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정신이라면, 거의 매일 연민이나 공감의 아픔과 분노로 괴로워해야 하는 시대다. 오늘도 우크라이나와 가자에서 평균 160여 명의 민간인이 죽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지만, 매일 평균 2만4600여 명이 굶주려 죽어 뼈와 살가죽만 남은 앙상한 시신과 그 주변에서 통곡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머리조차 멍해진다.
작년에 80억 명 모두가 먹고 남을 정도로 식량이 생산되었음에도, 오늘도 7억3300만 명은 굶주림에 몸부림칠 것이며, 그 가운데 900만 명은 죽음을 맞을 것인데 대다수가 5세 미만의 어린이다(<세계기아지수보고서 Global Hunger Index 2024>).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52%, 자산의 76%를 차지한다(<세계불평등보고서 World Inequality Report 2022>). 한국에서도 상위 0.1%의 1인당 평균소득은 33억3317만 원, 하위 20%의 평균소득은 238만 원으로 그 차이는 1400배에 달했다(<파이낸셜 뉴스>, 2023년 3월 21일). 자산은 상위 10%가 전체 이자소득의 89.7%를 차지할 정도로 격차가 더 컸다(<한국경제>, 2024년 4월 7일).
평균이윤율은 떨어지고 불로소득은 폭증하고 있다
우리는 왜 이토록 불평등한가.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300년에 걸친 방대한 데이터를 치밀하게 조사하고 분석한 끝에 "r>g," 곧 경제의 성장률이 자본의 수익률보다 늘 적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간단히 말해, 일하여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이 돈을 버는 것이 더 빠르고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300년 동안 소득은 평균 1% 성장했지만, 자본의 수익률은 4∼5% 성장하였다(피케티, <21세기 자본>).
핵심을 잘 통찰했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감히 말하건대, 피케티는 맑스의 <자본론>을 읽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한 채 <21세기 자본>을 기술하였다. '피케티가 말한 자본'은 결코 '자본(capital)'이 아니다. 그에 합당한 용어는 '자산(asset)'이다. 자본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착취와 지배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관계다."(칼 맑스, <자본론>)
피케티가 생산성이나 자본주의의 파국에 대해 간간이 맑스를 들먹인 부분도 맞지 않거니와 사민주의적이고 개량적인 대안도 맑스주의와 대립한다. 맑스에 따르면, 불평등은 자본이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다양한 방법으로 과도하게 착취하는 데서, 자본끼리도 경쟁하면서 자본을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바람에 평균이윤율이 점점 떨어지는 데서 근본적으로 기인한다.
성능이 좋은 기계에 더 투자하여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면 총이윤은 늘어나지만, 이윤은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이므로 전체 자본에서 가변자본인 노동자의 임금으로 투여되는 비율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에 평균이윤율은 경향적으로 저하한다.
이에 대해 논란이 있었지만, 에스테반 마이토가 주요 선진국을 실제 조사한 결과, 1860년대에 46%였던 기업의 평균이윤율은 1, 2차 세계대전 때 약간 오른 것을 제하고는 점점 떨어져 2000년대 이후 10% 이하에 이르렀다(에스테반 마이토 Esteban E. Maito, <자본의 사적 유동성-19세기 이후 이윤율의 저하 추세 The Historical Transience of Capital-The downward trend in the rate of profit since XIX century>).
이에 자본과 국가는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하여 비정규직을 만들고 대량해고를 하고 공공영역을 민영화하고 온갖 규제를 완화하고 세계화를 추진하고 복지를 축소하여 이윤율을 끌어올렸다.
복지정책과 조세제도에 따라 국가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 체제 이후 불평등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시행한 모든 나라에서 악화하였다. 여러 수치를 근거로 금융위기 때 불평등이 완화하였다는 논문들도 여럿 발표되었지만, 이 또한 부자들의 자산 소득이 줄어든 데 따른 착시 현상이다. 서민들의 소득과 자산이 줄어들어 실질적인 불평등은 심화하였다.
자본과 국가가 신자유주의 체제로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이윤율을 올렸다면 이것으로 투자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면 경기가 활성화할 터인데, 왜 세계 경제는 계속 장기침체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필자의 오랜 의문은 데이비드 코츠의 <장기침체와 축적의 사회구조>라는 논문을 읽고 풀렸다. 2008년에서 2018년 사이에 미국 기업의 평균이윤율은 8.15%로 상승하였는데 평균 축적률은 1.89%에 지나지 않았다(데이비드 코츠 David M. Kotz, <장기침체와 축적의 사회구조 Stagnation and social structures of accumulation>).
1860년대에 기업가가 1만 원을 투자하여 4600원을 벌었다면, 2008년 이후 미국의 기업가는 815원을 벌어서 그 가운데 189원만 자본으로 축적하여 일자리나 기술 개발에 투자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럼, 나머지 626원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2022년에 전 세계의 부채 총액은 235조 달러로 국민총생산의 238%에 달한다(<세계부채모니터2023 Global Dept Monitor>).
이보다 더 경악할 수치는 같은 해인 2018년에 페이스북의 이윤율이 39.6%에 달한다는 것이다. 맑스와 케인즈 모두 사라질 것이라 예견한 불로소득인 지대(rent)가 토지와 부동산을 넘어, 금융, 천연자원, 지적 재산, 디지털 플랫폼, 에너지/상수도/통신/교통 등의 공공서비스, 인프라로 확대되었다(브렛 크리스토퍼스 Brett Christophers, <지대수취자 자본주의: 누가 경제를 소유하고 누가 지불하는가 Rentier Capitalism, Who Owns the Economy, and Who Pays for It?>).
