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의 독서력 향상을 위해 기획한 대한민국 독서 캠페인 2024리딩코리아(CJB청주방송)에 참여한 노명우 교수가 <빵과 장미>를 추천했습니다. 2024리딩코리아 연관 도서로 소개합니다.[기자말] |
<빵과 장미>는 '빵과 장미' 이야기에 매료된 한 사람이 '빵과 장미'라는 출판사를 만들고 펴낸 첫 번째 책입니다. 작가 브루스 왓슨은 종군기자처럼 로렌스 파업의 전말을 긴박감있게 전하며, 독자들을 1912년 1월의 로렌스 시로 데려갑니다.
역사상 가장 큰 승리를 거둔 로렌스 사람들은 몇 십 년 동안이나 파업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1912년 로렌스 파업이 끝나고 로렌스 시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파업이 끝난 직후인 1912년 3월 11일, <뉴욕 트리뷴>과 <브루클린 태블릿>, <보스턴 트랜스크립트> 등의 신문들에는 똑같은 기사가 실립니다.
주민이 10만여 명이나 되는 미국 도시가 얼마나 간단히 외부 선동가들에게 장악당하여 몇 주 동안이나 공포에 떨었는지를 지난 두 달 동안의 로렌스가 잘 보여주었다.
'로렌스시민연합'이라는 단체가 제작한 팸플릿 내용이 기사화 된 것이었지요. 로렌스시민연합은 계속해서 '테러에 지배된 한 미국 도시', '로렌스 다음은 어느 도시인가' 같은 팸플릿을 만들어 역사 기록을 장악합니다.
두 세대가 지난 1970년대에 로렌스 파업은 '빵과 장미'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 '빵과 장미'는 노동운동의 대의를 상징하는 구호가 되었고, 세계의 모든 활동가들이 자랑스럽게 사용합니다.
2014년 개봉한 영화 <런던 프라이드>를 보면 '빵과 장미'가 불러 일으키는 공감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인 마크가 공권력의 탄압을 받는 파업 광부들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에 나섭니다.
석탄노조는 '게이-레즈비언'의 모금을 거부하지만 마크의 정체를 잘 모르는 웨일즈의 석탄노조가 성소수자들의 모금을 받기로 합니다. 노조원들이 마크 일행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갈등이 고조되지요.
광부들 앞에 선 마크가 광부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설을 하고 "Victory to the Miners!"를 외치며 무언가 뭉클한 게 터져 나올 것 같은 그 순간, 브론웬 루이스가 'Bread and Roses'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광부의 아내들이 따라 부르고 광부들, 마크 일행까지 모두 노래하며 하나가 되지요. 이 합주 시퀀스는 런던 프라이드의 클라이맥스로 꼽을 만한 장면입니다.
수많은 사회 프로그램들이 앞다퉈 '빵과 장미' 를 제목으로 사용했고 디저트 카페의 간판으로 까지 진출했습니다. 이렇게 로렌스 파업이 '빵과 장미' 라는 멋진 구호로 소비되고 있지만, 막상 로렌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파업을 '빵과 장미'로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브루스 왓슨은 로렌스 섬유 노동자들의 투쟁을 시적으로 묘사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합니다. '빵과 장미'라는 이름은 로렌스에서 섬유노동자들이 벌였던 투쟁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거의 없다고까지 말하는 게 당혹스러웠지만, 빵과 장미에 감동만 할 게 아니었다는 걸 느꼈습니다.
