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과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다
수운 선생은 남원 은적암에 머물면서 그동안 구상해 왔던 경전 집필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글이 동학론 즉 논학문이다. 동학(東學)과 천도(天道)에 대한 이치를 논리적으로 풀어냈다. 무극대도의 심법과 동학의 이치가 오직 이십 일자(지기금지원원대강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에 있으며, 수도자는 모두 지극한 성인(聖人)에 이른다는 말씀이다.
또한 그 상위 개념으로 영부(靈符)의 이치인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즉 한울님 마음과 수운의 마음이 한마음이라는 진리를 온전히 깨달은 것이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도 원래 한마음이며, 모두가 시천주(侍天主) 즉 인내천(人乃天)이라는 결론적 말씀이었다.
수운 선생은 약 5개월간 은적암의 생활을 마감하고 새로운 각오의 결심을 굳히게 된다. 지금까지 조심스런 마음인 소극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인 행동으로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굳힌 것이다. 수운 선생의 앞으로의 행보는 동학과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거는 거침없는 실천으로 이어질 것이다.
영원의 빛나는 하늘
신동엽 시인은 수운 선생의 주유천하와 은적암행 등 조선 팔도를 돌아다닌 구도 행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다.
짚신 신고 수운은, 3천리 걸었다.
1824년 경상도 땅에서 나
열여섯 때 부모 여의고 떠난 고향.
수도 길.
터지는 입술 갈라지는 발바닥 해어진 무릎
20년을 걸으면서, 수운은 보았다.
팔도강산 딩군 굶주림
학대. 질병. 양반에게 소처럼 끌려다니는 농노. 학정
뼈만 앙상한 이왕가(李王家)의 석양.
2천 년 전 불비 쏟아지는 이스라엘 땅에선
선지자 하나이 나타나
여문 과일 한가운델
왜 못박혔었을까.
3천 년 전
히말라야 기슭
보리수나무 투명한 잎사귀 그늘 아래에선
너무 일찍 핀 인류화(人類花) 한 송이가
서러워하고 있었다.
1860년 4월 5일
기름 흐르는 신록의 감나무 그늘 아래서
수운은, 하늘을 봤다.
바위 찍은 감격,
영원의 빛나는 하늘
1862년 5월경, 수운 선생은 남원 은적암을 떠나 경주로 돌아온다. 우선 경주 건천 백사길의 집에 들렀다가 용담과 멀지 않은 서면 박대여 집에 은거한다. 용담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주 외곽에 머물며 경주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은적암에서 썼던 <수덕문>과 <몽중노소문답가>를 필사(筆寫)한다.
수운 선생이 남원에서 경주로 돌아오자마자 수덕문을 필사하여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포덕에의 의지를 다지고, 또 몽중노소문답가를 필사하여 하원갑의 시대가 가고 상원갑의 시대가 도래함을 설파하였다.
동학의 2인자 해월 최시형의 등장
수운 선생이 경주 서면 박대여의 집에 잠깐 머물고 있을 때 뜻밖에 최경상(崔慶翔_해월 최시형의 초명)이 찾아온다. 이때 수운과 해월은 동학의 이치에 대한 깊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질문하는 해월 선생의 경지가 날로달로 발전함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함으로 수운 선생은 해월 제자에게 명교한다.
"그대는 이제부터 포덕(布德)에 종사하라. 덕(德)이 있고도 덕을 펴지 아니하면 이것은 종자를 두고 심지 않는 것과 같다. 그대의 운수는 앞으로 크게 뻗어 갈 것이니 명심하여 사람을 건져라."
해월 선생은 수운 선생으로부터 포덕의 명을 받고 평소 친분이 있는 흥해에 사는 김이서(金伊瑞)를 만나, 직접 포덕하라는 명교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벼 100석을 빌렸다. 김이서는 벼 100석을 선뜻 내주었다.
이때부터 해월 선생은 경북 일대의 동해안을 중심으로 많은 포덕을 한다. 해월 선생이 포덕한 대표적인 인물로 '영덕의 오영철, 유성훈, 박춘서, 상주 김문여, 홍해 박춘언, 예천의 황성백, 청도 김경화, 울진 김욱생' 등이 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의 이력
잠시 해월 최시형 선생의 이력을 살펴보자. 해월 선생의 부친은 종수 어른이며 모친은 월성 배씨로, 1827년 3월 21일 경주 황오리에서 태어나 포항 신광면 터일 마을에서 자랐다. 처음 이름은 경상(慶翔)이고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이며 훗날 스스로 고친 이름은 시형(時亨)이다. 여섯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영일 정 씨를 새어머니로 섬기며 자랐다.
