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 → 일제강점 → 식민지 → 민족해방 → 미군정 → 분단 → 6.25전쟁 → 이승만독재 → 4월혁명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유림이 겪어온 삶의 공간과 일치한다. 이 기간 의식있는 한국인으로 살기에는 가혹한 시련이 따랐다. 그는 운명적으로 이 시기에 정면으로 맞서며 고된 생애를 보내었다.
독립운동·임시정부 국무위원 등 사회가 정상이었으면 시대의 주역이었을 것이지만, 비정상이 정상이 된 한국현대사에서 그는 아웃사이더였다. 아나키스트의 운명이랄 수도 있겠다.
정치는 항상 필연적으로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여기에서의 권력은 강요에 의한 권력이자 동의에 의한 권력이다. 유일하게 그러한 유희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자들이 아나키스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적 성공을 위한 사명감도 턱없이 부족하다. 분열되고, 또 다른 혁명적인 힘과 벽을 쌓고 배반당하면서도, 어떻게 그들은 스스로의 머릿속에,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구상하는 사회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들은 진정으로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하는가? 그들은 위험한 일임을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과연 그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는가? 확고한 자들은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주석 1)
오랜 망명생활과 6년의 옥고, 해방 후 홀로 살면서 겪은 고독과 부실한 식생활, 그리고 나라의 방향이 자신이 뜻한 바와는 달리 진행되는 시국, 4월혁명 후에도 거듭된 총선 패배 등 힘겨운 삶이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언론인 출신 시인 구상(具常)은 "자신의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한 분을 처들라면 단연 단주 유림 선생이다."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것은 내가 선생이 독립운동가로서의 경력이나 업적에 대한 비교평가에서라기보다 6.25동란 중 피난지 대구에서 우연히 지우(知遇)를 얻을 때마다 선생의 고매한 인품에 접했을 뿐 아니라 그 청빈, 아니 적빈의 생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상이나 지조는 둘째로 하고 그때 그들의 생활을 우선 소개하면 선생은 대구 옛 역사(驛舍) 앞 북성로에 있는 일본식 목조건물 마루방에서 겨울에도 불기 하나 없이 홀로 사셨는데 언제 가서 뵈오나 외국의 사상서적들을 읽고 계셨다.
선생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의 한 분이었음은 기록으로 다 아는 바이지만 선생은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아나키즘이라는 인류적 이상과 세계관을 지니고 또한 그 구현에 열정을 갖고 헌신하는 사상가였으며(중략). (주석 2)
1961년 4월 1일 낮 12시경 민족운동사의 큰 별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68세였다.
당시 서울 제기동에 식사를 마련해 주는 가정부를 두고 혼자 살던 그의 살림형편은 무척이나 쪼들렸다. 61년 4월 1일 낮 12시 그가 마당에서 나무를 심다 심장마비로 서거한 바로 그 시각, 가정부는 쌀을 마련하려고 거처를 헤매고 있었다.
멀리 만주벌판에서, 또한 분단된 이 땅의 한 모서리에서 70 가까운 생애를 통해 순난의 길을 기꺼이 걸어갔던 그가 삶을 마감한 때엔 아무도 그 곁을 지켜보지 못했다. 4월 7일 수유리 묘소로 향하기 직전 시청 앞 광장에서 치러진 사회장 만큼은 3천여 명의 조객이 참가했으나……. (주석 3)
장례위원장 심산 김창숙의 비통한 추모사는 조객들의 눈물샘을 파고들었다.
단주 옹이야말로 티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애국지사였습니다. 일찍이 권력에나 금력에 흔들리지 않고, 철석같은 절조가 높으신 개결한 분이었습니다.
흑자가 그분의 성격이 괴벽하다고 말을 하지마는 그 결점이 바로 그 분의 장점이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추상같은 고고한 절조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나는 현대에 있어서 그러한 분으로는 오직 한 분이신 옹을 충심으로 경모해 왔던 터이었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그러한 분이 하루라도 더 살아 계셔야 할 터인데 이제 가시다니 차라리 내가 죽고 못 당할 노릇입니다.
김창숙은 추모사에 이어 만장을 썼다. 두 구절이다.
그대 있을 제 대한이 무겁더니 그대 가버려 대한이 비었구나.
(君在大韓重 君去大韓空)
그대 곧 천하요 선비로 백세토록 홀로 청풍이어라.
(君是天下士 百世獨淸風).
노산 이은상의 <유림 선생 조가>가 영전에 헌정되었다.
조국이 어둠 속에 잠길 제
영화도 행복도 모두 떨쳐버리고
비 바람 이억 만리 쇠사슬 속에서도
오직 송백인양 맵고 차더라
피로써 찾고 의로써 세운 나라
님과 우리 할 일이 산 같이 쌓였는데
오! 봄은 오고 님은 가시네
동지들 여기 목놓아 우네
정기를 잃어버린 세대여
겨레의 가는 길 누가 잡을꼬
하나가 백인 듯이 아깝고 아쉬운데
큰 나무 우지끈 부러지다니
피로써 찾고 피로써 세운 나라
마지막 순간까지 외치던 독립전선
오! 봄은 오고 님은 가시네
동지들 여기 다시 일어섰네. (주석 4)
정부는 1962년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주석
1> 장 프레포지에 지음, 이소희 외 옮김, <아나키즘의 역사>, 465쪽, 이룸, 2003.
2> 구상, <단주 유림선생 추모>, <월간 독립기념관>, 1988년 7월호.
3> 김재명, 앞의 책.
4> 유원식, 앞의 책, 28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