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갈 곳 없는 가련한 신세
수운 선생은 을묘천서의 영적 체험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입산 기도를 하였지만, 세상을 건질 만한 결정적인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수운선생은 자신과 가족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나서야만 했다. 당시 6두락(여섯 마지기)의 논이 있었으나 농사에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장삿길로 나선다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어떻게 하면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어 집안 살림을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큰 꿈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수운 선생은 이때의 심정을 수덕문(修德文)에 기록하였다.
살림이 점점 어려워지니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고, 나이 차차 많아가니 신세가 장차 궁졸(窮拙)해질 것을 걱정하였노라. 팔자를 헤아려 보니 춥고 굶주릴 염려가 있고, 나이 사십이 된 것을 생각하니 어찌 아무런 일도 해놓은 것이 없음을 탄식하지 않으랴. 몸 담을 곳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누가 천지(天地)가 넓고 크다고 하겠으며, 하는 일마다 서로 어긋나니 스스로 한 몸 간직하기가 어려움을 가엾게 여겼노라. 이로부터 세간(世間)에 분요(紛繞)한 것을 파탈(擺脫)하고 가슴속에 맺혔던 것을 풀어 버리었노라.
야심찬 사업도 실패로 끝나고
수운 선생은 고민 끝에 지인의 자문을 받아 6두락의 논을 저당 잡히고 그 자본으로 철제품을 생산하는 철점 즉 제철소를 경영하기로 한다. 당시 자본과 뒷배경이 든든한 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것이 부담이었으나, 소자본으로 가능한 용광업으로 결정하고 기술자 보조원 등 십여 명을 채용하여 울산 언양 중리 천성산 밑에서 야심차게 출발한다.
그러나 투기성이 강하고 실패의 위험성이 다분한 당시 철점 공장 사업은 2년 만인 1858년 가을쯤 문을 닫게 된다. 경험 부족과 자본의 약점까지 더하여 어찌 보면 예정된 사업 실패였다. 또한 기도 수행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사업에 전념하지 못한 원인도 있었다. 밖으로는 철점 경영을 하며 안으로는 기도수행을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나 두 가지 다 놓치는 결과가 오고 말았다.
결국, 정신적·경제적 좌절만이 남게 되어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고생하며 지아비를 따라다닌 박씨 부인과 철모르는 자식만이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처절한 심정으로 고향인 경주 용담(龍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용담 외에는 어느 곳도 갈 곳이 없었다. 1859년(기미년) 10월 초순 춥고 배고픈 어느 날 짐을 꾸려 가족들과 함께 6년이나 정들었던 울산 여시바윗골을 뒤로하고 경주 구미산 용담으로 향한다. 박씨 부인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어린아이를 둘러업은 채 말없이 눈물을 훔치며 수운 선생을 따라 70리 길을 걸어간다. 그때의 심정을 수운 선생은 '용담가'에 남겼다.
구미용담 찾아오니 흐르나니 물소리요
높으나니 산이로세 좌우산천 둘러보니
산수는 의구하고 초목은 함정하니
불효한 이내마음 그아니 슬플소냐
오작은 날아들어 조롱을 하는듯고
송백은 울울하여 청절을 지켜내니
불효한 이내마음 비감회심 절로난다
동학의 성지 용담정(龍潭亭)은 수운 최제우 선생 득도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천도교중앙총부에서 세운 용담정(龍潭亭) 안내 표지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담정(龍潭亭)
용담정은 수운 대신사(崔濟愚, 1824~1864)께서 포덕 원년(1860) 4월 5일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아 동학을 창명하신 곳이다. 포덕 2년(1861) 6월 세상을 향해 포덕을 시작하셨으며, 관의 지목을 받아 포덕 4년(1863) 12월 10일 체포되실 때까지 가르침을 펴신 천도교 제일의 성지이다.
용담정 가는 길
용담정은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용담정길135(가정리 산63-1) 구미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자동차로 용담정 주차장에 도착하기 전 오른쪽 아랫길에 동학교육수련원, 일명 수운기념관이 있다.
수운기념관을 스쳐 지나면 용담정 주차장 앞에 용담정 첫 관문인 포덕문(布德門)이 나온다. 포덕문은 고풍과 현대풍이 조화를 이루는 특이한 담장식 문이다. 포덕문에 들어서면 왼쪽 대각선 위치에 대신사 수운 최제우상(大神師水雲崔濟愚像)이 보인다. 포덕문에서 동상까지의 거리는 대략 30보이다.
수운 선생 동상에서 약간 오르막길 215보 정도 걸어가면 오른쪽 방향에 포덕관(布德館)과 진성관(眞誠館)이 보인다. 포덕관에서 77보 걸어 들어가면 용담수도원(龍潭修道院)에 도착한다. 그리고 포덕관에서 용담정 쪽으로 30보 정도 걸어 올라가면 성화문(聖化門)이 나온다.
성화문(聖化門)에서 185보 걸어 올라가면 오른쪽에 약 50여 평의 평지가 있다. 이곳이 수운 선생의 또 다른 득도 장소라 알려진 원적암(圓寂庵)터, 즉 와룡암(臥龍庵) 터다. 와룡암 터에서 다시 올라가면 용담정 앞 용담교(龍潭橋), 용담교에서 교량과 계단 등을 걸어 올라가면 비로소 용담정(龍潭亭)이 나온다.
이 길을 왼쪽으로 깊은 계곡물이 흐른다. 위쪽 용추각(龍湫閣)에서 폭포를 이루며 쏟아지는 물줄기가 용치골, 즉 용추계곡으로 이어지면서 물 흐르는 소리와 계곡 바람 소리가 신비롭게 들려온다. 어쩌면 깊숙한 계곡 밑에서 때를 기다리며 누워있는 와룡(臥龍)이 참다못해 웅얼거리는 소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구미산 용담정 가는 길의 풍경은 사계절에 따라 펼쳐지는 느낌이 다르다. 그 길은 세속의 탁한 기운을 씻어주고, 신선(神仙) 즉 신성의 불멸의 존재가 되어 여유롭게 노닐만한 그야말로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 할 만하다.
용담정에서 약간 위 오른쪽 방향에 용담약수터가 있다. 수운 선생께서 득도 전후 청수(淸水)를 봉전하고 기도 및 수도 하실 때에 이곳 물을 사용하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용담정 옆 오른쪽 방향 위쪽에 용추각(龍湫閣)이 있다. 용추각에는 수운 최제우 선생의 부친인 근암 최옥 선생의 문집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약수터 아래쪽에서 용추각을 바라보면 쏟아지는 물줄기 위에 환상처럼 보이는 용추각의 모습이 그야말로 절경을 이룬다.
수운 선생 부친 <근암문집>에 의하면, 구미산은 경주의 높은 산으로 큰 바위가 솟아있는 것이 마치 거북이와 용이 서려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근암공은 '구미산은 경치가 매우 좋아 일찍이 26경을 읊은 바 있는데, 구미산 밑에 있는 와룡담(臥龍潭)은 그중에서도 빼어난 모습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수운께서 득도했던 곳
와룡암 터 그리고 용담정
동학이 창명된 곳
동학혁명과 3·1대혁명
어린이운동 등 근대 1백여 년간
정신적 뿌리이자 모태였던 곳
지금도 수운 선생의 숨결이
들려오는 듯하고
천지가 진동할 듯
다시 개벽의 외침 소리가
구미산을 뒤흔들 것만 같다
- 계속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