열다섯 되던 해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세 살 아래인 누이동생과 헤어져 먼 일가의 머슴으로 갔다. 17세 되던 해에 고향인 포항 신광면 인근의 제지소에서 노동자로 일하였다. 19세에 흥해에서 손씨 부인과 결혼하고 10년 고생 끝에 마북동 산골에 땅을 장만하여 농사를 지었으나 생활은 여전히 가난하였다. 33세 되던 1859년 마북동을 떠나 더 깊은 산중인 검곡으로 이주하여 화전을 일구며 살아간다.
35세 되던 신유년(포덕 2년, 1861) 초여름 깊은 산중 검곡에도 새로운 소식, 즉, '경주 용담에 성인이 나서 세상을 건질 도를 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해월 선생은 곧장 용담정으로 향하여 수운 선생을 만나뵙고 동학에 입도한다.
해월 선생은 35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수행하며 한 달에 두 번씩 용담을 찾아 수운 선생께 직접 지도를 받았다. 지극한 정성으로 수도에 전념하여 해월 선생은 매일 새벽 냉수로 목욕재계하고 수운 선생의 수심정기 수도법을 조금도 어김없이 실천하였다.
훗날 해월 선생은 '일용행사가 도 아님이 없다' 즉 '모든 일이 다 한울님 일이다'와 '사람의 말이 곧 한울님 말씀이며, 새소리도 천어(天語) '이고, 초목도 한울님 생명'이라는 유명한 법설을 남겼다. 현재 기후 온난화 등 환경 문제를 해결할 큰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관의 탄압이 본격화 된다
1862년 7~8월부터 수운 선생이 머무는 박대여 집에 동학 도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수운 선생이 돌아왔다는 입소문도 있었고, 해월의 눈부신 포덕 활동으로 입도한 이들도 있었다. 당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삼남 일대는 민란으로 어수선하였다. 2월부터 진주 민란을 시작으로 민란이 전국으로 퍼졌다.
관군의 무차별 진압으로 8월경이 되어서야 민란은 진정세를 보였으나, 관에서는 백성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많은 사람이 수운 선생 곁으로 모여들었다. 경주 감영은 민란을 우려하여 수운 선생을 체포한다. 영장(營將)이 수운 선생에게 묻는다.
"너는 일개 가난한 선비로서 무슨 도덕이 있어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세상을 조롱하며 이름을 얻어 술가(術家)의 말을 하는가? 너는 의술의 의원도 아니요, 점치는 점쟁이도 아니요, 굿을 하는 무당도 아니다. 생계는 무엇인가?"
수운 선생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장을 쏘아보며 대답하기를, "사람을 가르치는 훈학(訓學)을 직업으로 삼는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도 있는가?"하며 조금도 굽힘 없이 영장을 꾸짖듯이 말했다. 영장은 수운 선생의 당당한 모습과 의연한 답변에 그만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동학 최초의 집단 시위
9월 29일, 수운 선생이 체포되자 수백 명의 제자가 경주 감영으로 몰려간다. 동학 역사에서 최초의 집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관에서는 민란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수운 선생을 석방한다. 수운 선생은 6일 만에 풀려나 10월 5일 박대여 집으로 가서 짐을 정리하고 곧바로 용담으로 향한다.
수운 선생이 체포되었다 풀려난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도인들이 더욱 증가하였다. 다만 수운 선생은 포덕을 더 신중하게 하도록 하였고 마음 공부에 힘쓰지 않고 이적(異蹟)이나 바라는 도인들을 경계하면서, '말조심 하라'는 뜻의 시 한 수를 지어 제자들에게 건넨다.
병 속에 신선주가 들어있으니 가히 백만 인을 살리리라.
쓸 곳이 있어 천 년 전에 빚어 잘 간직하여 오던 술이다
부질없이 한 번 마개를 열면 냄새도 흩어지고 맛도 엷어지리라
지금 도 닦는 우리는 입조심 하기를 이 술병을 간수하듯 하라.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