626원에서 기업이 이자를 지불하고 남은 돈은 지대에 투자한다. 지대는 이윤이 높을 뿐만 아니라 한 번 투자하면 지주가 매년 소작료를 받듯이 정기적으로 지대의 사용료를 챙길 수 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다"라는 말이 그리 과장은 아닌 것이다.
노동의 위계도 불평등을 심화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한국 대기업 근로자 평균소득은 월 591만 원(세전)으로 중소기업 평균소득(286만 원)의 2.1배에 달했다. 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은 2만4799원으로 비정규직 1만7586원의 1.4배였다(<중앙일보>, 2024년 5월 23일).
2020년에 고졸 출신의 임금을 100으로 하였을 때, 중졸 출신의 임금은 78, 전문대 출신은 110, 대졸 출신은 138에 이를 정도로 학력 격차도 심하고(e 나라지표 <학력별 임금격차 2024>), 2022년에 평균 임금총액은 여성 3,129,00원, 남성 4,726,000원으로 여성은 남성의 66.2%에 지나지 않았다(한국여성정책 연구원, <성별 임금 격차 2024>). 이밖에 숙련공과 비숙련공의 기술격차 등 여러 요인이 불평등을 심화한다.
문제는 권력이다. 국가가 자본과 동맹을 맺고 복지 축소, 부자 감세 등의 정책을 동원하여 오히려 부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이를 능력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합리화하는 국가에선 다른 나라보다 불평등과 사회격차가 더욱 커졌다.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사회공유소득이 대안이다
불평등의 폐해는 경제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람들은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전략 대신 경쟁과 힘에 의해 해결하는 전략을 선호하게 된다. 불평등이 심해지면 타인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고 사회통합이 줄어들며 사회적 관계의 질은 내려가고, 범죄와 폭력은 증가하고, 스트레스가 증가하여 건강은 나빠지고 평균 기대수명이 떨어지며, 사람들 사이의 적대감은 높아진다(리처드 윌킨슨, <평등해야 건강하다>).
무엇보다 불평등이 커질수록 금권정치(plutocracy)가 더욱 성행한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돈깨나 있는 자들이 정치를 직접 행하거나 정치인, 관료, 의원을 만나 설득하고 회유하고 압력을 가하는 강도와 횟수가 늘어난다.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점점 부자의 권력이 강해지고 불평등은 더욱 악화한다. 기후위기도 심화한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그동안 노동계가 줄기차게 주장한 대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시하여 노동의 위계를 없애고 격차를 줄임은 물론, 조세정책을 과감하게 개혁하고 복지를 늘려야 함은 당연하다. 이런 정책이나 기본소득, 피케티가 제안한 글로벌 누진적 자본세가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효과가 크지는 않다. 살찐 고양이법, 기본 자산세 등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
세율을 높이면 기업이 투자를 꺼리고 경기가 위축된다고? 그 반대로 최고세율이 가장 높았던 1950년에서 1990년의 기간에 세계 경제는 생산성이 가장 높고 번창한 반면에, 세율이 절반으로 낮아진 2000년대 이후 생산성이 하락하고 장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업이 기술과 일자리 대신 지대에 투자하고 99%는 쓸 돈이 없어 소비를 줄이니 경제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관건은 지대에 대한 통제다. 페이스북이든 아마존이든 플랫폼이 새로 생산한 가치는 없다. 수십억 명이 무료로 글을 올린 덕분에 제조업 등의 분야에서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가 광고비와 수수료로 이전한 것뿐이다. 보수세력도 지대추구행위(rent-seeking)가 제살깎아먹기임을 인식해야 한다. 지대수취는 자본주의의 동력인 자유주의, 기업가 정신, 혁신을 해체하여 봉건제로 퇴행시키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4차 산업혁명에 해당하는 기술들이 지대를 형성하기에 세계는 지금 기술 봉건제(techno-feudalism)로 빠르게 퇴행하고 있다. 마이토는 기존의 경제지표만으로 2014년에 당시 추세라면 선진국 기업의 평균이윤율이 2056년에 0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였다. 지대와 기술 봉건제, 특히 인공지능으로 인한 경제변화를 추가하면 이 시기는 더욱 앞당겨질 것이다.
2023년에 인공지능과 로봇이 한국의 제조업 일자리 1만 자리당 1012자리를 대체하였다(세계로봇연맹, <로봇밀집도데이터 2024 Robot Density Data 2024>).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생산성이 수십, 수백 배나 높기에 인공지능을 소유한 자가 모든 가치를 독점할 것이다. 이 추세대로라면 2050년이 되기도 전에 세계 경제는 0.0001%의 지대수취자가 모든 가치를 독점하는 봉건제로 변할 것이고 나머지 99.99%는 인공지능이 남긴 부스러기 일이나 하면서 노동자로 존재하지도 못하는 유령노동자(ghost worker)로 전락할 것이다.
2008년에서 2018년 사이에 미국 기업의 평균이윤율이 8.15%인데 페이스북이 2018년에 39.6%의 이윤율을 올렸다면, 차액인 31.45%는 과도하게 수탈한 것이므로 이는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옳다.
앞으로 평균이윤율 이상의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사회공유소득제와 같은 과감한 대안이 필요하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상상과 실천이 필요하다.
"위기는 낡은 것의 기한이 다했는데 새로운 것이 오지 않을 때 찾아오며(그람시), 유토피아의 오아시스가 말라버리면 진부함과 무력함의 사막만이 펼쳐진다(하버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