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온라인 줌을 통해 4.16해외연대, 미시간 세사모, 샌프란시스코 공감, 스프링 세계시민연대 주최로 '세월호 가족, 온라인 간담회'가 열렸다. 40여 명이 참석한 이날 모임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곽수인 엄마 김명임씨, 장차웅 엄마 김연실씨, 박시찬 아빠 박요섭씨, 김동영 엄마 이선자씨, 생존 학생 장애진 엄마 김순덕씨가 참여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의 손을 잡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쳐왔다. 이번 모임은 해외에서 그런 인연을 맺어온 이들이 가족들과 희생된 아이들의 이야기,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마련했다. 가족들은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지난날을 기억하고 참사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때로는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고, 함께 웃기도 하면서 삶을 나누는 따뜻한 시간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위해 함께 싸워온 이들은 대부분 아이들을 직접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가족들과의 만남을 통해 마치 우리는 아이들을 직접 만난 것 같은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희생된 아이들은 이제 이곳에 없지만,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면, 오늘 이 자리에 또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있지 않을까? 그것이 가족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3,0,4'라는 숫자로 결코 환원되어서는 안 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엄마를 구해 준 차웅이
엄마보다 키가 크다는 걸 자랑하려고 가족 사진을 찍으면 꼭 엄마 어깨 위에 손을 얹었던 자랑쟁이 차웅이. 굉장히 활동적인 성격이고 늘 점퍼를 입고 다녔다고 한다. 차웅이는 형을 너무 좋아하고 잘 따라서, 단원고도 형이 다닌 학교라 다니게 되었다. 잠자고 있는 형 등 위에 올라가서 노는 사진을 보면 차웅이가 형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차웅이가 태어나고 이틀 정도 지난 날이었는데, 잘 자던 아이가 잠을 못 자고 칭얼거리길래 이상해서 불을 켜 보니, 엄마 팔에 꽂혀 있던 링거가 빠져서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 만약에 차웅이가 그러지 않았다면 엄마도 모르고 잠들어서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 차웅이가 엄마를 구해준 셈이다.
그런데 차웅이로써는 좀 섭섭할 만한 일도 있었다. 차웅이가 뱃속에 있을 때 조카가 물속에 빠졌는데, 차웅이 엄마가 임산부의 몸으로 조카를 구하기 위해 물속에 뛰어들었다. 조카를 구하기 위한 마음에 아이를 배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뛰어들었던 것이다. 자칫하면 차웅이와 엄마 둘 다 위험할 뻔한 일이었으니, 차웅이로써는 섭섭할 수도 있는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멈칫거릴 만한 상황에서 오로지 조카를 구하기 위해 물속에 뛰어든 엄마였으니, 차웅이가 섭섭하기보다는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엄마 아들이니 차웅이도 분명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아이였을 거다. 이제까지는 늘 큰 아이의 이름으로 '○○엄마'라고 불려 왔지만, 참사 이후는 '차웅엄마'로 불리게 되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불리려고 한다는 차웅 엄마. 활발하면서도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차웅이가 우리 어깨에 손을 얹고 방긋하고 웃는 듯하다.
노력했던 아이, 수인이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와 거기에 나오는 노래를 좋아했던 수인이. 사진 찍는 걸 엄청나게 싫어해서 사진이 별로 없다. 반항기가 좀 빨라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내가 왜 시험을 봐야 해?",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해?"라는 의문을 가졌다. 수인 엄마는 주변 사람의 조언을 받고, 집을 나서기 전과 집으로 돌아온 뒤에 무조건 꼭 안아주며 '잘 다녀와, 잘 다녀왔지'라는 말을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왜, 자꾸 이러는데?'라는 표정이었지만, 나중에는 하나의 의식처럼 되어서 나가기 전, 집에 돌아오면 엄마를 불러서 안아 달라고 하게 되었다.
