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태국의 헌법을 살펴보고자 방콕을 다녀왔다. 오늘날 태국의 지역에는 고대부터 드바라바티 문명이 존재했다. 이후 태국에서는 수코타이 왕국, 란나 왕국, 아유타야 왕국, 톤부리 왕조와 같은 왕조 국가의 흥망성쇠가 있었다. 지금의 태국 왕조는 짜끄리 왕조이다.
1930년대 세계적인 경제공황 시기에 태국 왕실의 무능이 표출되었다. 당시 프랑스 유학생들과 일부 젊은 군인들이 태국의 절대왕정체제에 불만을 품고 인민당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결국 이들은 1932년 6월 24일 새벽에 군부대를 앞세워 왕궁을 포위하고, 고위직 관료들을 체포했다.
마침내 1932년 12월 10일 태국 국왕은 입헌군주제 사상이 수용된 1932년 헌법을 승인했다. 이로써 태국은 전제군주국에서 현대적인 입헌주의를 받아들인 태국식 입헌군주국가로 전환되었다. 이를 기념해서 태국에서는 민주기념탑을 만들었다.
탑의 중앙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사람을 기리는 위령탑이 있고, 주변에는 24m 높이의 4개의 탑을 세웠다. 24m는 입헌주의 혁명이 발생한 날인 24일을 상징한다. 중앙탑 안에는 1932년 제정된 헌법의 복사본이 보관되어 있다.
태국에서는 1932년 12월 10일 최초의 헌법을 제정했다. 이날을 제헌절로 기념하고 있다. 특히 민주기념탑은 방콕 시내로 들어가는 회전교차로 안에 있어, 많은 이들이 탑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장소는 여전히 태국 시민들의 시위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태평양 전쟁 당시 태국의 행정부는 일본과 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1944년에는 태국은 일본과의 전시협정을 파기했다. 한편 태평양 전쟁의 초기부터 반일운동을 진행한 문민세력은 종전한 이후 태국의 정권을 장악한다.
특히 이들이 1946년도에는 헌법의 개정을 주도하며, 태국 헌법상 민주적인 내용들이 대폭 수용되었다. 하지만 1947년과 1951년과 1957년에는 군사정변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특히 이 시기 무렵부터는 왕실과 군부 사이에는 일종의 동맹관계가 형성된다.
1971년 다시 군사정변으로 의회가 해산된다. 하지만 1973년 태국에서는 10월 민주화 운동으로 군부정권이 붕괴된다. 태국에서 10월 민주화 운동의 결과물로는 1974년도에는 헌법의 개정이 이루어진다. 특히 1974년 헌법상 정당제도가 마련되며, 정치적 활동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태국정치에서 다시 문민정부가 등장했다.
그럼에도 1976년 10월 6일에는 탐마삿 대학교에서 민주의의를 열망하던 이들이 태국의 군부와 극우인사들로부터 학살당했다. 군부는 다시 군사정변을 감행했다. 이로써 태국에서는 다시 권위적인 헌정체제로 전환되었다.
1991년 군사정변이 발생했지만, 이듬해인 1992년 태국의 <5월 민주화 운동>으로 군부정권이 붕괴된다. 한편 1996년 헌법초안회의가 구성되며, 헌법초안회의는 민선 상원의 구성, 지방 분권, 군부의 영향력 축소를 담은 헌법초안을 마련했다. 특히 국가 작용에 대한 국민의 참여와 국가 기관에 대한 통제에 관한 제도를 마련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현행 태국의 헌법은 2017년에 다시 개정되어 지금까지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919년 3.1혁명으로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주공화국을 지향했다. 태국의 경우에는 1932년 헌법의 제정을 통해서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의 전환된다. 또한 태국의 헌정사를 살펴보면, 지난 <1973년 10월 민주화 운동>과 <1992년의 5월 민주화 운동>의 결과물로 1973년 헌법과 1997년 헌법의 개정을 쟁취했다.
특히 태국과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은 시간의 흐름이 비슷하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960년 4.19의거>,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성취로 우리나라의 헌정질서는 더욱 성숙해졌다. 또한 우리나라의 헌정사에서는 1960년 헌법과 1987년 헌법의 경우에는 이러한 민주화운동의 결과물로 평가된다.
태국에서는 오늘날까지 빈번한 군사정변이 발생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태국의 시민들은 의회선거마다 군부를 대변하는 정당을 심판했다. 태국과 우리나라의 성숙한 헌정질서의 확립이 서로간의 연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