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의는 현실주의를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다'는 어폐가 있을 터, 대부분 패배한다. 역사의 장에서는 승리해도 현실에서는 패배한다. 그럼에도 이상주의자가 존재하는 것은 "질 줄 알면서도 그 길이 옳으니까"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유엔의 관리하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4.3항쟁으로 제주도 2개 선거구를 제외한 198개 선거구에서 198명의 민의원이 선출되고 제헌의회가 구성되었다.
독립운동의 핵심 지도자들은 대부분 참여를 거부했다.
유림은 독립노농당의 결의에 따라 입후보하지 않았다.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조직된 정당에서 후보자를 내지 않은 것은 역설일지 모르지만 유림은 민족적 대의에 입각해서 이 길을 택하였다.
당선자 중에는 친일파 후예들이라는 평을 받는 한민당 29명, 이승만 계열인 독촉국민회 55명, 대한청년회 12명, 무소속이 85명이었다. 무소속이 많은 것은 이미지가 좋지 않은 한민당과 독촉출신들이 각기 소속 정당을 떠나 무소속으로 출마한 때문이다.
이와는 다른 현상이지만 독립노농당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당의 총선 불참 결정에 승복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일부 지역에서 출마하고 당선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민족의 통일된 정부를 열망하는 다수 국민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제헌의원을 뽑는 5.10선거가 드디어 치러졌다. 이 단선에 불참한다는 게 유림이 이끄는 독립노농당의 공식노선이었다. 그러나 일부 당원들은 무소속 혹은 각자 사회단체 명의를 빌어 입후보하여, 신현상(공주)·장홍염(무안)·정준(김포)·육홍균(선산)·최석홍(영주) 등이 당선되어 금배지를 달았다.
당시 독립노농당에 관계했던 한 인사의 말에 따르면, 독노당계 당선자는 29명에 이르렀다고,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이같은 숫자라면 독자적인 원내교섭단체를 구성, 하나의 파워집단을 이룰 수 있는 규모다. 그러나 독노당 당수 유림은 이들을 모두 제명처분하고 말았다. 바로 이때 훗날 통일당 당수로서 70년대 유신정국의 한 모서리에서 나름대로 투쟁하였던 양일동도 이때 독노당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다. (주석 1)
유림은 혁명가 아니면 사상가 쪽에 가까운 인물이다. 정치인 기질은 전혀 아니다. 원칙과 대의명분에 충실하게 살아왔다. 불의한 타협이나 이해 관계의 타협에 얽매이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충실한 아나키스트이다. 현실정치에서 29명의 의원이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제법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력이었다.
한 연구자는 유림을 '고집불통'이라 표현했다. 좋은 의미의 신념에 찬 고집불통이다.
김재명은 해방공간의 민족주의자들을 소개한 책 <한국현대사의 비극>(선인 2003)의 한 장을 유림에게 할애했는데 그 제목이 <고집불통의 우국혼>이다. 민족주의자 중에는 고집불통이 많다. 고집불통이 아니고야 험난한 길을 다년간 걸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유림은 그중에서도 특히 심한 고집불통이라고 김재명은 본 것이다. 이 책 300쪽에 이렇게 나온다.
그 무렵 유림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반대운동의 전면에 나서서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그러한 땀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다. 이 협의회에서 유림은 홍명희, 조소앙과 더불어 3인 간사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그러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기본 입장의 일치에도 불구, 유림은 김구, 김규식 등과는 달리 남북협상, 보다 정확히는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38선을 베개 삼아 자결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4월 19일 아침 북행하려는 김구의 옷깃을 붙잡고 유림은 이렇게 말했다.
"백범 선생, 가지 마시오. 가시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백범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니까 백범 선생이지, 신탁통치 찬성자들과 무엇을 협상하자는 것입니까? 그들의 속셈을 모르십니까?" (주석 2)
주석
1> 최갑용, 앞의 책, 130쪽.
2> 김기협, <해방일기>(10), 137~138쪽, 너머북스, 2015.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