멀미가 너무 심해서 다섯 살까지는 마트에서 카트도 타지 못 했다. 바퀴 달린 것에 태우고 공중에 뜨기만 하면 멀미를 했으니 얼마나 심했는지 알 것 같다. 그런 수인이가 유치원에 갔다고 용기를 내서 놀이공원의 목마를 타게 된 것이다. 그래도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지, 사진은 즐거운 표정이라기보다는 목숨을 걸고 목마를 타는 듯한 얼굴로 표정은 엄청 굳어 있다. 일생일대의 큰 결심이니 이 사진을 보면 수인이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도 타고 나서는 잊지 않고 손가락으로 브이 사인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달리기를 잘했는데, 체육시간에 달리기 테스트가 있으면 엄마를 데리고 나가서 꼭 엄마한테 시간을 재 달라고 하면서 매일 서너 시간씩 일주일이나 연습을 하는 연습쟁이였다. 그렇게 해서 테스트에서 좋은 결과가 나와 친구들이 "야 너 잘한다"라고
칭찬을 하면, "뭘, 이런 거 보통이지~"라고, 마치 연습은 하지도 않았는데 타고난 재주라도 있는 것처럼 자랑했던 수인이. 언제나 그렇게 노력하는 아이였다.
수인이는 아이답지 않게 철학이 있는 아이였다. '약한 사람한테는 관대하고 강한 사람에게는 당당히 맞서자', 어렸을 적부터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 책에 나오는 인물들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수인 엄마는 수인이가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어 줬다고 한다. 소리 내서 읽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여러 소리를 흉내 내게 되었는데, 노란리본 극단을 시작하기 전에 대본을 읽는 모임에서 연출가에게도 눈에 띄어서 극단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빠를 닮아서 손재주가 좋고 자상한 시찬이
20대 중반이 된 시찬이는 어떤 모습일까? 시찬이가 정장을 차려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엄마의 바람으로 정장을 입은 시찬이를 포토샵 작업으로 만들어봤다. 집에도 시찬이랑 같은 크기의 등신대를 만들어 놓고 시찬이와 대화를 하고 있다. 늘 달라붙고 껴안는 걸 좋아했던 시찬이는 사진 찍을 때도 아빠랑 딱 붙거나 껴안거나 했다.
이제는 아빠를 업을 정도로 자라서 든든했던 시찬이. 가족들이 함께 나들이를 가서 찍은 사진에는 누나와 시찬이가 엄마에게 뽀뽀를 하며 애교를 떠는 모습이 배경의 노랗게 물든 은행잎과 어울려 너무 행복하고 아름답다. 세월호 CCTV에서 아빠가 찾아낸 시찬이의 마지막 모습. 친구들과 함께 있고 매점에 가는 사진. 가슴이 시리고, 아프다.
12월 겨울에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가 '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을
불러서 시찬이는 '꽁꽁군'이 되었다. 이것저것 만드는 걸 곧잘 하는 손재주꾼 시찬이. 아마도 아빠를 닮아서 그런 것 같다. 종이접기를 좋아하는 손재주꾼.
버킷리스트가 아주 많았다. 축하해 주는 걸 좋아해서 케이크로 축하해 주고 싶었는지, 케이크도 버킷리스트에 들어 있었는데, 미리 보지 못하고 나중에 봐서 챙겨주지 못한 것이 많이 후회가 된다. '여자 친구'는 있었을까. 평소에 시찬이는 결혼을 빨리 하고 싶어 했는데, 진도체육관에 있을 때 여자 친구가 찾아와서 시찬이가 자기 얘기를 많이 들어줬다고 전해 주었다. 여자 친구한테는 끔찍하게 잘해 주었을 거다. 이것도 아빠 닮아서?
시찬 아빠는 매월 한 번씩 생명안전공원 부지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아이들이 그곳으로 돌아오기 바라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해오고 있다.
