을 추며 울분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러다 약간의 돈이 모아지면 집에 들러 부인에게 생활비를 주기도 하였다.
박씨 부인은 수운 선생의 그간 장삿길을 수년간 지켜보면서, '저 양반이 장사꾼이 된 게 아니라, 무슨 큰 포부를 갖고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내 박씨 부인도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고집스럽게 수운 대선생이 가는 곳을 따라 다니려고 함께 집을 나서기도 하였다.
수운 선생은 교훈가에서 "···오늘사 참말이지 여광여취 저양반을 간곳마다 따라가서 지질한 그고생을 눌로대해 그말이며···"라고, 부인께서 하신 말씀을 기록하였다. 이는 이리저리 이사 다녔다는 말도 되며, 장삿길에 따라나섰다는 말도 된다.
박씨 부인이 수운 선생을 따라나섰다가 지아비의 끈질긴 설득으로 다시 집에 돌아가곤 하는 일이 반복되었으나 아이들 양육 문제로 같이 방랑하며 장사하는 일을 포기한다.
당시 조선 후기 상황은 부정부패가 널리 퍼진 상태에서 조선을 지탱해 온 유교적 지배체제가 무너지면서 혼란이 확산하는 시기였다. 백성들의 생활은 몹시 어렵고 비참하여 나라에 대한 원성이 커 가고 새로운 세상을 찾는 목소리가 높았다.
조선 순조11년(1811) 홍경래(洪景來-1771~1812)가 난리를 일으킨 뒤로 나라 곳곳에는 민중들의 집단적 소요가 그치지 않았다. 또한, 임금의 외척 세력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나라의 질서가 흔들리며 국가 위기는 점점 심화하고 있었다.
정감록과 같은 도참설이 널리 퍼지고, 생존과 현실도피를 위해 전국 각지를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는 백성들의 수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국가 통치이념인 유교의 성리학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정부에서 배척하여 산중으로 숨어 들어간 불교 역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수운 선생은 당시 상황을 오륜(五倫)에 빗대어,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 있지마는 인심풍속 괴이하다"고 하였다.
또한, 서학(西學)이 조선에 들어와 전통문화와 부딪치면서 사회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이웃의 큰 나라 중국이 곧 서양의 나라에 힘없이 무너질 것이라는 소문들은 조선 민중들에게 심한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수운 선생이 주유천하를 통해 본 조선 사회는 곳곳에서 유교적 질서가 무너지고 혼돈 속에서 각자위심(各自爲心)하는 세상이었다.
수운 선생은 '군불군(君不君)·신불신(臣不臣)·부불부(父不父)·자부자(子不子)' 즉 임금이 임금 구실을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비가 아비 구실을 못하고 자식이 자식 역할을 못 하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선언한다.
"아서라 이 세상은 요순지치(堯舜之治)라도 부족시오 공맹지덕(孔孟之德)이라도 부족언不足言이라"
수운 선생은 당시 시대의 위기는 요임금과 순임금은 물론 공자니 맹자와 같은 성현이 미처 짐작하지 못했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판단하였고 조선을 지배하던 유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또한 병서도 공부하고 음양 술수나 서학(西學)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해답을 찾지는 못한다.
1854년 수운 선생의 나이 31세, 장삿길과 함께 조선 팔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진리와 새로운 세상을 모색하던 수운 선생은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10년간의 주유천하를 마감한다. 큰 방황은 커다란 깨달음의 원인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마침내 수운 선생은 자신이 직접 해답을 찾아내기로 작정한다.
「수운, 십여 년의 장삿길
팔도 유람의 세월,
요순과 공맹
지나간 성현들이
다시 와도 어쩔 수 없는 세상
그래도 진리를 찾아
온갖 고생을 감수하며
구도의 열정을 품었지만
남은 것은 빈 허공 같은
쓸쓸하기 그지없는 마음뿐
그러나 그 큰 방황은
결국 깨달음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지금이야말로
대도의 출발이다.」
수운 선생은 굳은 결심으로 경주 용담에 다시 들어가 사색에 전념하였으나 반 년이 지나도록 새로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또한, 마을 사람들과 집안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눈치까지 보아야 했다. '아버지 근암공 얼굴에 먹칠을 한다'느니, '도사가 되려고 이상한 짓을 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갈수록 심해져 여러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용담을 떠나 박씨 부인의 고향인 울산으로 이사한다.
처가에서 멀지 않은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에 세 칸 초옥을 짓고 논밭을 마련한다. 그동안 장사를 하면서 간간이 살림비용으로 준 돈을 부인이 절약하여 모아둔 것으로 집 앞 6두락(여섯 마지기)의 논을 사서 농사를 지으며 사색도 같이하기로 하였다.
「題書제서」 수운 최제우
得難求難 實是非難 心和氣和 以待春和
득난구난 실시비난 심화기화 이대춘화
"얻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려우나 실은 이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니,
마음이 화하고 기운이 화하여 봄같이 화하기를 기다리라."
- 계속
덧붙이는 글 |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기념, '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는 계속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