왜 '빵과 장미'가 로렌스 파업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과 처참했던 삶을 담지 못한다고 하는 걸까요. 이 책은 자연스럽게 독자들을 '빵과 장미' 라는 매력적인 구호 너머에 있는 로렌스 파업의 역사를 파고드는 작가의 취재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로렌스는 어떤 도시였을까요? 로렌스 시는 애번 로렌스라는 인물이 유토피아를 꿈꾸며 설계한 계획 도시였습니다. 메리맥 강의 강물을 동력으로 이용한 섬유 공장 도시이지요. 메리맥 강은 잔잔하게 흐르다가 갑자기 폭포가 나타나는 식의 패턴이 반복되는 계단식 구조로 폭포의 동력을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로렌스 시보다 앞서 로웰 시가 건설되었고 거대한 섬유 공장들이 메리맥 강변에 들어섰습니다. 로웰 시에 대한 기록은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스 소로'의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 남아 있는데요. 소로는 댐이 생겨 연어의 이동길을 막은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백인들은 물고기를 식량과 거름으로 사용하다가
급기야 댐을 세우고, 나중에는 빌러리카 운하를 건설하고,
로웰에 공장을 세우면서 연어, 청어같은 물고기들의 이동도 끝이 났다. -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자본은 소로의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큰 댐을 만듭니다. 메리맥 강 폭포 사용권을 기반으로 애번 로렌스가 댐 건설에 착수합니다. 엄청난 규모의 그레이트 스톤 댐이 만들어졌고, 1848년에 로렌스 시가 공식 출범합니다. 애벗 로렌스가 만든 도시의 이름이 로렌스 시였지요.
유럽의 경제위기와 산업화의 광풍이 밀어닥친 미국의 상황이 맞물리면서 유럽 이민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1840년대 말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100만 명 이상의 아일랜드인이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아일랜드인에 이어 영국 맨체스터와 리즈의 섬유 노동자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고, 프랑스계 캐나다인들, 독일인이 미국으로 이주합니다.
당시 남부 유럽 전역에 나붙은 모집 공고 포스터를 보면 어떤 상황인지 짐작됩니다. 섬유 노동자들이 황금이 가득 찬 가방을 들고 공장을 나서는 그림이 있고, "로렌스에는 배고픈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모두에게 일자리가 주어지고 먹을거리가 돌아갑니다"라는 문구 옆에는 아메리칸 모직의 상호가 찍혀 있었습니다.
아메리칸 모직은 로렌스 파업의 주사업장이었지요. 아메리칸 드림의 기만성은 이탈리아 이민 노동자들 사이에 전해지던 이야기를 통해 생생히 드러납니다.
미국에 가면 도로가 몽땅 황금으로 포장돼 있다는 얘기를 듣고 미국으로 왔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나는 세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째, 도로는 황금으로 포장돼 있지 않다. 둘째, 도로는 아예 포장돼 있지 않다. 셋째, 도로를 포장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패션 산업이 발전하면서 로렌스 시의 공장들은 더 많은 옷감을 생산해냅니다. 로렌스는 51개국에서 온 이민 노동자들로 '용광로'를 형성했고, 혹시라도 파업이 일어나면 언제든 대체 인력을 투입할 수 있는 유연한 노동 시장을 갖춘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파업 노동자들이 파업 기간 내내 이른바 '땜빵'들을 극도로 경계했던 것이지요.
브루스 왓슨은 연구 논문처럼 주석을 달면서도 감성적인 문체로 독자들의 마음을 흔듭니다. 특히 로렌스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해 새벽에 출근하는 모습은 에밀 졸라가 <제르미날>에서 묘사한 탄광으로 출근하는 광부들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로렌스에선 새벽 6시에 울리는 공장의 호각 소리에 맞춰 섬유 노동자들이 일이납니다. 이들ㅇㄴ 골목골목에서 튀어나와 2만 8000명이 출근하는 행렬에 끼어들어가지요.
제르미날의 광부 가족들은 아버지와 아들, 열다섯 살 카리나까지 새벽에 입갱해야 합니다. 새벽 4시에 맞춰 출근하는 광부 가족의 모습은 마치 가축 떼의 발걸음 같았습니다.
열다섯 살 카리나는 지하 500미터가 넘는 갱도에서 탄맥을 캐고, 로렌스의 카멜라 테올리는 열 네 살이 되었다는 가짜 증명서를 4달러를 주고 만들어 섬유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노동자들의 척박한 삶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대로 이전되었지요. 브루스 왓슨은 에밀 졸라의 문장을 책에 담아 프랑스 탄광 노동자들의 비참한 노동 현장이 로렌스로 전이되는 현상을 '고발'합니다.