"엄마 나 장가 보내줘" 꿈에 나타난 동영이
동영이는 어렸을 때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삼성에 들어가고 싶어 했는데,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엄마, 삼성 들어가기는 좀 힘들 것 같아요"라며 안정적인 직장으로는 공무원이 최고니까 공무원이 되겠다고 했다.
동영 엄마는 사진을 올리지 못 했는데, 사진만 생각하면 참 속상하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분식집을 시작했는데, 엄마가 바빠서 여행도 잘 다니지 못 해서 사진도 많이 찍지 못 했다. 동영이는 걷는 걸 좋아했는데 버스 타고 다니라고 하니까 교통비 아껴서 나중에 맛있는 거 사 먹겠다고 하는 알뜰쟁이였다.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에는 꽃 선물도 하고, 생일이나 어버이날도 잊지 않고 챙기는, 세심하면서 이름처럼 동글동글한 성격의 동영이. 동영 엄마는 아이가 없으니까 그런 날이 되면 더 생각이 난다고 했다.
어느 날 동영이가 꿈에 나타나 "엄마, 나 장가 보내줘"라고 했다고.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2014년 9월에 꾼 꿈인데, 지금도 너무 선명한 꿈을 잊을 수가 없다. 교복을 입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뚜렷하게 보였는데, 지금도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다. 엄마한테 한 것처럼, 결혼했다면 아주 자상했을 텐데.
참사 초기에는 밖에서 활동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공방에는 '나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나가는 것 같다. 공방에서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는데, 요즘에는 유화를 그리고 있다. 애니메이션 잘 그린 동영이, 음악 피아노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데, 망치더라도 물감을 엎어서 고칠 수 있는 유화에 흥미가 생겼다.
동영이는 수학여행 가기 전에 인터넷에서 옷을 주문했는데, 참사 이후에 도착해서 입지도 못 했다. 잘해 준 것보다 못해 준 게 기억난다.
위로하려고 갔는데, 오히려 위로받았다
올 7월에 애진이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소설 <루카스-가장 그리운 이름이거나>는 애진이가 언론과 한 인터뷰가 기반이 됐다. 모든 인세는 가족협의회에 기부하게 되어 있다. 애진이 이야기는 소설과 다큐멘터리 <드라이브 97>로 만나보면 좋겠다.
애진 엄마는 노란리본과 416기억상점에서 활동하고 있다. 기억상점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데, 처음에는 긴 싸움을 위한 재정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김 판매로 시작했는데 많은 분이 찾아와서 물건도 구매해 주시고, 여러 의견도 주셔서 정말 고맙다.
생존자 가족으로 함께 하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도 드는데, 애진 아빠는 참사 이전부터 활동가였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희생자 가족들이 애진이 부모를 보면 애진이가 떠오르고, 애진이를 떠올리면 떠나간 아이들이 생각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괜찮다'"고 손을 잡아 주며 말을 건네 주는 게 너무 고마웠단다.
위로를 해 주려고 갔는데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다른 생존 가족들도 가협에서 활동하는 분도 있고, 회비를 내거나 하는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다. 생존 학생들도 힘들어하지만, 각자 다양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아플 거라고 걱정만 하지 말고 응원을 보내 줬으면 좋겠다는 게 애진 엄마의 바람이다.
"우리는 이제 갇혀 있지 않아요"
모임에 앞서 있었던 참가 단체 소개에서는, 모두가 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가족들과 함께 할 것을 다짐했다. 이날 모임에서 시찬 아빠가 보여 준 사진이 있다. 2014년 5월, 가족들이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에 있을 때 뉴욕에서 아이들의 영정 사진을 들고 집회를 하는 사진이다.
시찬 아빠는 이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이제 갇혀 있지 않다. 절망하지 말고 아이들 찾고, 다시 시작해서 나가자"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비록 우리는 떨어져 있지만, 우리의 작은 행동들이 가족들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준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아이들이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남겨 준 숙제를 마칠 때까지 가족들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