로렌스 섬유 노동자들을 분노하게 한 숨은 악마는 우드가 고안한 노동시스템이었습니다. 우드는 생산 할당량을 맞춘 노동자들에게는 보너스를 주는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모든 노동자들의 실적이 서로 연계되도록 치밀하게 설계했습니다.
방직공의 보너스는 방적공의 생산량에 좌우되는 식으로, 생산라인 전체를 하나로 엮었지요. 누구 하나라도 여유을 부리면 안 되게 만든 체계였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보너스를 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달에 이틀 이상 결근하면 가차없이 보너스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이틀 이상 결근한 날부터 출근 일수가 다시 리셋됩니다. 그 다음 한 달 동안 하루 넘게 결근하지 않아야 보너스가 나왔지요.
보너스 시스템 덕분에 아메리칸 모직은 공장 가동 속도가 향상됩니다. 1890년에 동력 베틀이 1분에 90픽 속도였던 게 1912년에는 1분에 140픽 속도로 향상되었다지요. 미국 전체에서 로렌스 시 섬유 공장의 생산성이 가장 높았습니다.
우드의 시스템은 공장 노동을 전력 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단거리 경주로 만들어버렸고, 로렌스 노동자들은 이 시스템을 만들어낸 우드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지요.
자본은 자기복제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드의 노동시스템 DNA가 112년이나 지난 한국 땅에서 발현된 것인데요. 새벽 배송으로 배달 경쟁의 주도권을 잡은 대표적인 거대 물류 회사가 1년 이상 근무한 노동자에게 지급할 퇴직금을 주지 않아 소송 중이라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알고 보니 주당 15시간 씩 4주 동안에 60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계속 근로 기간이 '0'이 되어버리는 리셋 규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1년 이상 실제로 근무하고도 퇴직금을 못 받는다는 이야기인데요. '빵과 장미' 구호에 감동하고 연대하는 2024년 한국 사회에 우드의 악마적인 리셋 규정이 버젓이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로렌스 파업은 마더 존스가 "여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승리한 파업은 없습니다"라고 말한 대로 여성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지지가 있었습니다. 세계산업노동자연합의 탁월한 지휘, 피켓 라인과 아이들의 탈출, 굳건한 연대와 인내가 모여 결국 파업 노동자들은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지요. 다른 도시로 갔던 아이들도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고, 그 해 여름 매사추세츠주는 미국 최초로 최저임금법을 채택했습니다.
로렌스 파업에 가담한 한 여성이 "우리는 빵도 원하지만 장미도 원한다" 라고 쓴 피켓을 들고 있었다고 전해지면서 '빵과 장미'가 로렌스 파업의 상징이 됐습니다. 그러나 브루스 왓슨은 지금까지 그런 사진이 발견된 바는 없다고 밝힙니다. "우리는 빵도 원하지만 장미도 원한다"는 문장은 제임스 오펜하임의 시 '빵과 장미'에 나오는데, 로렌스 파업 한 달 전에 <아메리칸 매거진>에 처음 실렸다고 하지요.
브루스 왓슨은 '빵과 장미'가, 무장 군인들의 총검 앞에서도 피켓 라인을 지켰고, 굶주리는 아이들을 다른 도시로 보내면서까지 치열하게 투쟁했던 로렌스 파업의 진실을 가리는 '신화'가 되어버린 것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로렌스 파업에서 미국노동총연맹은 파업 노동자들을 외면했습니다. 산업 구조가 바뀌면서 생겨난 비정규직을 외면했고, 세계산업노동자연합이 나타나 로렌스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지요. 112년 전 로렌스 시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모습과 겹쳐 보입니다.
신화에 가려졌던 로렌스 파업의 진실을 되살린 브루스 왓슨과 홍기빈 번역가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시와 노래로만 감동했던 '빵과 장미', Bread and Roses를 새롭게 느낍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송고후 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